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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봉서원(迎鳳書院)/忠賢祠의 후신

야촌(1) 2012. 7. 31. 22:01

■ 영봉서원(迎鳳書院)

 

성주(星州) 영봉서원(迎鳳書院)을 창건할 때 처음에는 이문열 조년(李文烈 兆年)과 이문충 인복(李文忠 仁復)과 김한훤(金寒暄)을 모두 합향(合享)하려고 하였었다. 그러나 제생(諸生)들은 모두 한훤만 독향(獨享)으로 하려 하였고, 문충을 배향하려는 자는 10여 명밖에 되지 않았는데, 또 문열을 함께 병향(幷享)하려고 하면 모든 선비는 들은 척도 안하면서 신을 신고 가 버렸다.

 

이는 대개 문열의 유상(遺像) 한 폭이 있었는데 손에 수주(數珠=염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퇴계(退溪)는 이르기를, “한 시대의 습속은 비록 어진 자로서도 면할 수 없으니, 그 화상을 없애 버리고 자그마한 결점을 가리는것이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는 《여사(麗史)》에 상고해 보니, 두 이공(李公)은 모두 도학(道學)을 일컬을 만한 점이 없고, 그때 정충(貞忠)과 대절(大節)은 문열이 훨씬 나았다. 이 때문에 퇴계도 깊이 애석하게 여겼던 것이다. 문열은 충혜왕(忠惠王) 때에 벼슬하면서 죽음을 피하지 않고 과감스럽게 간하였으나 끝내 말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벼슬을 내놓고, 시골로 돌아와서 죽었으니, 시종이 한결같이 깨끗하고 분명한 인물이다.

 

문충은 공민왕(恭愍王) 때에 벼슬했는데 역시 강직하다는 칭찬이 있었다. 임종시에 그의 아우 인임(仁任)이 염불(念佛)을 조금해보 라고 권하자 공은 대답하기를, “내가 평생에 영불(佞佛)은 하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내 마음을 속이고 할 수 있겠느냐.”라고 거절하였다.

 

그는 일찍이 두 아우인 인임과 인민(仁敏)의 위인을 미워하여 이르기를 “ 나라를 망하게 하고 집안도 보전하지 못할 자는 반드시 두 아우일 것이다.”라고 했는데 나중에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대개 그때 풍속은 불교(佛敎)를 숭봉하지 않은 이가 없었기 때문에 문열 같은 어진 이로서도 면치 못했었다.

 

그런데 오직 문충만은 온세상이 그르다 해도 혼자 꿋꿋하게 서서 제대로 행한 자라 할 수 있다. 그때 이단(異端)을 물리친 공은 이미 오도(吾道)에 대해 빛나게 되었으니, 죽어서 낙조(樂祖)로 된 것이 또한 마땅한 일이 아니겠는가?

 

문열 같은 이에게 이르러서는 비록 기절은 추앙할 만하나 속습을 면치 못하고 이교(異敎)에 빠지게 되었으니, 자그마한 결점이아니라 할 수 없다. 비록 가리고자 한들 제대로 되겠는가?화상은 없앨 수 있다 할지라도 마음속에 지닌 것은 고칠 수 없는 것인데 덮어놓고 다 같이 일컫는다는 것은 또한 미안할 듯하다.


[주01]영봉서원(迎鳳書院) : 조선(朝鮮) 시대 선조(宣祖) 임인년(1602)에 세운 충현사(忠賢祠)의 후신.

[주02]김한훤(金寒暄) : 조선시대 연산(燕山)때 김굉필(金宏弼)의 호.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

 

  [출전]

  성호사설 제24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