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강항(姜沆)

야촌(1) 2012. 7. 14. 00:24

■ 강항(姜沆)

 

   [생졸년] 1567년(명종 22)∼1618년(광해군 10).

   [문과] 선조(宣祖) 26년(1593) 계사(癸巳) 전주별시(全州別試) 병과(丙科) 5위(7/9)

   [진사시] 선조(宣祖) 21년(1588) 무자(戊子)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2등(二等) 11위(16/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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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태초(太初), 호는 수은(睡隱)‧ 사숙재(私淑齋). 전남 영광 출신이다. 그는 좌찬성 강희맹(姜希孟)의 5대손으로, 부친은 강극검(姜克儉)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93년 전주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正九品)가 되었다.

이듬해 가주서(假注書-正七品)의 임시관직)를 거쳐 1595년 교서관박사(校書館博士-正七品)가 되고, 이듬해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에 이어 형조좌랑(刑曹佐郞-正六品)이 되었다.

 

1597년 휴가로 고향에 내려와 있던 중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분호조 참판 이광정(李光庭=본관: 新原州)의 종사관으로 군량미 수송의 임무를 맡았다.

 

아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남원이 함락 당하자, 고향으로 내려와 순찰사 종사관 김상준(金尙寯=본관: 新安東金)과 함께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인을 모았으나 영광이 함락되자 가족들을 거느리고 해로로 탈출하려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압송, 오쓰성(大津城)에 유폐되었다.

 

이곳에서 출석사(出石寺)의 중 요시히도(好仁)와 친교를 맺고 그로 부터 일본의 역사. 지리. 관제 등을 알아내어 《적중견문록(賊中見聞錄)》에 수록, 본국으로 보내기도 하였다.

 

1598년 오사카(大阪)를 거쳐 교토(京都)의 후시미성(伏見城)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후지와라(藤原醒窩). 아카마쓰(赤松廣通) 등과 교유하며 그들에게 학문적 영향을 주었다.

 

특히, 후지와라는 두뇌가 총명하고 고문(古文)을 다룰 줄 알아 우리나라의 과거절차 및 춘추석전(春秋釋奠). 경연조저(經筵朝著). 공자묘(孔子廟) 등을 묻기도 하고, 또 상례. 제례. 복제 등을 배워 그대로 실행, 뒤에 일본 주자학의 개조가 되었다.

 

일본에 억류 중두 사람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1600년에 포로생활에서 풀려나 가족들과 함께 귀국하였다.

 

1602년 대구교수(大丘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스스로 죄인이라 하여 곧 사직하였으며, 1608년 순천교수(順天敎授)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부임하지 않고 향리에서 독서와 후학 양성에만 전념, 윤순거(尹舜擧)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였다.

 

일본에 억류 중 사서오경의 화훈본(和訓本) 간행에 참여하여 몸소 그 발문을 썼고, 《곡례전경(曲禮全經)》‧《소학》‧《근사록(近思錄)》‧《근사속록》‧《근사별록》‧《통서(通書)》‧《정몽(正蒙)》 등 16종을 수록한 《강항휘초(姜沆彙抄)》를 남겨 일본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되어있다.

 

그밖에 〈문장달덕록(文章達德錄)〉과 동양문고 소장본 《역대명의전략(歷代名醫傳略)》의 서문을 썼다. 1882년(고종 19)에 이조판서(吏曹判書) 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이 추증되었다. 영광의 용계사(龍溪祠). 내산서원(內山書院)에 제향되고, 일본의 효고현(兵庫縣)에 있는 류노(龍野)성주 아카마쓰(赤松廣通) 기념비에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저서로는 《운제록(雲堤錄)》‧《강감회요(綱鑑會要)》‧《좌씨정화(左氏精華)》‧《간양록(看羊錄)》‧《문선찬주(文選纂註)》‧《수은집》 등이 있다.

 

[참고문헌]

『宣祖實錄國朝榜目國朝人物考睡隱集看羊錄』

 

 

수은 강항선생 영정(睡隱 姜沆先生影幀)

수은 강항선생 유필(睡隱 姜沆先生遺筆)

 

 

↑수은 강항선생 묘(睡隱 姜沆先生 墓)ㅣ사진> 나홀로테마여행>촬영>닐리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