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행동하는 지식인 이상설(李相卨)

야촌(1) 2009. 11. 16. 21:23

이상설 유허비

(江原日報    2008-3-25 기사 )

 

우스리스크의 라즈돌노예강 앞에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서있다. 이상설 선생은 헤이그특사의 한 분으로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된 이후 이곳 연해주로 돌아와 이곳에서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다가 병사했다.

그는 죽기 직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강물에 뿌려달라했고, 사람들은 그의 유언에 따라 이곳 라즈돌노예강에 유골 가루를 뿌렸다. 그를 기리기 위해 선생의 유허비를 발해 성터가 바라다보이는 강가에 세웠다.

 

이상설(1870∼1917년)은 대한광복군정부에서 활동한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항일운동가다. 일찍이 신학문에 뜻을 두고 영어 러시아어 등을 공부하면서도 1894년 식년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쳤다.

 

젠다오(間島) 룽징(龍井)에 서전서숙을 설립, 교포자녀의 교육과 항일민족정신 고취에 진력했다. 연해주 우수리스크에 그의 유허비가 세워졌다. 발해성터 바로 옆이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 러시아의 협조로 비를 건립, 선생의 넋을 위로했다.

 

▼“이상설 선생은 1870년 충북 진천에서 탄생해 1917년 연해주에서 서거한 한국 독립운동의 지도자다. 1907년 7월에는 광무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 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중 순국하다. 그의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유허비에 새겨놓은 글이다. 그의 행적을 조금이나마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선생은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려 했으나 일제에 의해 거부당했다. 헤이그 특사의 정사(正使)는 당시 37세의 이상설이었다.   48세의 이준은 부사, 20세의 이위종은 통역관 겸 대변인이었다. 일제에 이상설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최재형 등과 권업회를 조직, 회장으로 일했고 ‘권업신문’을 창간, 주간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병으로 세상을 하직했다. 향년 47세. 헤이그 특사에 대한 일제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지 10년 만의 일이다.

 

▼그는 죽으면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진천에 그의 생가가 복원되고 얼마 전 기념사업회도 발족됐다. 유허비에 무궁화가 놓여있다. 국권 회복과 조국 독립에 투신한 독립지사의 혼이 담긴 소중한 역사의 현장이다. 외롭게 서 있는 유허비를 찾아 경의를 표했다. <장기영논설위원·  kyjang@kwnews.co.kr">kyjang@kwnews.co.kr  > 

 

■ 이상설 李相卨 (1870. 12. 7 충북 진천~1917. 3. 2.)

 

연해주 니콜리스크. 독립운동가.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외교권이 없는 나라의 대표라는 제국주의 열강의 반대로 실패하고, 이후 각국에서 외교운동을 벌였다.

 

1914년 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령 등에 있는 동지를 모아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웠다. 본관은 경주. 자는 순오(舜五), 호는 보재(溥齋).

 

▶연해주에서의 독립활동

 

1908년부터 미국에 1년여 동안 머무르면서 미국 조야에 대한제국의 독립지원 호소를 계속하는 한편, 각지의 교포를 설득하여 조국독립운동의 새로운 계기를 만드는 데 힘썼다.또한, 1908년 8월 콜로라도주 덴버시에서 개최된 애국동지대표자회의(愛國同志代表者會議)에 이승만(李承晩)과 연해주(沿海州)대표로 참석하였다.

 

1909년 4월 국민회(國民會)총회장 최정익(崔正益) 등과 국민회의 제1회이사회를 열고 구체적 사업을 결정한 다음, 정재관(鄭在寬)과 연해주로 떠났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승희(李承熙)·김학만(金學萬)·정순만 등과 항카호(興凱湖)남쪽 봉밀산(蜂密山)부근에 땅 45방(方)을 사서 100여 가구의 한국교포를 이주시키고, 최초의 독립운동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하였다.

 

국내외의 의병을 통합하여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1910년 6월 유인석(柳麟錫)·이범윤(李範允)·이남기(李南基) 등과 연해주 방면에 모인 의병을 규합하여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편성하다.유인석과 상의하여 이해 7월에는 전 군수 서상진(徐相津)을 본국에 보내어 고종에게 13도의군 편성을 상주하고, 군자금의 하사와 고종의 아령파천(俄領播遷)을 권하는 상소문을 올려 망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였다.

