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문좌(李文佐) - 평리성암공파

야촌(1) 2012. 1. 21. 13:54

■이문좌(李文佐)

 

  [문과] 성종(成宗) 14년(1483) 계묘(癸卯) 식년시(式年試) 갑과(甲科) 1[장원(壯元)]위

 [생원시] 성종(成宗) 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 1등(一等) 5위/합격연령 20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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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1년(세종 7)-1491년(성종 22)때의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 감무 이계상(李繼祥)의 아들이다. 광주(廣州)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김일손(金馹孫)‧ 권오복(權五福) 등과 더불어 김종직(金宗直)에게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1483년(성종 14) 생원(生員)으로 춘당문과(春塘文科)에서 갑과 1인으로 장원(壯元)] 급제하여 문명을 떨쳤다. 그렇지만 안협현감(安峽縣監)에 임명되어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겼으며, 사화의 후유증으로 크게 중용되지 못하고 전적(典籍-正六品)에 이르러 31세(歲)의 젊은 나이로 . 단명하였다. 예천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그의 문집으로 후손 李鉉九가 선생의 여러 시문과 자료를 수집  1936년(소화 11) 세촌선생실기(細村先生實記)를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다.

 

[참고문헌]

◇成宗實錄  ◇國朝榜目  ◇醴泉邑誌  ◇慶州李氏戊辰譜(1748년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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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장의 인물/예천 신문]

 

이문좌(1461-1491)는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하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현도(顯道), 호는 세촌(細村), 본관은 경주(慶州), 상(祥)의 맏아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풍채가 늠름하고 덕행이 남과 달랐다. 문장에 능하고 성리학에 통달하여 1480년(성종 11)에 진사가 되고, 1483년(성종 14)에 식년 문과에 갑과로 장원 급제하였다.

 

국립대학인 성균관에 들어가 학유에 기용되고, 곧 박사, 전적(1484)으로 승진되었다. 이어서 서장관(1484)으로서 중국 명 나라에 다녀올 때 부사(副使)가 비리를 범하므로 논박하여 바로 잡았으나, 부사의 원망을 사게 되었다. 귀국하여 정랑에 임명되었다. 이어 승문원 교검으로 옮기고, 춘추관 기주관과 편수관을 겸하였다.

 

그리고 사헌부 감찰로 물망에 올랐으나, 융통성 없는 너무 곧은 성격 때문에 훈구파들의 방해로 헛일이 되었다. 더욱이 밀려나서 안협 현감(1486)으로 좌천되었다. 안협은 토질이 기름지지 못하였다. 여러 해 가뭄이 들자, 백성들의 어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문좌(李文佐)는 세금을 줄이고, 형벌을 가볍게 하고, 정부미를 풀어 도와주었다.

 

벼슬을 그만 두려하자(1488), 안협 현민들이 가마에 매달려 울면서 말리었다. 할 수 없이 그냥 머물다가, 그 후 6년 동안 벼슬을 더 하다가 관아에서 31살의 젊은 나이로 타계하였다. 모두 슬퍼하였다. 하금곡2리 유전동 개금자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이문좌는 하금곡리 사람 권오복(權五福)과 친하여, 권오복의 여동생인 권선(權善)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나중에 권오복이 사형 당하고, 김종직의 제자들이 모두 화를 입은 무오사화(1498)가 일어났다. 이 때 이문좌는 이미 타계하였기에 화를 면하였으나, 부인과 아들인 절(節, 1491-1578)은 바닷가로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1506)으로 풀려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