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회(申晦)
[문과] 영조(英祖) 19년(1743) 계해(癸亥)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2위/합격연령 38歲
[진사시] 영조(英祖) 17년(1741) 신유(辛酉) 식년시(式年試) 식년진사 2등(二等) 17위/합격연령 36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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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6년(숙종 32)∼1776년(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근(汝根).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正一品) 신사철(申思喆)의 아들이다. 1741년(영조 17) 진사가 되고, 1743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수찬(修撰-正六品)으로 등용되고 1746년 교리(校理-正·從五品)가 되었다.1750년 승지(承旨-正三品)가 되었으나, 그해 사마시의 합격자 발표에 관한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이 공정성을 잃었다 하여 대간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
그뒤 유배가 풀려 돌아와서 근신하던 중 1755년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에 복직되고, 이듬해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思悼世子-정조의 아버지)를 뒤주에 가두어 죽일 때 이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뒤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從二品)로 나갔다가 다시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들어왔다.
1772년 3월에 좌의정(左議政-正一品)이 되고, 이어서 동년 8월 2일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올랐으나 영조(英祖)가 10년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일에 대하여 울화가 치밀자 당시 이를 방관(傍觀)했던 대신(大臣)들을 찾아 새삼스레 징벌(懲罰)하니, 그도 영의정에 오른지 18일 만에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했다.
그뒤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1776년 영조가 죽고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왕의 죽음을 알리고 시호를 청하며 왕위계승을 고하는 고부 겸 청시승습사(告訃兼請諡承襲使)로 임명되었으나, 그가 일찍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는 일에 동조하였다 하여 정조의 노여움을 사서 파직되었다.
그뒤 1784년(정조 8) 관작이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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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歷史와 人物
● 신회(申晦)
1706년(숙종 32)∼1776년(정조 1).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여근(汝根).으로 아버지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正一品) 신사철(申思喆)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 규일(揆一)의 딸이다.
그는 英祖 48년(1772) 3월에 좌의정(左議政-正一品)이 되고, 이어서 동년 8월 2일 영의정 (領議政-正一品)에 올랐으나 영조(英祖)가 10년 전,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인 일을 후회한 일로 당시 뒤주에 갇히는 현장에서 이를 방관(傍觀)했던 대신(大臣)들을 찾아 새삼스레 징벌 (懲罰)하니, 그도 영의정에 된지 18일 만에 삭탈관직(削奪官職) 당했다.
그러나 신회(申晦)는, 앞서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형(兄) 신만(申晩)과 형제 영의정(兄弟 領議政)에 오른 평산신씨(平山申氏)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임에 틀림없다. 역사상(歷史上) 형제(兄弟)가 영의정(領議政)에 오른 경우(境遇)는, 이들 형제를 비롯하여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수흥(金壽興), 수항(壽恒), 형제와, 조선말(朝鮮末) 세도정치(勢道政治) 시기인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병학(金炳學), 병국(炳國) 형제(兄弟) 等 셋뿐이다.
물론 안동김씨(安東金氏) 김병학(金炳學). 병국(炳國) 형제의 정승 배출은 세도정치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있으나, 조선 500년 동안 영의정을 한명도 배출하지 못한 가문이 대부분인데, 형제가 국정 최고의 영상에 오른 일은 고금을 통해 가문의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신회(申晦)는 36歲 때인 영조(英祖) 17년(1741) 신유시(辛酉試) 식년진사(式年進士) 2등(二等) 17위로 합격하고 2년 뒤인 38歲의 나이 때인, 영조(英祖) 19년(1743) 계해(癸亥) 알성시(謁聖試) 병과(丙科) 2위로 문과급제(文科及第) 한 뒤, 영조(英祖)의 총애(寵愛)를 받은 아버지 신사철(申思喆)의 후광(後光)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첫 관직(官職)을 통상(通常)장원급제(壯元及第)가 아니면 어려운 홍문관(弘文館)의 수찬(修撰-正六品)을 받았으나, 시작 관운(官運)이 일취월장(日就月將)인 셈이다.
이어서 1746년(영조 22)에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正五品)를 거쳐 1750년 임금을 측근(惻近)에서 보필하는 승지(承旨-正三品)에 발탁(拔擢)되었으나 , 그해 사마시(司馬試)의 합격자 발표에 관한 절차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그의 주장이 공정성을 잃었다 하여 대간(大諫)의 질책(叱責)과 탄핵(彈劾)을 받아 함경도(咸鏡道) 종성(鍾城)에 유배되고 말았다.
그 뒤 유배가 풀려 돌아와 근신하던 중, 1755년(영조 31) 특별히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에 복직됨으로서 화려하게 재기(再起)하고, 이듬해 예조판서(禮曹判書)가 되었다.
이때 신회(申晦)는 사도세자(思悼世子)를 극(極)히 미워했던 영조(英祖)의 뜻에 동조(同調)하는 입장(立場)에 섰는데, 당시 영의정(領議政)은 형(兄) 신만(申晩)이었고, 좌의정(左議政)은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인(丈人)인 홍봉한(洪鳳漢), 우의정(右議政)은 윤동도(尹東度), 영조(英祖)의 비서실장격(秘書室長格)인 도승지(都承旨)는 이이장(李彛章)이었다.