 

8월에 국권이 상실되자, 연해주와 간도 등지의 한족을 규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였다. 그런데 9월 일제와 교섭한 러시아에 의하여 연해주 니콜리스크(雙城子)로 추방되었다가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1911년 한민장(韓民長)·김학만·이종호(李鍾浩)·정재관·최재형(崔在亨) 등과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권업신문 勸業新聞》의 주간을 맡기도 하였다.1913년 이동휘·김립(金立)·이종호·장기영(張基永) 등과 나자구(羅子溝)에 사관학교를 세워 광복군 사관을 양성하였다.

 

1914년 이동휘·이동녕·정재관 등과 중국과 러시아령 안에서 동지들을 규합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정통령(正統領)에 선임되었다.1915년 3월경 상해 영조계(英租界)에서 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조성환(曺成煥)·유동열(柳東說)·유홍렬(劉鴻烈)·이춘일(李春日) 등의 민족운동자들이 화합하여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하여 본부장에 선임되었다.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다가 1917년 3월 니콜리스크에서 죽었다.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이상설과 이회영의 동지적 약속


▶수이푼 강가의 눈물 


러시아 수이푼강 건너에는 크라스노야르라는 마을이 있다. 옛날 발해의 솔빈부 성터였던 이곳에는 지금까지 슬픈 전설이 하나 전해지고 있다. 926년에 거란과 발해 군사들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는데 발해 군사들이 끝까지 투쟁하다 모두 이곳에서 산화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발해의 여인들이 자식과 남편의 죽음에 목 놓아 울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 강은 '슬픈 강', 즉 '수이푼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고 한다.

 

1917년 3월, 이동녕 등 애국지사들은 쌀쌀한 겨울바람이 부는 러시아 니콜리스크(雙城子), 발해의 옛 땅인 수이푼 강가에서 한 독립운동가의 시신을 화장한다. 바로 헤이그 밀사, 서전서숙(瑞甸書塾)의 설립자로 알려진 이상설이다.

 

이상설은 임종을 맞으면서 "내 조국의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니, 어찌 죽은 영혼인들 고국 땅을 감히 밟으랴, 내 죽거든 화장하여 재를 시베리아 벌판에 날려라. 그리고 조국의 독립이 오기 전에는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긴다.

 

▶행동하는 지식인 이상설

 

1870년 진천에서 태어난 보재 이상설은 1894년 과거 문과에 급제해, ‘율곡 이이를 조술(祖述)할 수 있는 학자' 라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유학에 능통했다. 하지만 세계정세의 변화를 깨닫고 이내 곧 신학문을 받아들인다. 이상설은 신구(新舊)학문과 영불일로어(英佛日露語)에 능통했다. 심지어는 ‘산술신서(算術新書)’라는 수학책을 펴내 당대 최고의 수학자로 평가받았다.

 

또 학문에 견식이 높고 뛰어난 정치력으로 각종 모임에서 지도자 역할을 했다. 서울에 올라와서는 이회영, 이시영, 여준 등과 죽마고우로 함께 어울리며 공부했다. 특히 이상설이 이회영보다 세 살 아래이나 지기(志氣)가 서로 맞아 생사를 함께 하는 동지처럼 지냈다.

 

1905년 의정부 참찬이었던 이상설은 을사늑약의 체결을 막기 위해 회의장 문을 밀치고 들어가려 했으나 일본헌병의 제지로 회의조차 참석 못한다. 이에 이상설은 고종에게 사직(社稷)과 함께 할 각오로 을사5적을 처단하고 조약을 파기하라는 상소를 거듭 올린다.

 

또 종로 거리로 나가 군중을 상대로 민영환의 순국 자결을 알리는 가두연설을 한 후 머리를 땅바닥에 부딪쳐가며 자살을 시도하는 등, 말 그대로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국외 독립운동기지 건설의 선구자

 

하지만 상소 같은 전통적 방식으로는 대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새로운 운동방식이 필요했다. 이상설과 이회영은 을사늑약의 체결로 사실상 국내에서 민족운동이 불가능해지자 운동의 거점을 국외에 두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따라서 이들은 먼저 만주 북간도의 용두레마을(龍井村)에 국외민족운동기지를 건설할 것을 결정하고, 이 일의 책임을 이상설이 맡기로 했다.

