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질의답변

백사공을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라고 표기한 글의 합당에 대하여....

야촌(1) 2011. 6. 17. 19:24

경주이씨 다음 종친회카페에 이이록(이우) 종친님이 올려주신 질문에......

[문] 백사공[이항복]을 익재 이제현의 후손이라고 표기한 글이 여러 군데 나타나 있습니다.

       이렇게 나타내어도 괜찮은 것인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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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이렇게 표기된 글을 찾아(예로) 올려드려 봅니다. 

1, 백사 이항복과 포천 선영

 

-출처 : 포천의 문화유적과 인물-

 

이항복(1556~1618)은 익재 이제현의 후예로 권율의 사위이다.

선조ㆍ광해 연간의 명재상이자 국난을 극복한 공신으로 이름이 높은 한편 설화의 주인공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출처 : 포천시 문화유적-

 

2, 위험에 처한 이항복을 구한 조상신 이제현.

 

이항복이 태어 난지 1년이 되기 전 어느 날이었다. 유모가 우물 가까이에서 잠시 어린 이항복을 땅 위에 놓아두고 잠시 졸고 있었다. 이때 어린 항복이가 엉금엉금 기어서 이내 우물로 들어가려 하였다. 이때 유모의 꿈에 수염이 희고 얼굴이 긴 한 장부(丈夫)가 나타나, 지팡이로 유모의 정강이를 탁 치면서 꾸짖었다.

 

“어찌해서 애를 보지 않느냐?

”유모가 깜짝 놀라 꿈에서 깨어보니, 저만치에서 항복이 우물로 막 들어가려는 게 아닌가. 넵다 쫓아가서 항복이를 얼른 붙잡았다. 이렇게 하여 간발의 차이로 항복이는 위험를 모면하였다. 이후 유모는 꿈에서 작지로 마전 정강이가 여러 날 실제로 아파서 이를 기이하게 여겼다.


이 일이 있은 뒤 어느 날, 집안에 제사가 있어 방조(傍祖)1) 이제현의 영정을 대청에 걸어놓게 되었다. 그런데 유모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서 외쳤다. “앞전에 제 정강이를 때린 이가 바로 저분이옵니다!” 이삼백년전 조상인 익재 이제현이 후손 이항복을 위험에서 구해주었던 것이다.

출처 : 청구야담-

 

3. 백사 가문의 장수 비결

   백사 가문은 익재 이제현(1287~1367)의 후손으로 최고 명문가중의 하나이다.

백사 이래로 10명의 정승(추증포함)을 배출하여 〈상신록(相臣錄)〉을 만들어 보유하고 있다. -출처 : 정지천에 명문가의 비결-위의 3개의 자료를 보면  익재공과 백사공의 관계를 후예. 조상. 후손이란 용어로 표현 하고있다.

 

●祖上(조상)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 돌아간 어버이 위로 대대의 어른.
 2 자기세대 이전의 모든 세대.
 3 후에 오는 것이 발생 발전하는데 토대가 되는 것.
 
백사공은 이항복은  상서공의 후손이며, 상서공과 익재공은 촌수로 따지면 4촌 지간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후예.조상.후손 이런 자료를 보시다 이항복이 익재공의 후손인가 생각 하실수도 있다.
 
물론 올바른 표현은 방조가 맞는 것이지요.
청구야담(1826년)의 원문 제목은 臨危境益齋現夢(임위경익재현몽) 이라고 기록되어있는데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옮기면서 후예. 후손. 조상신 이런 표현들을 하지 않았나 여겨집니다. 


그래서 제 생각으로는 이런 표현들도 될 듯 하기도. 안될 듯 하기도 중에서 고른다면 될듯하기도 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청구야담에 올려져 있는 원문을 한번 참고해 보시길 바람니다.


李白沙相國 生未周朞 乳媼抱持近井 放諸地坐睡 相國匍匐幾入井 乳母夢見 白鬚丈人 頎而長 以杖叩其脛曰 「何不看兒」 痛甚驚覺 趍而救之 痛其脛屢日 大異之後家中饗祀 掛其傍祖益齋公影子于堂中 乳母見之 大驚曰 「前日叩吾脛者 卽此影樣」 云 益齋前朝賢相也 英靈不泯於三四百載之後 能救兒孫於阽危之際 豈徒其神靈 亦知白沙之異於凡兒 能致神明之佑也 .

