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영의정 김근사 묘(領議政 金謹思 墓)

야촌(1) 2011. 11. 28. 02:01

■ 영의정 김근사 묘(領議政 金謹思 墓)

   소재지 :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703번지

 

지월1리 현산마을 제일 끝집에서 산길로 올라가면 상수도 시설이 있고, 조금 더 올라가면 참나무 고목이 서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약 100m 더 올라가면 영의정 김근사 묘(領議政 金謹思 墓)에 이른다.

 

● 영의정 김근사(金謹思)

   [문과] 성종(成宗) 25년(1494) 갑인(甲寅) 별시(別試) 병과(丙科) 9위/합격연령 :

   [생원시] 성종(成宗) 17년(148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식년생원(式年生員) 2등(二等) 1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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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6년(세조 12)∼1539년(중종 34).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명통(明通). 증조는 8世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 김수(金脩), 조(祖)는 9世 김원신(金元臣), 아버지는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지낸 김면(金勉)의 아들이다.

 

1486년(성종 17)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4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03년(연산군 9)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正四品)을 지낸 뒤 다음해 홍귀달(洪貴達)의 유배사건에 연루되어 서천에 유배되었다가 곧 방환되었다.


1509년(중종 4) 경차관(敬差官)으로 경상도 삼포(三浦)의 왜인들을 추고(推考), 단속하였고, 1512년 우부승지(右副承旨-正三品)· 좌승지(左承旨-正三品)를 거쳐 1515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正三品), 이듬해 대사간(大司諫-正三品)이 되었다.


1517년 판결사(判決事-正三品)·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從二品)· 병조참의(兵曹參議-正三品)를 지내고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김안로(金安老)의 일파 승지가 되었다.

 

이후 이조참판(吏曹參判-從二品)· 형조참판(刑曹參判-從二品)을 거쳐 1525년 동지돈령부사(同知敦寧府事-從二品)로 있으면서 하정사(賀正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다음해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從二品)·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漢城府)· 대사헌(大司憲-從二品)· 공조참판(工曹參判-從二品)· 한성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을 지냈다.


1531년 병조판서(兵曹判書-正二品)· 이조판서(吏曹判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從一品)를 지냈다.
1533년 우의정(右議政-正一品)이 되고 다시 좌의정 겸 세자사부가 되었으며, 1535년 영의정(領議政-正一品)에 올랐다.

 

1537년에 대간으로부터 김안로의 일파로 탄핵을 받고 김안로가 실각되면서 파직당하여, 하동(河東)으로 유배되었다가 1539년에 배소에서 죽었다. 관직은 매우 순조롭게 승진을 거듭하였으나, 김안로와 정치적인 운명을 함께 하였다.

 

 

↑영의정 김근사 묘(領議政 金謹思 墓)는 맨 위쪽에서 2번째  위치해 있다.

 

↑영의정 김근사 묘(領議政 金謹思 墓)묘이고 위(上)의 묘는 아버지 김면(金勉)의 묘이다.

 

↑영의정 김근사 묘표(領議政 金謹思 墓表).

 

 

 

↑영의정 김근사 묘 후경.

 

 ↑맨 위의 아버지 김면(金勉)묘.

 

↑아버지 김면(金勉)묘 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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