■ 경주이씨/행사 및 제례

추도식(追悼式)과 추모식(追慕式)의 의미

야촌(1) 2013. 5. 23. 14:48

[데일리안]

<사회> 2012. 08. 19 10: 23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용어나 습관중에는 알게 모르게 지난 날 일제식민시대 일본이 가르쳐 준 것들이 많다. 그 중에는 순수한 일본문화도 있지만, 서양문화를 일본이 먼저 받아들여 일본식으로 개조한 것들도 많다. 

 

그것들을 아무 생각 없이 지금까지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일전에 필자가 지적한 ‘근조용 위생마스크’와 ‘국민계몽용 또는 근조용 리본’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코사지(코르사주, corsage)란 결혼식, 기념식 같은 행사 때 여성이 머리나 옷에 다는 꽃, 혹은 꽃 장식을 말한다. 물론 서양에서 유래된 것으로 우리에겐 약간 생소하기는 하다. 

 

그렇지만 옛 신라 화랑들이 즐겨 머리에 꽃을 꽂았었고, 과거에 급제하면 어사화를 꼽았으며, 또 전통적으로 풍물놀이를 할 때 고깔에 오색 지화(紙花)를 다는 것으로 보아 지금이라고 굳이 어색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무튼 개화기 일본에서 이를 받아들이면서 리본으로 대신함으로써 지금까지 일본과 한국에서 줄곧 사용하고 있다.

 

이에 대한 필자의 글이 나간 후 국군의장대의 ‘근조용 위생마스크’와 광복절 기념식에서의 ‘일제 리본’이 사라졌음에도 ‘고(故)육영수여사 38주기 추도식’과 ‘고(故) 김대중대통령 3주기 추모식’에서는 여전히 이 검정 일제 리본이 등장했는데, 묘하게도 ‘독도는 우리 땅’을 빌미로 같은 날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는 일본 각료들의 가슴에 단 리본과 앙상블을 이루고 있어 씁쓸하다.  이러니 세계인들의 눈에는 한국문화가 일본문화의 아류로 비치는 게 아닌가?

 

세계 속의 한국이라는 주도적 진화를 해내기 위해 우리는 이제 이런 일상적인 것들을 제대로 파악해서 지난날의 유산들을 계승도 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청산도 해야 한다. 예전에 ‘국민학교’를 ‘초등학교’로 바꾼 것처럼 ‘일제 리본 추방 운동’이라도 해야 할까. 전국의 명산 정상마다 박아 놓은 일제 시대 측량용 쇠말뚝은 민족정기 운운하며 다 뽑아내면서 가슴에 달린 리본 하나 못 떼어내서야 말이 되는가.

 

굳이 일제의 잔재가 아니라 해도 리본 자체가 조잡하고 거추장스러우며 세련되어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흡사 초등학생 숙제 검사 받고 ‘검(檢)’자 도장 받는 꼴 같으니 하는 말이다. 그런 것 달지 않았다 하여 그 행사의 의미나 명칭을 모르거나 달리 오해할 정도로 미개한 국민 한 명도 없다는 말이다. 

 

더구나 구태여 뭘 새로 만들어 달자는 것이 아니라 그냥 달지 말자는 거다. 전혀 힘들거나 어려운 일도 아니다. 당장 지도층에서부터 솔선해야 할 것이다.

 

추도식(追悼式)? 추모식(追慕式)?

 

더욱 안타깝고 한심한 것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추도(mourning)와 추모(cherishing the memory)를 구분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박근혜 의원과 박지만 씨가 단 리본에는 분명 ‘근도(謹悼)’라고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다. 

 

추도(追悼)는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고 위로하는 것을 말한다. 하여 장례의 다른 말로도 쓰이기도 하고, 따로 교회 같은 곳에서 그 가족들을 위로하며 애도(哀悼)의 모임을 가질 때 사용하는 말이다. 비슷한 말이지만 ‘추모(追慕)’란 엄연히 그와 다른 뜻이다. 

 

고인을 그리워하고 기린다는 의미다. 헌데 38년이 지난 지금도 애도하고 추도(追悼)한다? 설마 그날 그 리본? 기일(忌日)이라면 ‘근도(謹悼)’가 아니라 ‘근모(謹慕)’여야 맞다. 뭐 그 까짓, 관습적으로 서로 혼용해서 쓰이기도 한다고 둘러댄다면 굳이 다시 우길 생각도 없지만, 어느게 맞다 틀리다 할것 없이 제발이지 이참에 근조 리본뿐 아니라 일체의 리본 다는 관습이 없어졌으면 싶다. 

