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안렬[邊安烈]
1334년(충숙왕 복위 3)∼1390년(공양왕 2). 고려말의 무신. 자는 충가(忠可). 호는 대은(大隱). 본래 중국 심양(瀋陽)사람으로. 원주변씨(原州邊氏)의 시조이다. 원나라 말기에 병란으로 당시 심양에 가 있던 공민왕을 따라 고려에 들어와 원주(原州)를 본관으로 받았다.
1361년(공민왕 10) 안우(安祐)를 따라 홍건적(紅巾賊)을 패주시켜, 이등공신으로 판소부감사(判小府監事)로 승진하고, 이듬해에 개성을 수복하고 일등공신이 되었다. 예의판서(禮儀判書)가 되어 추성보조공신(推誠輔祚功臣)의 호를 받았고,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로 최영(崔瑩)과 더불어 제주를 정벌한 뒤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문하평리(門下評理)를 역임하였다.
우왕 때 추충양절선위익찬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功臣)의 호를 받은 뒤 양광 전라도도지휘사 겸 조전원수(楊廣全羅道都指揮使兼助戰元帥)로서 나세(羅世). 조사민(趙思敏) 등과 함께 왜구를 크게 물리치고 돌아와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승진하였다.
이어 도순찰사(都巡察使) 이성계(李成桂)의 부장으로 운봉(雲峰)과 황산(荒山)에서 왜적을 대파하고 개선한 뒤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어 그 세력이 임견미(林堅味)· 이인임(李仁任) 등과 겨루게 되었다.
단양과 안동의 왜구를 몰아낸 뒤 원천부원군(原川府院君)에 봉해지고 판삼사사(判三司事), 뒤에 영삼사사(領三司事)가 되었다. 이보다 앞서 1389년(창왕 1) 대호군 김저(金佇)등이 이성계의 제지와 우왕의 복위를 모의한 일이 발각되어 이림(李琳)· 우현보(禹玄寶)· 이색(李穡) 등과 함께 이에 연루, 한양(漢陽)에 유배되었다가 뒤에 사형되었다.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 〈언락 言樂〉에 전해오는 〈불굴가 不屈歌〉가 그의 시가로 밝혀져 그의 고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을 엿볼 수 있다.
↑원천부원군 대은 변안렬선생 묘.
↑원천부원군 대은 변안렬선생 신도비각.
↑원천부원군 대은 변안렬선생 신도비각
↑신도비 탁본 문
●대은 변안열 선생 신도비문
원천부원군 대은 변공은 위대한 분으로서 포은 정선생과 같은 시대에 태어나, 그 행적과 충절이 정선생과 다름이 없었으나 다만 그에 대한 국가의 공훈 포상이 달랐을 뿐이다. 공의 휘는 안열이며 자는 충가이다. 변씨의 성은 본래 자(子)씨 였으니 중국 은나라 징중의 후손이다.
징중은 송나라에 봉하여졌는데 그 후손인 평공의 아들 어융의 자가 자변이므로 그 자손들이 이를 성씨로 삼아 변씨가 된 것이다. 대대로 룽서에 살다가 송나라말엽에 바다를 건너 우리나라 취성 지영의 황주에 옮겨왔으므로 황주변씨가 이에 비롯되었다.
고려 고종때 려는 공로가 있어 태천백에 봉하여졌고, 뒤에 윤은 안찰사, 아들 유는 의랑, 아들 제는 검교, 아들 눌은 판사, 아들 석은 통례의 벼슬을 각각 지냈으며 그의 아우 순은 원나라에 벼슬하여 심양후에 봉하여졌고 고려에서는 그분에게 찬성사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이분이 바로 공의 조부이시다.
아버지의 휘는 량이며 심양후에 봉하여졌고 고려에서는 그분에게 판삼사사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모는 곽씨인데 서기1334년에 공을 낳았다. 공은 지조가 맑고 높으며 국량이 넓고크며 문장에 능통하고 무예에 뛰어났다.
1351년에 호접에 수석으로 뽑혀 빛나는 관직을 역임하여 형부상서에 올랐다.
그해 겨울 로국공주가 고려 강릉대군에게 시집올때 부장으로서 공주를 모시고 우리나라에 왔다.
1352년에 강릉대군이 왕위에 올라 공민왕이 되었다. 왕은 외숙인 판추밀 원 의 의 딸에게 공을 장가들게 했는데 원(元)씨의 본관이 원주이므로 왕은 공의 본관을 원주로 내리셨다. 이로써 공은 원주변씨의 시조가 되었다.
