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지사공 이기남 묘(知事公 李箕男 墓)

야촌(1) 2011. 11. 5. 04:48

■지사공 이기남 묘(知事公 李箕男 墓)

 

1598년(선조 31)∼1680년(숙종 6).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정숙(靜叔). 영의정 항복(恒福)의 네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감찰 오언후(吳彦厚)의 딸이다. 1630년(인조 8) 진사가 되고, 어머니의 절행(節行)으로 정경세(鄭經世)가 경연(經筵)에서 천거하여 벼슬에 나갔다.

 

1631년 북방 야인이 자주 침구하므로 자진출전하여 공을 세웠고,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하였으며, 예조판서라 가칭하여 청나라 진지에 내왕하기도 하였다.

 

난이 평정된 뒤 홍원현감(洪原縣監-從六品)· 영암군수(靈巖郡守-從四品)를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로 승진하였으나, 당시 평안·황해 양도가 호란으로 인하여 문란하여졌던 민정(民情)이 회복되지 않았고, 연행(燕行)의 요충지이며 청나라 사신들이 빈번히 내왕하는 곳이어서 많은 읍들이 피폐하였으므로,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1638년 영원군수(寧遠郡守-從四品)로 부임하였다.

 

그뒤 양덕현감(陽德縣監)· 수안군수(遂安郡守)를 거쳐, 1651년(효종 2) 백령첨사(白翎僉使)· 이산군수(伊山郡守)· 풍천부사(豊川府使)· 신천군수(信川郡守)· 서흥부사(瑞興府使-從三品)를 지냈다. 그뒤 1664년(현종 5)에는 장연부사(長淵府使). 상원군수(祥原郡守)등 관서 지방의 외직을 역임하였다.

 

그뒤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에 이르러 정헌대부(正憲大夫)의 위계에 올랐다.

풍천부사에서 체임(遞任)할 때에는 오직 쌀 한섬만을 싣고 귀향할만큼 청백하였다.

 

배위(配位)는 정부인(貞夫人) 개성박씨(開城朴氏) 주부(主簿) 제남(悌男)의 여(女)로 슬하에 4男 6女를 두니, 장자(長子)는 증 장학원정(掌學院正) 시헌(時憲), 시민(時敏), 시일(時一), 시건(時健) 이고, 증 호조참의 성주 이진발(李震發), 원주 변태일(邊泰一), 창녕 성필창(成必昌), 청송 심재형(沈再亨), 고령 신응정(申應井), 박익(朴榏)에게 출가(出家) 했다.

 

묘역은 포천 가산 금현 광촌 선증조고(先曾祖考) 찬성공묘(贊成公墓) 후록(後麓) 오향원(午向原) 배위합부(配位合附) 이다. 

 

 

 

 

 

 

 

 

 

 

사진>이종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