 

그냥 깔끔하게 맨가슴으로 추모하든지 아니면 세계인 누구나가 보아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는 코사지나 고인을 연상케 하는 어떤 상징을 브로치로 만들어 달고 나왔으면 한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경선후보가 15일 서울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어머니 고 육영수

여사 제38주기 추도식에서 육 여사의 생전 육성을 들은뒤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있

다. ⓒ데일리안 박항구 기자 주인의식 부재에서 온 한국 리더들의 몽매함

 

더더욱 한심한 일은 그 ‘근도(謹悼)’리본의 다른 한쪽 가지에는 ‘故육영수여사38주기추도식’라고 인쇄되어 있다. 당연한 건데 그게 무슨 문제? 오자라도 있나? 물론 없다. 문제는 이 리본을 다른 사람도 아닌 박근혜 박지만이 달고 있다는 데에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두 사람은 육영수 여사의 딸과 아들이다. 그러니까 자신들의 어머니 묘소에 기일을 맞아 추모하러 왔다. 언제나처럼 전몰 용사를 기리는 의전행사로 헌충원에 참배하러 온 것이 아니다. 남의 추도식이나 추모식에 참석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 묘소에 추모하러 왔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이 두 사람은 초대 받고 온 손님(guest)도 아니고 주빈도 귀빈도 아니다. 바로 이 모임의 주인(host), 즉 제주(祭主)다. 그 호스트가 게스트처럼 맨 앞 귀빈석에 앉아 있고, 혹여 모를까봐(누가?) 행사의 내용을 알리기 위해 주최측(?)이 나눠주는 계몽용 리본을 달고 있다니 왠지 어색하지 않은가?

 

자신들의 어머니를 남 부르듯 ‘아무개여사’라고 찍은 리본을 그 자녀들이 달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렴 그 리본 안단다고 해서 누가 호스트를 몰라보겠는가. 추모식의 호스트면 스스로가 좌장이 되어 마주 서서 함께 해준 추모객들에게 일일이 감사의 말로 환대해야 하지 않은가?

 

자신이 호스트임에도 불구하고 초대받은 귀빈들과 같이 리본을 달고 앉았다가 순서가 되어 나아가 향을 사르고 묵념하고 방명록에 사인하고 가버린다? 넌센스다. 싸구려 리본 대신 필자가 지난 글에서 제안했던 목련꽃 코사지를 달고 아침 일찍 나와 추모객들을 맞았어야 했다. 

 

적어도 이날만은 다른 일정 잡지 말고 마지막 추모객이 돌아갈 때까지 지켰어야 했다. 

정히 박근혜 의원이 공적인 일로 바쁘다면 다른 가족 누군가가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런게 소통이고, 그런게 진정성이다.

 

이미지는 품격이다

 

아무튼 10월 26일이면 박근혜 의원은 다시 그 묘소를 찾을 것이다. 그날에도 또 다시 내외귀빈용 일제 검정 리본을 달고 나오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해마다 벌이는 천편일률적인 행사, 똑같은 사진, 바뀐 것이라곤 겨우 리본의 숫자 뿐. 감동이 있을리 없다. 

 

추도식과 추모식, 호스트와 게스트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디테일하지도 성숙되지도 못한 문화수준. 역사가 신화가 되지못하고 추모객이 줄어드는 만큼 기억처럼 희미해져 색이 바래지고 있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신화는 가꿀수록 아름다워지고 커진다.

 

지도자는 모든 언행이나 치장조차 곧바로 국격(國格)으로 직결된다.

 

나랏일을 하는 지도자라 하여 거창한 일만 중시하고 작은 일에 관심가질 틈이 없다 해서는 생각이 너무 짧다 하겠다. 세상을 바꾸는 거대한 변화도 언제나 사소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지만 상징적인 것부터 챙기지 못하는 리더에게 역시나 큰일인들 제대로 해내리라는 기대 못한다. 

 

지도자에겐 사소한 것이란 없다. 스스로 챙길 수준이 안 되면 전문 코디네이터라도 곁에 두어야 할 것이다. 

잘 짖는 대변인 백 명보다 유능한 코디네이터 한 명이 수만 배나 더 값진 일을 해낼 수도 있다.

 

이제 한국인들도 올림픽에서 웬만한 종목에서 금메달 땄다 하여 호들갑스럽게 감격해 하지 않는다. 새로운 종목이나 뭔가 이야기가 있어야 감동 받는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거창한 개발 프로젝트, 좀 더 업그레이드된 정책, 선심성 구호 등 상투적인 약속에 아무런 감동 못 받는다. 

 

오히려 작지만 진정성이 보일 때 사람들은 감동한다. 아무렴 논리보다는 감정에, 이성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민족이 한국인 아니던가. 관록의 시대는 진즉에 끝났다. 더불어 계몽의 시대도 끝났다. 정치는 예술이다. 이미지를 디자인할 줄 모르면 정치 못한다. 

 

시대를 읽을 줄 아는 리더라면 굳이 운동화 신고 시장통을 쓸고 다니며 표 구걸하지 않는다. 너나 나나 별 차이도 없는 정책 개발한다고 머리 싸매지 말고 문학, 예술, 역사, 철학 등 인문학적 소양부터 갖추어야 할 것이다. 명품은 기술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명품은 좇아다니며 팔지 않는다. 품격은 시대를 관통한다.

 

글/신성대 도서출판 동문선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