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단종 2)∼1488(성종 19). 조선 전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미(子美), 호는 풍월정(風月亭). 추존왕 덕종(德宗)의 장자(長子), 어머니는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韓氏)이다. 성종의 형으로 평양군(平陽君) 박중선(朴中善)의 사위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인 세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궁정에서 자랐다. 7세 때인 1460년(세조 6) 월산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동생인 잘산군(乽山君 : 성종)과 함께 현록대부(顯祿大夫)에 임명되었다.
1471년(성종 2) 월산대군으로 봉해졌고, 같은 해 3월 좌리공신(佐理功臣) 2등에 책봉되어 전지(田地)·노비·구사(丘史) 등을 왕으로부터 받았다. 이러한 좌리공신의 책봉은 그에게 돌아올 수 있었던 왕위 계승의 상실에서 나온 조처였다.
예종 사후에 왕세자인 제안대군(齊安大君) 현(琄)과 월산대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종이 왕위에 즉위한 것은 어떤 정치적 내막이 깔려 있었다. 곧, 성종의 즉위는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세조의 유명을 받들어 시행한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당시의 최고 권신이자 성종의 장인인 한명회(韓明澮)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다.
이러한 비정상적인 성종의 즉위에 대한 종실의 반발을 막기 위해 종실의 대표자격이고, 당시 막강한 세력을 구축하던 구성군(龜城君) 준(浚)을 제거하고 권신들이 스스로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취한 조처의 하나가 좌리공신의 책봉이었다.
당시의 왕위 계승에서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던 월산대군은 권신들의 농간에 의해 좌리공신에 책봉되는 비운을 맞자, 이로 인해 현실을 떠나 자연 속에 은둔해 조용히 여생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 후 그는 서호(西湖)의 경치 좋은 양화도(楊花渡) 북쪽 언덕에 위치한 희우정(喜雨亭)을 개축해 망원정(望遠亭)이라 하고, 서적을 쌓아두고 시문을 읊으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뒤 어머니인 덕종비 인수왕후(仁粹王后 : 뒤에 소혜왕후로 추존)의 신병을 극진히 간호하다가 병들어 35세로 죽었다. 적자는 없고, 측실에서 난 두 아들이 있었다.
1473년 이후 덕종을 추존하고 종묘에 부묘(祔廟)하기 이전에는 월산대군이 별묘를 세우고 봉사(奉祀)해 덕종의 맏아들로서 행세할 수 있었다. 덕종이 종묘에 부묘되면서 그의 위치는 종실의 한 사람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일찍부터 학문을 좋아해 종학(宗學)에 들어가 배웠고, 경·사·자·집(經史子集)을 두루 섭렵했다고 한다. 성품은 침착, 결백하고, 술을 즐기며 산수를 좋아했다고 한다. 또한 부드럽고 율격이 높은 문장을 많이 지었으며, 시문 여러 편이 ≪속동문선 續東文選)≫에 실릴 정도로 수준이 높았다. 저서는 ≪풍월정집≫이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산16-35에 있는 월산대군 부부 묘.
뒤의 봉분이 부인인 승평부대부인 순천박씨(昇平府大夫人 順川朴氏, 1455년 - 1506년 7월 20일)의 묘다.
사관들은 연산군이 백모인 박씨를 강간해 박씨의 동생 박원종이 반정을 주도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억지일 가능성이 크다. <사진 고양시>
↑월산대군신도비(月山大君神)道碑)
1489년(성종 20) 왕명으로 세워진 이 비(碑)는 크게 대좌, 비신, 이수로 이루어져 있고, 대좌에는 비신을 꽂을 수 있도록 비좌가 만들어져 있으며, 연꽃무늬가 돌아가며 새겨져 있다. 비신의 비문은 풍우에 의한 마모로 심하게 훼손되어 판독이 어려운 상태이다.
또한 비신의 높이는 218cm, 폭 105cm, 두께 32cm의 규모이고 비문은 임사홍(任士洪, 1445(세종 27)~ 1506(중종 1)이 짓고 썼으며, 전액도 함께 썼다. 임사홍은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이다.
그 자신뿐만 아니라, 세 아들 중 두명이 왕실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1466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1506년에 아버지와 함께 처형당한 인물인데,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간신으로 이름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