이때 모두가 영조(英祖)의 의중(意中)을 읽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이는 일에 동조(同調)하니, 신회(申晦) 또한 관련업무( 關聯業務)의 중심(中心)에 선 대신(大臣)으로서, 세자(世子)가 뒤주(櫃)속에 가쳐 굶어죽어 가는데도 전혀 손을 쓰지 않은 결과(結果)를 초래하고 말았다.
다만 도승지(都承旨) 이이장(李彛章) 만이 목숨 걸고 사도세자를 살리기 위해 몸부림치며, 영조(英祖)를 말리다가, 왕이 “도승지(都承旨)를 끌어내어 목을 베어라“라는 호통이 떨어졌지만 주변에서 ”충신(忠臣)의 목을 베면 훗날 어떻게 그 누명을 벗을 수 있으리오“ 라는 간절(懇切)한 만류(挽留)로 겨우 이이장(李彛章)은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세자(世子)의 목숨만은 살려보려고 몸부림치는 도승지(都承旨) 이이장(李彛章)과는 달리, 신만(申晩)등의 정승(政丞)들은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입을 닫고 있었다. 결국 세자(世子)의 죽음을 확인(確認)한 영조(英祖)는 비로서 측은(惻慇)하고 후회망극(後悔罔極)한 심경(心境)에 빠지게 되었는데, 영조(英祖)는 세자(世子)의 호(號)를 사도(思悼)로 내리니, 곧 ‘슬프게 생각(生覺)한다'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세자(世子)를 살리는데 실패(失敗)한 도승지(都承旨) 이이장(李彛章)은 결국 마음이 傷(상)한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62세(歲)의 나이로 세자(世子)의 뒤를 따랐다. 영조(英祖)는 그를 이조판서(吏曺判書)에 추증(追贈)하고 충정공(忠正公)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사도세자사건(思悼世子事件)후, 신회(申晦)는 곧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가 이조판서(吏曺判書)로 들어와 영조(英祖) 48年(1772) 3월에 좌의정(左議政)이 되고, 8월 2일에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지만 ,해가 갈수록 이 사건의 통탄(痛嘆)함이 복 바친 영조(英祖)는, 10년이 지난 이 사건을 되새겨 세자(世子)를 죽일 때, 방관(傍觀)했던 대신(大臣)들을 찾아 새삼스레 징벌(懲罰)하니, 신회(申晦) 또한 영의정에 오른지 18일 만에 삭탈관직(削奪官職)당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7세였다.
영조(英曺) 50年(1774) 6월에, 다시 영의정(領議政)에 복직(復職)한 그는 이듬해 7月에 다시 파직(罷職)되고, 나이 일흔에 이르니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원로대접(元老待接)을 받았다. 영조(英祖) 52년(1776) 3月에 영조(英祖)가 세상을 하직하니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 성(祘)이 26세의 나이로 등극(登極)하니, 이가 곧 조선조(朝鮮朝) 제22대왕 정조(正祖)이다.
정조는 신회(申晦)를 고부겸청시승습사(告訃兼請寺承襲使)에 임명(任命), 외교적(外交的) 중책(重責)을 맡겨 청(淸)나라로 보내려했다. 이는 조선왕(朝鮮王)의 죽음을 알려 시호(諡 號)를 내려 줄 것을 청(請)하고, 함께 새 왕(王) 등극(登極)하였을 청국(淸國)에 알리는 일이였다.
그러나 신회(申晦)가 지난날 사도세자(思濤世子) 죽음에 방관(傍觀)내지느 영조(英祖)의 뜻에 동조(同調)하였음을 뒤 늦게 알게 된 정조(正祖)는, 곧 발령(發令)을 취소(取消), 그 직위(職 位)에 前 영의정(領議政) 김치인(金致仁)을 임명(任名)하고, 신회(申晦)는 파직(罷職) 시켜 귀 양(歸養)을 보내 조정(朝廷)에서 축출(逐出)해 버렸다.
이리하여 조정(朝廷) 권부(權府)의 거리가 멀어져버린 신회(申晦)는, 정조(正祖)가 즉위(卽位)하던 그해 5月에 귀양(歸養)을 떠나 귀양지(歸養地) 홍주(洪州)에서 풀려나질 못한 채, 71歲로 숨진 것으로 전(傳)해지는데, 언제 죽었는지는 확실(確實) 하지는 않다.
정조년(正祖年(1784) 王은 신회(申晦)의 관작(官爵)을 회보(回報)시키고, 재물(財物)에 대한 욕심(慾心)이 없었던 그를 청백리(淸白吏)로 책록(冊祿)하였다. 신회(申晦)의 적실(嫡室)에 아들이 없어 형(兄)인 신만(申晩)의 3男으로 관직(官職)이 승지(承旨)였던 신광집(申光緝)을 양자(養子)로 재현(在顯), 재헌(在憲)을 두었고, 그 후손(後孫)이 많은 인물(人物)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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