 

1906년 4월, 이상설은 간단하게 행장을 챙겨 만주로 떠난다. '보재를 동지이자 늘 나의 참스승'으로 여겨온 이회영은 성(城) 모퉁이에서 눈물로 작별했다. 하지만 독립운동기지의 개척을 위해 관직을 버린 채 망명의 길을 떠나는 이상설은 웃는 낯으로 헤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그해 10월, 이상설은 만주 용두레마을에 국외 민족교육운동의 효시인 <서전서숙>을 세운다. 신학문과 함께 항일민족교육을 시킨 서전서숙은 바로 독립군양성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1907년 이상설은 만국평화회의의 밀사로 임명되어 네델란드 헤이그로 떠난다. 고종에게 이상설을 밀사로 추천한 것은 바로 이회영이었다. 이상설이 헤이그로 떠난 뒤 일제의 방해로 서전서숙은 1년 만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서전서숙의 영향으로 명동학교ㆍ광성학교 ㆍ창동학교 등이 잇달아 세워지며 북간도 일대에는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교육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한편 이상설이 헤이그 밀사단의 정사(正使)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일제가 궐석재판으로 이상설에 사형을 선고한다. 이후 더 이상 고국에 돌아갈 수가 없던 이상설은, 1908년 미국 콜로라도주의 덴버에서 개최하는 애국동지대표회의에 연해주 대표로 참석한다.

 

이 애국동지대표대회에서는 한인군사훈련 양성소 설립을 결정한다. 따라서 무장항쟁론을 주장하던 박용만은 1909년 6월 미국 네브라스카주의 한인 농장과 이듬해 헤이스팅스(Hastings)대학 내에 ‘한인소년병학교’를 세운다. 미주 최초의 한인무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 설립에는 동지였던 이상설의 영향도 컸을 것이다.

 

▶독립운동 전선 구축에 앞장서

 

이상설이 가는 곳마다 조직이 생겼고, 만들어지는 조직이나 단체마다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보재가 조직의 리더로 있는 동안에는 사상적으로 통일되었고, 지역적으로 불화가 없었다. 이상설은 적재적소에 인재를 썼고, 독립운동 전략의 기초를 세웠으며, 이를 몸소 실천했다.

 

1909년에 연해주로 돌아온 이상설은 뜻을 같이 한 이승희와 함께 독립운동기지 건설 작업에 들어갔다. 이들은 미주에서 보내온 돈 등으로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호(興凱湖) 남쪽 봉밀산(蜂蜜山) 부근의 땅을 사서 1백여 가구의 교포를 이주시켜 한흥동(韓興洞)을 건설한다.

 

이후 이상설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의 통합전선 구축에 앞장서는 일에 힘을 쏟았다. 1910년에는 의병들을 하나로 모아 ‘13도의군’을 창설하고, 한일합병이 체결되자 블라디보스톡에서 성명회(聲明會)를 만들어 한일합병 반대운동을 전개한다.

 

이어 1911년에는 시베리아 한인사회의 중요인물을 망라한 권업회(勸業會)를 결성하고, 1913년에는 한일병합 후 최초의 망명정부인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를 조직해 그 수반인 정통령(正統領)에 취임한다.

 

또 1915년에는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단(新韓革命團)을 조직해 본부장에 선임된다. 하지만 이상설은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국제정세의 변화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을 얻어 1917년 47세라는 한창 나이에 러시아 니콜리스크의 이국 낯선 땅에서 눈을 감는다.

 

안중근은 일찌기 보재를 가리켜 "이상설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 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器量)이 크고 사리(事理)에 통한 대인물(大人物)로서 대신의 그릇을 잃지 않는다."고 했으며, 많은 우국지사들이 이상설이 일찍 서거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상해임시정부의 대통령이나 수반이 되어 우리의 독립운동사가 달라졌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신흥무관학교-이상설과 이회영의 동지적 약속


‘만리타향에서 옛 벗을 만나니 기쁨이 극에 달하여 슬픔이 일어났다. 먼 북쪽 끝 바닷가 외로운 집에서 두 사람이 은근히 마주하고 조국 대사를 상의하니, 참으로 의협스러운 마음 속 얘기는 눈썹에 노을이 비낀 듯 하였고, 호걸 영웅의 계책은 가슴 속에 너른 바다가 있는 듯하였다’

(이관직의 「우당 이회영 실기」중에서)

 

이회영은 미주에서 돌아온 이상설과 블라디보스톡에서 재회한다. 이들은 헤이그밀사 사건처럼 외국의 동정심에 호소하는 독립운동방안에 효과가 없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따라서 '국외에서는 이상설, 국내에서는 이회영'이 주도하는 국외 독립운동기지건설, 즉 '만주에서의 독립군을 양성' 하는 운동 방책을 신중히 토의하면서 다음 4가지 항목을 결정한다.

