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조견선생 묘(趙狷先生 墓)

야촌(1) 2012. 1. 18. 10:50

■ 조견(趙狷)

 

1351년(충정왕 3)∼1425년(세종 7).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평양(平壤), 초명은 윤(胤). 호는 송산(松山).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조덕유(趙德裕)이며, 어머니는 오의(吳懿)의 딸이다. 영의정부사 조준(趙浚)의 동생이다.

 

유년에 출가하여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하고, 승직(僧職)경력으로 인하여 좌윤(左尹)에 서용되었으며, 고려 말에는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1392년(태조 1) 상장군으로 이성계(李成桂)추대에 참여하고 개국공신 2등에 책록되었다.

 

1394년 경상도도절제사, 1397년 지중추원사, 1400년(정종 2)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1402년(태종 2) 도총제(都摠制) 재직중에 사은사의 명을 받았으나, 사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을 듣고 병을 칭하여 이를 사퇴하였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직첩을 몰수당한 뒤 축산도(丑山島)에 유배되었다가 곧 사면되었다.

 

1403년 좌군도총제가 되고 평성군(平城君)에 봉하여졌으며, 이해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1407년 충청도도절제사 겸 수군도절제사를 거쳐, 이듬해 고의로 딸의 입명(入明)를 저지한 일로 개령에 부처되었다. 곧 사면되어 청성군에 봉하여지고, 1410년 봉안사(奉安使)가 되어 태조 진영(眞影)을 완산부(完山府)에 봉안하였다.

 

1419년(세종 1)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보임되고, 1421년 3월 71세로 퇴관하여야 하였지만 궤장(几杖)을 받고 계속 벼슬길에 있다가 같은해 12월 평성부원군에 진봉하였다.

 

그런데 그의 생애에 있어서 “조선이 개국되고 형 조준으로 인하여 개국공신에 책록, 조준의 간곡한 출사권유가 있었지만 고려에 절의를 지켜 은거하였으며, 자손에게도 고려에의 절의를 당부하였다.”고 한 이설이 있기도 하나 신빙하기 어렵다.양주의 정절사(旌節祠)와 송산사(松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太祖實錄 *定宗實錄 *太宗實錄 *世宗實錄*韓國人의 族譜(日新閣, 1977)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 산30

 

조견(趙狷) 선생은 자기 이름자를 胤(윤) 에서 견(狷))으로 고쳤는데, 일부러 ‘개견 변’을 쓴 것은 ‘나라가 망해도 죽지 않는 것은 개’라는 뜻과 또는 ‘개는 주인을 생각한다’는 뜻이라 하였다.

 

후에 양주 청계산에서 살 때 태종이 청계산까지 친히 찾아가 권했으나 굽히지 않고 뒤에 양주의 송산에 숨어 여생을 마쳤다. 견이 세상을 떠나자 사람들이 견의 상여를 메고 가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명정이 날아갔다.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따라가 보니 지금의 여수동 뒷골 견의 묘가 있는 곳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후손들이 이상하게 여겨 그 곳에다 묘를 썼다고 한다. 조견(趙狷)의 묘 옆에는 그의 아들 의정부좌찬성, 통정대부 조철산(趙鐵山)의 묘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여기서 살게 된 것 같다.

 

묘역은 성남시 중원구 여수동의 해발 90m 가량 나지막한 구릉에 정(正) 서향(西向)하여 방형(方形)의 봉분형태이며, 하단에는 같은 형태의 배정선택주파평윤씨(配貞善宅主坡平尹氏)의 묘(墓)가 안치되어 있다. 아울러 묘역에는 다수의 석물(石物)과 근래에 마련한 묘표석, 묘갈 및 신도비 등을 갖추고 있다.

 

방형의 봉분은 총높이 180㎝로 봉분 하단에는 4면에 각 3매씩의 장대석으로 높이 40㎝의 호석을 마련하였으며, 봉분 하단의 크기는 전후(前後) 410㎝, 좌우(左右)540㎝이다. 또한 봉분 주위로 左· 右· 後 3면에는 90㎝의 간격을 두고 60∼110㎝ 높이의 축대를 쌓아 활개를 대신하고 있으며, 봉분 左右(좌우) 에는 높이 1m, 너비 54㎝, 두께 35㎝의 석주(石柱) 를 세워놓고 있다.

 

봉분 중앙에는 비좌와 비신 일석(一石)의 파손된 ‘公之墓(공지묘) ’ 묘표석이 높이 30㎝ 가량 잔존하는데, 문중에서 제출한 자료『정절사지(旌節詞誌) 』, 양주향교(楊州鄕校) , 2000)에는 “벼락이 깬 송산공 묘비(墓碑)”로 고려관직(高麗 官職)만 넣으라는 유훈(遺訓) 을 어기고 이조(李) 에서 내렸다는 훈관명(勳官名) 을 넣어 세웠다가 벼락이 내리쳐서 ‘조공지묘(趙公之墓) ’만 남긴 비(碑) 로 소개되어 있다.

 

묘는 3단의 계체석이 있는데 거리는 1·2계체석간 210㎝, 2·3계체석간 360㎝이다. 묘표 중앙에는 28×118×61㎝ 크기의 상석이 갖추어져 있다. 그는 임종할 때 “내 묘표(墓表)에는 고려의 벼슬 이름만 쓸 것이지 새 조정의 벼슬 이름은 쓰지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그의 형(兄)조준(趙浚)이 이조(李朝)의 개국공신, 호조판서라고 비석을 세웠더니 어느 날 뇌성벽력이 치며 비석을 깨뜨렸다고 한다.

 

[참고문헌]

성남시 문화유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