 

[국역]
백사(白沙) 이상국(李相國)이 태어난지 채 돌도 안되었을 때 유모가 그를 안고 밖으로 나가 우물 근처에 내려놓고 앉아 졸았는데, 상국이 기어서 우물 속으로 거의 들어가려는 찰나였다. 

 

유모 꿈에 수염이 하얗고 키가 크며 풍채가 좋은 대장부가 나타나 지팡이로 그녀의 정강이를 두드리며 말하였다.“어찌하여 아이를 보지 않는고?” 그녀는 통증이 너무 심하였으므로 깜짝 놀라 깨어나 급히 달려가 아이를 구하였는데, 정강이가 며칠동안 아팠으므로 몹시 이상하게 여겼다. 


후에 집안에서 합제사가 있어 방조(傍祖) 익재공(益齋公)의 영정을 사당 안에 걸어놓았더니 유모가 이를 보고 크게 놀라 말했다.“저번 날 저의 정강이를 두드렸던 사람이 바로 이 영정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익재는 전조의 어진 재상이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삼사백년 후까지도 멸하지 않고 있다가 대단히 위태로운 지경에 있던 어린 후손을 능히구해낸 것이니 어찌 비단 익재의 신령함뿐이겠는가? 백사 또한 보통 아이와는 달라 신명의 도움을 능히 불러들였던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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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제가 예전에 백사 이항복이 쓰신 "누나의 묘지 글" 을 연구해본 자료가 있는데 올려 드리겠습니다.
이 자료중 익재공의 후손중 눌헌 이사균이 나오는데 이사균과 이항복 모친과의 관계를 살펴 보시면 많은 도움이 되실것입니다. 해석이 약간은 서툴지만 열심히 연구한 자료랍니다. ㅎㅎㅎ
 
 우리 누나에 대한 묘지글(숙부인 이씨 묘지명) 이항복                                      
우리 누나는(우리가족) 경주이씨인데 신라 개국 공신인 알평(시조)의 후예로 아버지는 조선조 의정부 우참찬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이몽량 입니다.그리고 우리 엄마는 전주 최씨랍니다. 누나는 장녀이고 저는 막내랍니다.우리 가족은 형둘. 누나둘. 그리고 막내인 저 항복입니다. 


울 아버지 첫째 부인이셨던 함평이씨 부인이 돌아가신후 울 엄마가 두번째 처로 시집을 오시게 되었는데 이복형제(엄마가 다름)들이 네분 계셨답니다.아들한명에 딸 세명 두셨지요함평이씨 부인은 이복형제들이 어릴때 돌아가셨습니다.아버지는 이쪽 저쪽 다해서 4남 5녀를 두셨습니다. 


울 엄마는 전주최씨인데 엄마 외조부(항복에겐 증외조부)가 조선조 이조판서를 지내신 이사균의 처가 바로 황희정승의 고손녀 되시는 장수황씨랍니다. 눌헌 이사균은 (1471-1536) 조선조 이름난 이조판서를 역임하신 분으로 고려조 익재공 후손이며, 조선조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신 청호공 희의 증손되시며 성격이 곳은 분이셨답니다. 


누나는 어린나이에 시집을 가셔서 남편은 여흥민씨인 선으로 승정원 죄승지 였고 시부는 승정원 좌승지를 지내신 민세량 이셨습니다. 누나는 딸한명을 낳았는데 그 딸은 숭록대부 금계군에 오르신 박동량의 아내가 되었고박동량은 아들 미를 낳았는데 미는 선조의 딸인 옹주에게 장가들어 금양위에 오르셨습니다.


박동량의 딸은 연안이씨 진사 이명한의 아내가 되었답니다. 나머지 두 자녀는 어리었구요.을 엄마 최씨는 눌헌 이사균과 처인 장수황씨에겐 외손녀가 되시는데 엄마는 막 나서부터 현덕(어짐)이 있어 외할머니인 황씨부인이 다른 손자들 보다도 특별히 사랑하셨다 합니다. 