 
1.국민교육의 장려ㆍ보급으로 국민의 각성을 촉구할 것

2.널리 뜻있는 인사들을 연결, 망라하는 비밀결사를 조직할 것

3.만주에다 광복군 양성의 훈련 기지를 세울 것

4.운동 추진을 위해 우리 몸의 피와도 같은 자금을 준비할 것

 
즉 이들은 학교를 건립해 2세들을 교육시키는 한편 ‘만주에서 광복군을 양성’해 무력으로 일본군을 축출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후 이상설과 헤어져 국내로 돌아온 이회영은 네 가지의 약속을 실천하는데 주력하고, 그 결과물로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다.

 

이렇게 ‘신흥무관학교’는 이회영과 이상설이라는 당대 두 명의 뛰어난 독립운동가의 동지적 약속과 우정 속에서 싹틀 수 있던 것이다.

 

1917년 만 4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상설의 부음 소식에 이회영은 밤새 "운(運)이여 명(命)이여!" 하며 울부짖었다. 그리고 신흥무관학교 설립 후, 잠시 국내에 돌아와 독립운동을 모색하던 이회영은 동지 이상설이 못다 이룬 꿈, 즉 조국 독립운동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 1919년에 다시 망명의 길을 떠난다.  

 

■ 잡초만 무성한 옛 발해성터

연합뉴스||입력 2009.08.24 11:09|

 

 

(블라디보스토크=연합뉴스) 강창구 특파원 = 과거 발해(渤海:698∼926년)가 지배했던 러시아 극동 연해주(프리모르스키)에는 지금도 발해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성터들이 많이 남아있다.

 

러시아 극동과학원 역사고고민족역사연구소 등에 따르면 연해주지역에는 현재 발해 이후 요.금 시대를 지나 동하국(東夏國. 1217-1234) 시기에 이르는 중세시대 성곽이 40여 곳에 이르며 이중 발해의 것도 10여곳에 이른다.

 

우선 고려인들이 2만명 가까이 거주하는 우수리스크에는 `크라스노야르성'이라는 발해의 성터가 남아있다. 우수리스크 시내에서 4∼5㎞가량 떨어진 이 성은 내성, 외성, 동암성 등 세구역으로 구성됐으며 외성은 전체 길이가 8㎞가 넘고 성벽은 3∼5m에 이르며 산의 절벽은 방어시설로, 강(수이푼강)은 자연해자로 이용할 수 있도록 축조됐다.

 

1995년 극동고고학 연구소가 이 성을 발굴한 결과 주거지에서 온돌구조가 발견됐고 9세기 당백자편(唐白磁片)이 출토돼 발해시대의 성이었음이 확인됐다.

 

성안에는 넓은 공터가 자리 잡고 있어 당시 성의 크기와 규모를 가늠케 하며 외성 위에 올라서면 수이푼강 너머 우수리스크시내까지 조망할 수 있어 최적의 성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옛 내성터는 현재 잡초와 나무들이 우거진 가운데 염소들이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북동쪽 파르티잔스크 방면으로 1시간30분가량 가다보면 슈코토바라는 작은 읍내 하나가 나오고 이곳에서 5㎞가량 더 직진하면 `스체끌라누하'라는 마을에서 작은 토성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성벽둘레 길이가 1㎞ 남짓한 이 성은 흙으로 평지에 축조한 토성으로 마치 축구장을 연상할 만큼 높이 3∼4m가량의 성벽이 운동장 관람석처럼 둥글게 쌓여 있다. 성안에는 농사조차 짓지 않은 가운데 잡초들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으며 성 안팎에 이곳이 과거 발해시대의 성터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 아무런 표석조차 없다.

 

블라디보스토크 한국교육원 이우용 원장은 "규모는 적지만 과거 발해시대에 축조된 성으로 현재도 성 외벽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며 "과거 발굴작업 당시 이곳에서 발해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했다.

 

파르티잔스크 동남쪽 니꼴라예프카마을에도 제법 큼지막한 발해의 옛 성터를 볼 수 있다. 역시 평지성(平地城)인 이 성터는 둘레 길이가 2∼3㎞, 높이 5∼6m 정도의 토성으로 성 외벽과 옹성 등의 흔적이 온전하게 보존돼있으나 역시 관리가 되지 않은 채 잡초밭으로 변모해가고 있다.

 

과거 발굴작업 결과 이 성터에서는 발해와 금나라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함께 나와 발해에 이어 금나라가 이곳을 지배했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대조영(大祚榮)을 비롯한 고구려 유민들이 세운 발해는 제10대 선왕(宣王)때 5경 15부 62주의 행정구역을 갖췄고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지역으로까지 진출,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호칭할 정도의 강력한 국세(國勢)를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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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취재: 강창구 특파원 (블라디보스토크), 편집: 김지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