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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이유태 선생 묘역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해야”

야촌(1) 2012. 7. 3. 17:10

충청투테이 [초려 이유태 선생 묘역 성역화 좌담회]

“세종시, 초려 이유태 선생 묘역 역사문화공원으로 조성해야”

2012.07.02 ㅣ박진환 기자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선생 묘역이 세종시 건설로 훼손 위기에 처했다.

초려 선생은 사계(沙溪) 선생의 고제 3현으로, 우암(尤菴) 송시열, 동춘(同春) 송준길, 신독재 김집, 탄옹 권시 선생과 함께 '충청오현(忠淸五賢)'으로 꼽히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개혁 사상사다.

 

초려 선생이 주로 활동했던 17세기는 조선 개국이래, 인조반정과 정묘·병자호란 등을 겪으면서 엄청난 정신적 충격과 큰 상처를 입었던 시기였다. 특히 병자호란은 존명사대(尊明事大)의 외교의 틀을 완전히 바꿔 놓았고, 그동안 오랑캐로 여겼던 청(淸)에 대해 문명국으로 자부하던 조선이 강화를 했다는 점은 당시 지식인들에게 매우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때 산림(山林)으로 임병양란 이후 조선을 재건하는 시대의 한 복판에서 평생 동안 개혁의 염원을 기해봉사(己亥封事)를 통해 개혁의 실천적 의지를 주창했던 초려 선생의 역사적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따라 최근 불거지고 있는 세종시 초려 선생 묘역 성역화에 대한 당위성을 재조명하고, 명품도시, 세계일류도시를 지향하는 세종특별자치시의 정체성을 제안해 보기 위해 지역 유림과 학계, 정치권, 후손 등 각계각층의 의견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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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려 이유태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

김문석 고려대 세종캠퍼스 부총장은 "초려 이유태(1607~1684) 선생은 17세기 조선조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효종·현종·숙종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산림으로서, 붕당정치의 한가운데에 계셨던 분이다.

선생은 효종 말년 이래 시폐와 구민·구국의 대책에 대해 고민했고, 그 생각을 현종 대에 구체적으로 밝혔다. 비록 선생의 개혁안은 현실 정치에 채택되지 않았지만 선생의 개혁 사상과 의지는 작금의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할 수 있다.

선생은 1660년(현종 1) 5월 기해봉사(己亥封事)를 통해 자신의 평생에 걸친 개혁에의 염원을 표현했다. 북벌을 단행하기에 앞서 향촌 사회의 개편을 통해 힘을 축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선생의 개혁은 한마디로 '점진적인 경장론'이었다. 당시 민폐와 국정 동요의 근본 요인을 '농민의 유리와 토지의 황폐'로 진단했고, 향촌을 안정시키기 위해 일단 향약에 의해 향촌을 조직하고 오가작통제(五家作統制)를 실시하며, 사창(社倉)을 설치해 풍속을 바르게 하고, 저축을 증대할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또 백성들의 세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부세(賦稅) 및 인역제(人役制)를 개혁하고, 공안(貢案)을 조정해 그 수를 감축해야 한다고 했다. 무엇보다 이상의 개혁이 실행되기 위해서는 군주가 왕도정치를 펴기 위한 일심(一心)으로 수신(修身)과 제가(齊家)를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따라 초려 선생의 개혁 사상은 역사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우선 당시 조선사회의 모순을 통렬하게 비판했고, 개혁의 관건을 백성의 힘을 소생시키는 데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의 결실 여부는 군주의 수신적(修身的) 도덕관(道德觀)에 달려 있다고 판단, 지금의 정치 지도자들이 지향해야 할 덕목에 관해 지적하는 바가 상당히 크다고 할 수 있다."

김문석 고려대 세종캠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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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선생의 개혁정치 및 구체적 사상에 대해.

도현철 연세대 교수는 "초려 선생은 송시열·송준길·윤선거·유계 등과 함께 율곡(이이)-사계(김장생)-신독재(김집)를 잇는 기호 사림의 중심인물이었다.

 

그는 조선 사회가 당면한 대내외적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개혁 방안을 구상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북벌론을 제기하며, 산림 인사를 대거 등용해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효종의 부름을 받은 초려는 기대와 포부를 가지고, 자신의 가졌던 개혁 사상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하였다. 효종과 송시열 등 당대를 이끌어 가던 인물들은 주자학의 화이론과 명분론에 기반해 군제를 개혁하고, 민생을 안정시킴으로써 국가의 통치 질서를 재정비하고자 했고, 초려도 이에 동참했다.

 

초려는 북벌 실현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귀향해 '기해봉사(己亥封事)'를 작성한다. 이처럼 초려 이유태는 양란 이후 위기상황을 맞은 조선왕조 체제를 재건할 개혁사상을 제시한 산림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도현철 연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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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선생의 개혁사상으로 대표되는 '기해봉사(己亥封事)'는 무엇인지.

이성우 한국고전번역원 위원 겸 충남대 한문학과 강사는 "초려 선생의 기해봉사는 당시 조선왕조의 현실을 반영한 대개혁 방안으로, 무너져가는 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워 중흥의 대업을 시도했던 경륜(經綸)의 표출이었다.