 

엄마는 자라서 16세 되던 무렵에 아버지가 상처하신후 두번째 부인으로 시집을 오셔서  가정 계묘년인 1543년 10월 초하룻날에 누나를 낳으셨습니다. 나는 1556년에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첫째부인인 함평이씨 부인이 어린 자녀 넷을 두고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린 자녀들을 키울려고 측실을 두시고 결혼을 하지  않을려고 하였으나 황씨부인이 소개를 하여 엄마가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시게 되었답니다. 당시 엄마는 16세 아버지는 40세정도 되셨습니다. 나이 차이 때문에 엄마 집안에서 반대를 많이 하셨는데 황씨부인이 집안반대를 설득하였고 아버지는 마음을 큰아버지께서 강력히 밀어 주셨습니다. 

 

엄마 외조부인 눌헌 이사균이 아버지를 처음 본 것은 아버지가 과거시험을 볼때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분이셨는데 그때 아버지를 유심히 보시고 "장차 큰 인물이 될 사람이 있다며 황씨부인에게 넌지시 말씀을 하셨는데, 그후 10여년 후 눌헌이 돌아가시고 이런 애기를 황씨부인이 잊고 있다가 그 시기에  아버지 첫째 부인이신 함평이씨 부인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황씨부인이 들으시고 "내 남편이 옛 적에 말씀하신 분이 바로 이분이시구나"하시며 외손녀인 최씨부인을 강력히 아버지에게 소개해 주셨답니다. 그래서 엄마와 아버지 나이차이가 아주 많이 난답니다.


황씨부인은 외손녀인 엄마를 엄청 사랑하셨고, 누나가 태어났을때 황씨부인은 날마다 누나소식을 물어보시고누나가 태어난지 한돌이 지나서 문득 누나를 데려다 길렀답니다.당시 우리집에는 고모부가 일찍 돌아가셔서 고모부 애들 네명 또 아버지 종형제 애들 여러명등 우리 가족을 포함하여 아주 많은 식구들이 있었답니다.(아마 이런 이유로 누나가 황씨부인에게 가서) 


누나는 어릴 때부터 머리가 엄청 좋았답니다. 누나와 저는 나이차이가 13세살 정도 차이가 납니다.누나가 8.9세때 길쌈질이나 뜨게질 같은것은 배우지 않아도 아주 잘하였고, 바느질을 해놓으면 손으로 한것같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잘하셨답니다.


그래서 외증조모인 황씨부인이 손바닥에 옥을 가지고 노는 것처럼 누나를 무릎에서 때어놓지 못하셨답니다.황씨부인은 항상 누나 이마를 만져 주시면서 "장차 우리 손녀를 얻어가는 자는 그 집을 보존하는 집이 될지어다 라고 늘 누나에 대한 자랑을 하셨습니다.


이때 누나 시아버지 되실 민세량이 작고한지 얼마 되지 않으셨는데 민세량의 처인 심부인이 홀로되어, 시댁과 친정 제사를 지내게 되셨는데 두집의 신주(위폐)를 집 뒷뜰에 두 사당을 지어놓으시고 모셨다 합니다. 


그리고 집안에 내려오는 중대한 제사나 많은 노비들을 다스릴 며느리를 생각하시고 우리 누나를 며느리로 맞아 들였답니다. 이때가 누나 나이가 12세 어린 나이였지만 누나는 보통 아이들과 달라 장난이나 하고 놀터인데 누나는 예로써 집에서나 또 종사를 보실때 며느리와 아내의 도리를 의식에 맞게 잘하셨답니다. 


누나 남편인 선이 무신년인 1608년 10월에 누나는 5년뒤인 1612년 7월에 돌아가셨습니다.울 아버지는 두번 장가들어 4남 5녀를 두셨고 두번째 부인인 최씨부인에게서 누나는 장녀가 되고 저는 막내였습니다. 


