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선현들의 묘.

강희맹 선생 묘(姜希孟 先生 墓)

야촌(1) 2010. 4. 17. 02:55

↑묘의 원경에서 안내문이 서있는  위쪽이 강희맹 선생의 묘이다.

 

 

 

↑강희맹 신도비각 (1988년 비각 건립)

 

↑신도비는 1488년(성종 19) 건립

 

●강희맹 선생 묘 및 신도비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하상동 367번지

  ☀지정번호 : 경기도 기념물 제87호

  ☀지정연월일 : 1985년 9월 20일

  ☀시대 : 묘 → 성종 14년(1483), 신도비 → 성종 19년(1488)

 

강희맹(姜希孟,1424~1483) 선생은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농학자로 자는 경순(景醇), 호는 사숙재(私淑齋)ㆍ국오(菊塢)ㆍ만송강(萬松岡)ㆍ운송거사(雲松居士)ㆍ무위자(無爲子)이며, 본관은 진주(晉州)이다.세종 29년(1447)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거처 좌찬성(左贊成)등을 역임했다.

 

저서에 『사숙재집(私淑齋集)』ㆍ『촌담해이(村談解?)』ㆍ『금양잡록(衿陽雜錄)』ㆍ『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 등이 있고, 시호는 문량(文良)이다.묘역은 봉분을 중심으로 가운데 묘비가 있고, 그 앞에 상석(床石)과 향로석(香爐石)이 있으며, 한 단 아래 좌우에 문신석인(文臣石人) 한 쌍이 서 있다.

 

이 묘역에 배치된 석물들은 다른 묘역에 배치된 것보다 훨씬 간소하게 되어 있다. 상석 바로 앞에 놓이는 장명등(長明燈)도 없고 망주석(望柱石)도 없다. 이러한 것은 생시 선생의 청렴한 성품이 묘역 내에서도 나타나는 듯하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2단의 기단석 위에 비신을 세워 놓았다. 기단석 사방에는 연판문(蓮瓣文)을 새기고 있으며, 비신의 뒷부분에는 두 마리의 용이 승천하는 형상을 사실적으로 조각해 놓았다.

 

한편 신도비는 성종 19년(1488)에 건립되었으며, 그 후 500년이 지난 1988년에 비각(碑閣)이 세워졌다.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의 높이 1.95m, 폭 80cm, 두께 20cm로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비명을 짓고,

글씨는 홍문관 박사(弘文館 博士) 박증영(朴增榮)이 썼으며 아울러 전자(篆字)를 하였다.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양부(養父)인 강순덕(姜順德, 1398~1459 이숙번의 사위. 사헌부 감찰) 묘를 비롯하여, 선생의 백씨 강희안(姜希顔, 1418~1464 인수부윤) 묘, 선생의 장남 강구손(姜龜孫, 1450~1505, 우의정) 묘, 손 강태수(姜台壽, 1479~1526 순천부사) 묘, 증손 강복(姜復, 1508~1529, 충좌위 부사용) 묘, 고손 강극성(姜克誠, 1526~1576 장단부사) 묘 등이 있다.

 

묘역 입구에는 선생의 재사(齋舍)인 연성재(蓮城齋), 1965년 건립)가 있고, 묘역 앞에는 하지골(荷池谷, 연꽃 연못의 뜻)이란 마을이 있었다가 연성1지구 택지개발사업의 일환으로 1996년에 폐동된 뒤 1999년에 대단위아파트 단지로  조성되자 하지골의 뜻을 지닌 연꽃마을로 명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