공은 1362년에 안우와 함께 홍건적을 몰아내고 이등공신이되어 판사부감사에 임명되었고 서울을 수복하자 일등공신이되어 예의판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추충양절선위익찬보조공신(推忠亮節宣威翊贊補祚功臣)칭호를 받았고 또 총의용우군이 되었다 .
뒷해에는 양광도 전라도 도지휘사겸조전원사가 되어 조사민과 함께 부녕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개선할때 대신들이 천수사에서 탈춤놀이 연회를 베풀고 환영함과 동시에 백금일정과 안장낀말과 옷등을 하사받았고 또한 문하찬성사에 승진하였다.
1377년에는 경기도 도총사가되어 수원 양성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조전원사로 이성계와 함께 해주에서 왜적을 물리쳤으며 최영과 함께 해평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다. 1380년에 왜적이 대거침입하여 백성을 살해하고 약탈을 자행하니 공은 도체찰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운봉일월역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왔다.
왕은 최영으로 하여금 백관을 거느리고 천수문앞에 환영문을 설치하여 영접케하고 공과 이성계에게 각기 금50냥을 내리셨다. 1382년에 왜병이 크게 침입하자 공이 도원사가 되어 한방언과 함께 적을 격파하고 많이 사로잡았다.
또한 안동에서 왜병을 무찔러 그공으로 원주부원군에 봉하고 판삼사사에 올랐다.
1388년에 이성계와 함께 요동을 치러가다가 위화도에서 군사를 돌이켰다.이성계가 여러장수들과 더불어 우왕을 강화도로 추방하려는 의논을 하게되자 공은 드디어 문을 닫아걸고 스스로 호를 대은이라불렀다. 이색의 의견을 따라 우왕의 아들 창을 왕위에 오르게 했다. 우왕이 여흥으로 옮겨지자 공은 몰래 우왕을 찾아가 다시 왕으로 맞아들일것을 의논하였다.
1389년에 영삼사사에 승진하니 왕실의 신임이 두터웠고 조정에서 명망이 매우 높아 졌다.
어느날 김저가 밤중에 이성계의 집에 이르러 그를 해치려다가 도리어 붙잡혀 사헌부에서 심한 문초에도 입을 열지 않으므로 칼로 발바닥을 찢고 불로 지저대니 묻는대로 응하게 되어 그 화가 공에게까지 미쳐 공은 죄인의 몸이 되었다.
우왕은 강릉으로 옮겨지고 창왕은 강화로 내쫓겼으며 공양왕이 왕위에 올랐다.
1390년에 윤소종과 이첨이 죄를 논하여 공을 처형하도록 왕에게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고 한양으로 귀향보냈다.
때마침 강도가 성문밖에서 사람을 납치해간 사건이 있었는데 윤소종일파들은 당나라 역적 오원제가 자객을 보내어 무원형대신을 죽인 고사를 인용하여 이 강도사건은 안열이 일으켰다고 고하고 그 후 5회에 걸쳐 죄를 꾸며 상소하였다. 특히 성석린은 공은 대역죄로 몰고 처형할 것을 왕에게 청하였다.
왕은 사헌부에 명령하여 유소에서 문초하지말고 처형하라고 하명하니 도평리사가 심문도하지않고 대신을 극형에 처함은 부가하다고 하므로 왕은 오사충과 남재로 하여금 문초케 하였다. 그들이 벽제역에 이르러보니 공은 이미 화를 당한 뒤였다. 그날이 바로 1390년 정월 십육일이다.
그해 여름 공은 위화도 회군의 공신으로 기록하고 왕의 교문으로 변안열의 몸은 이미 죽었으나 의리를 옳케가려 회군한 공은 길이 잊을수 없다고 하였다. 1391년에 녹권을 주었다가 다시 공훈을 소제하고 가산을 침수하였다.
1392년 이성계가 등극하자 관직과 재산을 돌려주었다.
공은 양주 주엽산에 의관장으로 모셨으나 1468년 광릉에 가깝다하여 풍양 건천면 지사동 인좌로 이묘했다.
공이 읊은 불굴가는 다음과 같다.
