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世 찬성공 이예신선생 묘(贊成公 李禮臣先生 墓)
생몰년 : 1466(세조 12)~1536년(중종 31)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선생의 조부(祖父)로, 글을 잘 짓고 뜻이 원대하였으나 도(道)를 지키면서 벼슬하지 않고 전야(田野)에서 일생을 마쳤다[1536년 8월(중종 31)] 증 의정부 좌찬성(贈 議政府 左贊成)에 추증되었다. 묘갈비(墓碣碑)는 1538년(중종 33)에 세웠고, 비의 크기는 높이 98Cm, 넓이 55Cm, 두께 18Cm이다.
□ 이예신(李禮臣)→차자(次子) 이몽량(李夢亮)→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 묘지의 소재지 : 경기도 포천시 가산면 금현리 광촌마을.
▲24世 보덕공 이몽윤선생 묘(輔德公 李夢尹先生 墓)
진사 이예신(進士 李禮臣)의 장남으로, 기묘 1519년(중종 14)에 생원 진사시 3등으로 합격하고, 무자 1528년(중종 23) 동생 몽량(夢亮)과 함께, 문과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15위로 합격, 승문원에 들어간 후 , 시강원 보덕(侍講院 輔德-從三品)을 지내고 춘추관 편수관(春秋館 編修官) 지제교(知製敎-正三品)를 거친 후, 간신 윤원형(尹元衡)을 멀리하자 그의 방해로 늘 외직인 평안도사(平安都使), 양근군수(陽根郡守-從四品), 평산부사(平山府使), 장단부사(長湍府使-從三品)를 지내다, 사옹원 정(司甕院正-正三品)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묘갈비(墓碣碑)는 1720년(숙종 46년)에 건립하였는데, 비의 크기는 높이 117Cm, 너비 49Cm, 두께 24Cm이다. 묘는 아버지 묘 아래 있다.
▲24世 정헌공 이몽량 선생 묘(定獻公 李夢亮 先生墓)
1499년(연산군 5)∼1564년(명종 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명(應明). 진사 예신(禮臣)의 아들이고, 백사(白沙) 항복(恒福)의 아버지다. 1522년(중종 17) 생원시·진사시에 급제하고, 1528년 형 몽윤(夢尹)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正九品)에 제수되었다.
이어서 승정원 주서(承政院注書-正七品).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正六品)을 역임하고, 1539년 국왕의 특명으로 경상도어사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돌아왔다. 그뒤 명종이 즉위하자 동부승지로 발탁되면서 위사공신(衛社功臣)3등으로 광산군(廣山君)에 봉해졌고, 이어서 대사간으로서 학문에 입각한 도학정치를 제창하였다.
1547년(명종 2) 강원도관찰사가 되어 도민의 진휼을 위하여 진력하였고, 이어서 예조참의· 병조참지· 대사간을 역임하고 1550년 도승지에 올랐다. 이듬해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조식(曺植) 등 재야사림을 천거하였고, 이어서 충청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그뒤 대사간· 병조참판· 경기감사· 예조참판· 도승지를 역임하고, 1560년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이어서 대사헌· 형조판서를 지냈는데, 형조판서로서 형률을 잘못 처리하였다고 하여 한때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서용되어 동지중추부사· 한성부판윤을 거쳐 우참판에 이르렀다.
성품이 온유하였고 형제 사이에 우의가 돈독하였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 공의 신도비는 간이 최립(簡易 崔岦)이 찬(撰)하고, 석봉(石峯) 한호(韓濩)가 글씨를 쓰고, 판충주부사(判中樞
府事) 노직(盧稷)이 전액(篆額)을 썼다. 비는 1604년(선조 37년)에 세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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