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이상설보도자료

이상설· 이위종에도 깊은 경의를....

야촌(1) 2007. 7. 14. 01:44

[도올고함(孤喊)]

 

이상설· 이위종에도 깊은 경의를.....

 

사회적 지위를 탐하여 학력을 속이는 공문서위조의 범죄행위를 서슴지 않은 어린 여성이 사회기강을 문란케 해놓고도 오히려 큰소리를 뻥뻥 친다. 과학적 진실조차도 사종교와도 같은 단체의 힘을 빌려 왜곡을 자행하는가 하면, 검증을 운운하는 정치판의 갑론을박, 모두 본질을 호도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작태만 난무하는 사회!

 

이러한 우리 시대의 천추만태(千醜萬態)는 한말(韓末)이라는 망국의 애사(哀史)에 헌신한 애국지사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고회(顧懷)컨대 진실로 참괴(慙愧)함을 면할 길 없다. 중앙일보가 주최한 헤이그특사 100주년 국제학술회의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이준(李儁, 1859~1907) 열사의 숭고한 행적에 관해서는 내가 부언할 말이 별로 없다.

 

이역에서의 그분의 자결은 이미 한말 구국의사들의 강령이 된 제천 유인석 자양서사(紫陽書社)의 처변삼사(處變三事) 중 일사인 자정치명(自靖致命)의 준엄한 결행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부사 이준 열사의 행적과 함께 우리 역사에 더 다양한 족적을 남긴 정사(正使) 이상설(李相卨, 1870~1917)과 정.부사를 수행했던 실무외교관 이위종(李瑋鍾, 1885~1920?), 이 두 사람에 관하여 보다 깊은 경의를 표해야 마땅하다.

 

1899년의 제1차 헤이그 컨벤션을 계승한 1907년의 제2차 헤이그 만국평화회의는, 세계대전의 전운을 감지하던 강대국들이 국제전쟁에 관한 최소한의 규약의 필요성을 느껴 소집된 국제회의로서, 훗날의 국제연맹(League of Nations)의 효시가 된 모임이었다.

 

이 만국평화회의의 정보를 처음 획득한 사람은 대한매일신보 주필 운강 양기탁(梁起鐸)이었다. 운강은 이 사실을 우당 이회영(李會榮)에게 알렸고, 우당이야말로 밀사파견 계획을 수립하여 광무황제(고종)를 움직인 장본인이었다. 수석대표로 절친한 친구 이상설을 주청한 것도 우당이었다.

 

그런데 이상설은 이미 1906년에 북간도 용정(龍井)에 가서 애국지사들의 활동거점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개설하는 데 헌신하고 있었다. 이상설은 충북 진천 사람으로 대과에 급제하여 정2품 의정부참찬에까지 오른 사람으로 을사늑약 직후에도 광화문 앞에서 자결을 각오하고 땅에 머리를 찧으며 민족항쟁을 호소하는 대중연설을 한 치열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이준과 이상설은 러시아의 페테르부르크로 가서 이위종을 만난다. 이위종은 누구인가? 이위종은 구한말의 가장 탁월한 외교관이며, 1897년에 워싱턴 주미공사를 지냈고, 1900년에 주러시아공사로 전임되어 프랑스.독일.오스트리아공사를 겸임한 서울 출신의 문신 이범진(李範晉, 1852~1910)의 아들이었다.

 

이범진은 20세기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혁혁한 무장투쟁으로 일관한 지사이며 고종의 특명으로 대한제국의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를 지내기도 했던 이범윤(李範允, 1863~?)의 친형이었다. 안중근 의사도 이범윤 휘하 의병조직의 한 부대장이었다.

 

이범진은 국제적 안목이 탁월했던 인물로서 러시아황제의 신임이 두터웠으며,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되어 공사관이 폐쇄되었는데도 불응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외교활동을 계속하고 있었다. 그 아들 이위종은 프랑스의 생시르 군사학교 출신으로 러시아어.영어.불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던 보기 드문 지식인이었다.

 

이준과 이상설은 실제로 서양언어를 구사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서 만국평화회의의 실제적 활동은 모두 22세의 청년 이위종의 활약에 힘입은 것이다. 이위종은 일.영 대표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지도 못하게 되자, 일제의 만행과 을사늑약의 무효를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불어.영어로 번역하여 언론에 배포하였고, 7월 9일에는 각국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유창한 불어로 명연설을 하여 감동을 주었고, 그의 연설은 당지의 가장 영향력이 컸던 헤이그신보에 보도되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이위종은 이후에도 삼촌 이범윤과 의병을 조직하여 싸웠고 1차 세계대전 때는 러시아군 장교로 투쟁하였다.

 

 

↑러시아 우수리스크 수이푼강 앞에 서 있는 이상설선생 유허지 비석. 그의 유해는 이 강물에 뿌려졌는데,
    그는 이 강물을 따라서라도 조국에 가고 싶다는 유언을 남겼다.    <2005. 4. 16. 촬영(도올 김용옥>

 

 ↑우수리스크 수이푼 강의 이상설 비석..

10월혁명 이후에는 적군(赤軍)의 장교(중위)로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끝내 백군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 이범진은 평생 모은 거액의 재산을 러시아의 한인의병조직과 한인학교에 모두 기부하였고, 경술국치를 당하자 통분을 못 이기고 휴대한 권총으로 한 많은 자신의 두뇌에 방아쇠를 당겼다. 이 많은 이야기를 내 어찌 이 좁은 지면에 담을 수 있으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