가슴팍 구멍뚫어 동아줄로 마구꿰어
앞뒤로 끌고당겨 갈켜지고 쓸릴망정
임향한 그 굳은뜻을 내뉘라고 굽히랴
포은 정몽주는 공의 전기를 지으면서
"예로부터 나라가 어지러울 때는 하늘이 반드시 충신열사를 보내어 힘을 다해 외적을 막고 혹은 절개를 다하여 구국함으로서 신하의 사표가 된이가 없지 않으나 한사람이 몸으로 이 두가지를 겸한 사람은 고금을 통하여 안열같은 충신은 드물다."라고 하였고 그 제문에서 이르기를
"름름한 가을 서리는 공의 충열이요 열열한 저 태양빛은 공의 절개로다." 하였으며, 목은 이색이 지은 제문에서는"고금천지에 신하로서의 기강을 바로세운이가 공이 아니고 누구이며 자손만세의 의사들을 격려한 이가 공이 아니고 누구인고 저 한강수는 유유히 흘러 그칠줄 모르고 저 삼각산은 우뚝솟아 푸른빛 영원히 변치 않으리라 이 강산과 더불어 변하지 않은것은 공의 충열이 아니고 무엇일까."라고 하였고 야은 길재는 제문에서 "지극한 충성이요 위대한 절개라."고 하였다.
오랜세월이 흘러 공의 높은 행적과 구국한 절개를 자세히 알수없으나 이 삼은선생의 글만 보아도 그충절이 대략을 알수 있어 다시 보탤것이 없지만 공의 행적과 충절은 포은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혁명기인 사변때 사람들은 옳케 전하지 못하고 역사를 바르게 기록할수 없었던 까닭으로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집함에 있어 도리어 공을 간신배의 대열에 넣어 서술했으니 이것이 어찌 믿을수 있는 사학가라 하겠는가. 배위는 진한국부인 원주원씨니 삼남일녀를 두었다. 장남 현은 판사요 차남 이는 음감사요 삼남 예는 무지사를 지냈다.
2007년 10월 28일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고려말충신 대은(大隱) 변안열(邊安烈)선생 묘소에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후세에 오래도록 기리기 위한 기념비 제막 행사가 성균관유도회총본부·사단법인 고려역사선양회·원주변씨화수회(회장 변정구) 공동주관으로 열렸다.
이날 성균관유도회 전국 각 지역대표와 역사학자, 원주변씨 종친 등 3백여명이 참석했다.
1969년 4월 22일 전국 각 지역대표 유림 5백여명의 발의로 고려충신 변안열 선생의 신도비를 건립하게되었을 때 당시 국가원수인 박정희 대통령이
“님의 늠름하신 충열(忠烈)은 하늘과 땅이 아는도다!
숭고하신 위력은 만민이 우러러 보며 그 공적은 길이 길이 빛날 것이다”
라고 하면서 직접 고유(告由)의 예를 올린 「고유사실」은 역사상 초유의 일이며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나라사랑의 곧은 의지가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간절한마음에서 박정희대통령신도비 고유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묘의 표석
↑대은 변안렬선생 신도비 제막식때 올린 박정희대통령고유기념비
충신 변안렬이 북으로는 홍건적, 남으로는 왜적을 물리쳐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최영장군의 업적과 손색이 없고, 망국의 상황에서 불시이군의 충절은 포은 정몽주와 쌍벽을 이루지만 왜곡된 역사의 그늘에 뭍혀 그의 공적이 사실 되로 현찬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기어, 1969년 4월 22일 박정희대통령 께서 선생의 충혼을 밝혀주길 위해 직접 신도비 제막식날 고유의 예를 올렸다.
● 朴正熙大統領의 告由文
1969년 4월 22일 대통령 박정희는 삼가 고려충신 원천부원군 대은 변선생 신도비를 완성했다고, 알리는 날에 고합니다.
늠름한 의리와 열렬한 충절은 나라가 망할 때, 목숨을 던졌습니다.
아! 선생의 충절을 누가 따르겠습니까!?
저 구양서원을 바라보니 강산이 높고 우러러 보는 많은 사람의 마음은 위대한 충절을 잊을수 없습니다.
영원히 그 공을 드러내기 위해 큰 비석을 세웁니다.
불굴 가는 길고 길어 오래도록 그침이 없고, 양주길이 한번 밝아졌으니 선생이시여 내려오소서.
삼가 존령이시여 흠양하소서.
상향.
↑원주 변씨의 시조인 대은 변안렬선생 묘역 전경
↑신도비 앞면 이수에는 달 속에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신도비 뒷면 이수에는 태양 안에 삼족오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변안렬선생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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