 

전반부에서는 조선왕조의 실상과 폐단을 들고, 그 원인을 규명했으며, 이어 본격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초려는 고질적인 민폐 수십 가지를 지적, 진단했으며, 민폐 청산의 대안을 제시하고, 이를 실천에 옮겨야 국가백년대계의 기반이 마련될 수 있다고 피력했다.

 

기해봉사에는 당시에도 학문·정치적으로 같은 이념적 지향을 가진 동료들은 물론 국왕을 비롯 조야의 지대한 관심과 주목의 대상이 됐다. 특히 초려는 청현요직(淸顯要職)의 공명(功名)을 마다하고 당시의 시대정신에 입각해 소강(小康) 이상의 차원 높은 개혁의 기치를 내세웠던 것이다.

 

숙종에서 영·정조대에 점철됐던 살상정치가 증명하듯이 목전의 작은 이익을 따르는 치열한 정쟁에 휩쓸리지 않았던 초려의 학문과 삶이 많은 연구자들에게 참신한 매력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성우 한국고전번역원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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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선생의 개혁의지와 사상 중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지.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세종특별자치시 국회의원)는 "초려 선생의 기해봉사는 효종의 승하로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국정전반에 걸친 정치개혁안으로 효종의 북벌의지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양란 이후 혼란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한 만전지책(萬全之策)으로 조선후기 실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균일한 대동법의 시행, 왕실의 재정을 담당하던 내수사의 혁파, 오위와 속오군제의 개편, 양전의 실시 그리고 1/10 세제 시행, 인역세(人役稅)의 통일, 향약에 의한 통일적인 풍속 교정, 개혁안을 전담할 경제사(經濟司)의 설치 등 폭넓고 현실적인 경세책 등이 담겨 있는 역작이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초려선생의 정신을 되새겨보면 크게 두 가지의 의미를 찾게 된다.

 

먼저 북벌정신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에 대해 앞으로 우리가 역사와 민족혼에 대해 어떤 의식을 갖고 대응해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해준다고 하겠다. 둘째 개인주의,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예(禮)와 윤리(倫理) 그리고 인간의 기본가치와 도리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하는 초려의 예학(禮學)도 주목할 만한 가치일 것이다.

 

드디어 1일 세종특별자치시가 출범했다. 세종시는 '국가균형발전'과 '지방분권'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다. 국가 중추행정기능의 이전을 통해 수도권 중심의 국토공간구조를 다극중심 구조로 전환하는 시대적 전환의 계기가 된 것이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 개혁 사상가인 초려 선생의 묘역이 있는 연기군 남면 종촌리가 국가개혁정책의 상징인 세종시 예정지에 있다는 것도 무척이나 뜻 깊은 일이다. 정부와 세종시는 선생의 뜻을 기리는 역사문화공원 조성에 한 치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초려선생의 사상에는 우리 역사와 문화, 전통에 대한 깊은 사랑과 함께 자주적 민족번영과 개혁정치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다. 400년 전 기득권 세력조차 존경하고 옹호했던 그의 개혁사상이 세종특별자치시의 성공적 발전에 다시 한 번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이해찬 민주통합당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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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려 선생의 묘역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성역화 사업을 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연우 충남민간단체공동협력센터 대표(공주대학교 객원교수)는 "초려 선생은 율곡의 경세치용과 사계선생의 실천예학을 두루 겸비한 대유학자로 기해봉사를 통해 임병양란(壬丙兩亂)이후 조선왕조의 국정개혁을 선도한 탁월한 경세사상가다.

 

특히 당시 혼란했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집필했던 초려전집 35권 18책과 향약, 정훈, 사서답문 등 선생의 사상과 서적들은 역사적 가치와 문화재적 의미가 커 지역사회는 물론 정부 역시 지대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세종시 건설이 추진되면서 초려 선생의 묘역 한 가운데로 도로가 나고, 신도비는 주변 성토작업으로 아예 물웅덩이에 파묻힌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구한말 철도부설과 일제시대 방목장 설치, 지난 1960년대 철로까지 묘역의 역사·사회·문화적 가치를 이유로 계획이 우회되거나 최소화됐다는 점을 고려하면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2004년 이래 연기군에서 충남도에 문화재 지정을 신청했지만 충남도는 특별한 사유 없이 계속 지연시켜 오다 2007년 11월 초려 묘역 지정관련 서면심의 결과 제1차 지정대상으로 선정됐지만 2008년 8월 이후 문화재 업무가 행정도시건설청으로 이관된 후 2009년 자료 보완 후 재심의 의결만 진행된 채 방치, 많은 진정과 민원이 빗발치고 있다.

 

이에 유림들은 지난 2007년 8월 충남도에 초려 선생 묘역 일대 4기의 묘소에 대한 보존묘지 지정을 신청, 다음해 보존묘지로 지정이 됐지만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청은 묘역보존 및 문화재 지정을 외면한 채 2008년과 올해 여러 차례 LH공사를 통해 초려 선생 묘소 이장을 통보하며, 이미 묘역을 침범, 훼손해 가면서까지 세종시복합코뮤니티센터 건물을 짓고 있어 지역과 전국 유림들의 항의와 집회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

 

초려의 묘역을 새로운 정신적 좌표로 삼고자 하는 학계와 유림, 지역민의 목소리를 정부는 경청해야 한다."



정리=박진환 기자 pow17@cctoda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