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현일(李玄逸)
1627(인조 5)∼1704(숙종 30).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재령(載寧). 자는 익승(翼昇), 호는 갈암(葛庵). 아버지는 참봉 시명(時明)이며, 어머니는 안동 장씨(安東張氏)로 흥효(興孝)의 딸이다. 휘일(徽逸)의 아우이다.
1646년(인조 24)과 1648년에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를 단념하였다. 1652년(효종 3) 중형 휘일의 《홍범연의 洪範衍義》 편찬에 참여했으며, 1666년(현종 7)에는 영남 유생을 대표해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을 비판하는 소를 올렸다.
1674년에 학행으로 명성이 높아지자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나가지 않았다.
1676년(숙종 2) 사직서참봉(社稷署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삼년상이 끝나지 않아 나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 이어 공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사은(謝恩)만 하고 곧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어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78년 공조정랑·지평에 임명되었으며, 외척의 용사와 당쟁의 폐단 등을 논하였다.
1686년에는 《홍범연의》를 속성(續成)했으며, 1689년 산림(山林 :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한 학파와 정파를 아우르는 우두머리)에게만 제수되는 사업(司業)에 임명되고, 이어 사헌부장령·공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이 때 인현왕후(仁顯王后) 폐비문제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임술 무옥의 신설(伸雪 :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건의했고, 6월에는 산림유현(山林儒賢)의 벼슬인 좨주(祭酒)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에 참석하였다.
이어 예조참판 겸 좨주·원자보양관(元子輔養官)에 제수되어 거듭 사임의 뜻을 표했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8월에는 겸직과 함께 대사헌에 올랐고, 9월에는 인현왕후를 위한 소를 올렸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고 11월에는 분황(焚黃 : 관직이 추증될 경우 자손이 추증된 자의 무덤에 가서 누런 종이의 부분을 태우던 의식)을 이유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1690년 이조참판·세자시강원찬선에 임명되어 세자책례(世子冊禮)에 참석했고, 다시 대사헌·이조참판에 거듭 임명되었으나 그 때마다 사직 상소를 내었다. 1692년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경신·임술 무옥의 신설을 건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어 병조참판· 자헌대부(資憲大夫)· 우참찬· 이조판서에 연이어 임명되었다.
1694년 4월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 갑술환국 때 조사기(趙嗣基)를 신구하다가 함경도 홍원현으로 유배되었다.
다시 서인 안세징(安世徵)의 탄핵을 받아 종성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으며, 유배지에서 글을 가르치며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완성하였다.
1697년 호남의 광양현으로, 1698년에 갈은리(葛隱里)로 유배지가 바뀌었고, 1699년에는 방귀전리(放歸田里 : 재야로 돌아감)의 명이 내렸다. 1700년에는 안동의 임하현 금소역(琴詔驛)에 이거했다가, 여기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금양(錦陽)에서 집을 짓고 강학하였다.
1701년 인현왕후가 승하하자 석방 명령을 환수했으나 압송되지는 않았다.
1704년에 인덕리(仁德里)로 이거했다가 금소로 돌아와 금양에서 죽었다.
1710년에 죄명이 풀리고 이듬해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718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853년(철종 4) 다시 복관되었다가 환수되었다.
1871년(고종 8)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가 환수되었으며, 1909년에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다.
↑ 갈암 이현일 팔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