내가 어렸을적 엄마 젖이 떨어져 누나 젖을 먹고 자랐고 아버지가 아홉살적에 엄마가 열여섯적에 돌아가셔서누나를 의지하며 자랐습니다. 누나와 내가 나이 들어서는 가까운 곳에 살아 누나를 조석으로 뵐 수 있었는데 누나가 먼저 돌아가셔서 누나에게 부인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습니다.어찌 누나를 잊을수 있겠습니까? 

 

※이상은 제가 예전에 공부했던 자료를 올려 보았으며 익재공 이제현. 눌헌 이사균. 장수황씨. 이항복 어머니의 관계를 살펴 보신 후 이해를 하신다면 비록 외갓집 관계였지만 이제현의 후손도 맞다고 이해를 하실 것 입니다. 이글에 대한 댓글 중 도움 되실 내용이 있네요.


●이항복 누나 묘지명에 대한 자료 댓글 중에서 .....
 
추정 컨데 장수황씨 할머니께서 외동딸을 시집보내고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 외손녀 전주최씨를 데려다 키웠을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이며 어느 정도 자라서는 참찬공(백사공 선친)에게 시집을 보냈으며 또한 외증손녀(백사공 누님)를 돌이 지나서 데려다가 키운 것으로 판단되네요 이는 임진왜란 전 일반적인 사회상으로 사료됩니다.

 
백사공 모친(전주최씨)께서는 친정과 외가를 출입하였는바 주로 자신을 키워준 외가에 대한 정이 커서 백사공 누님을 비롯한 형제들이 자주 눌헌공집에 머물렀던 것으로 판단되네요. 이 와중에 백사공께서 마당 우물에 빠질려는 찰나 유모의 꿈속에 익재공께서 나타나 위험에서 구해주었다는 야사가 전해오고 있네요 야사 내용이 실린 곳은 대동기문이라는 책입니다.

  
유모가 어느 정도 세월이 지나 사당에 익재공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치를 적에 영정사진을 보시고 저 분이 꿈속에 나타나신 분이라고 깜짝 놀랐다는 내용으로 보아 눌헌공 집안에서 익재공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모셨다고 판단되며 백사공이 태어나기 훨씬 전에 눌헌공께서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유배지 보은에서 장산영당을 지어 영정을 봉안했다는 배경 설명이 되겠네요.


청소년들을 위해 번역해주신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전에 왕조실록을 찾아보니 눌헌공 졸기에서 갑오년(1534년) 겨울에 참찬 벼슬에 올랐으나 권신 김안로의 방해로 불운을 겪게되시는데 가승에보면 휘 식 방선조님은 판관 벼슬을 햇으며 증판서로 나와 있으니 관직명을 넣어도 무방할 것으로 판단되네요
 
●눌헌 이사균익재공 제현 - 운와공 달존 - 소부윤공 학림 - 대언공 담 - 청호공 희 - 참판공 계번 -판관 식 - 눌헌 이사균

  (처는 장수황씨) 

 

●이조판서 눌헌 이사균에 대하여 

   본관 경주(慶州). 자 중경(重卿). 호 눌헌(訥軒). 시호 문강(文剛).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1504년 부수찬(副修撰)으로 폐비(廢妃) 윤씨(尹氏)의 복위에 대한 부당성을 주장하다가 보은(報恩)에 부처(付處)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교리(校理)에 오르고 이듬해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19년 전주부윤(全州府尹)으로 있다가 같은 해 기묘사(己卯士禍)로 조광조(趙光祖) 등 신진사류(新進士類)가 축출된 뒤 부제이 되었으나 조광조 일파라는 모함을 받아 좌천되었다. 그후 다시 공조참판·이조판서를 역임, 1534년 경상도관찰사, 뒤에 중추부지사가 되었다. 문집 《눌헌집》이 있다.  
 
이상 두서없이 자료를 올려 보았습니다.
질문 올려주심에 다시한번 감사말씀 드립니다.
아마 이 자료를 살펴보시면 익재공과 백사공의 관계를 이해하시게 되실것 입니다.
 
2011년 6월 15일 이승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