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타/그림,사진 등.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작품(조선시대)

야촌(1) 2009. 8. 30. 00:33

 

 

↑18세기 이후,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장남을 낳은 여성은 젖가슴을 노출한다."라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깊은 이 시대에 "장남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가치가 없다." 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이 의상은 여성에게 있어서 "남아를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일본 순사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

도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다.

 

↑시골의 결혼 피로연과 톱레스 치마저고리 아낙네들의 분주한

  움직임이다.

↑아침의 잡담-1921년 작품

↑톱레스 치마저고리-조선 서민의 기묘한 습속.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풍속 문란이라고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뺨맞아 가면 서도 그렇게 쉽

사리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위의사진들은 미국에서 소장되고 있는 그림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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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연당여인(蓮塘女人)

 

평론가들에게 신윤복 회화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평을 듣고 있는 작품입니다. 

연꽃이 활짝 핀 연못을  바라보며 여인의 모습을 시원하면서도 운치있게 그려내었습니다.

 

생황을 불려는듯 한손에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대를 든 채 툇마루에 앉아 있는 이 여인은 은퇴한

기생인 퇴기인듯 합니다. 순간의 모습을 잘 포착하여 깔끔하게 화면에 담아낸 혜원의 솜씨가 놀

습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연당야유도(蓮塘野遊圖)

 

"좌상객상만(座上客常滿)"  "주중주불공(酒中酒不空)"  앞의 '酒'자는 혜원이 잘못 쓴 것으로 

"樽(준)"자가 맞을듯~~옮기면 "좌"상에는 손님이 항상 가득 차 있고, 술단지에는 술이 비지

는다'는 뜻이다. 

 

 

↑주유청강(舟遊淸江) 

 

특별히 하는 일없이 유희나 즐기며 세월을 죽이고 있는 선비들을 한량이라고 하죠. 그 한량들이

기녀들을 데리고 뱃놀이를 나왔습니다. 조선 시대에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입니다. 화면 위쪽에는 

“피리 소리는 바람을 타서 아니 들리는데 흰 갈매기가 물결 앞에 날라든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문종심사(聞鍾尋寺) : 종소리를 듣고서 절을 찾아가다.

↑이승영기(尼僧迎妓) : 비구니가 기녀를 맞이하다.

↑노상탁발(路上托鉢) : 중이 길위에서 시주를 청하다.

↑춘의만원(春意滿園) : 봄기운이 온곳에 만연하다.

↑전모(氈帽)를 쓴 女人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쌍검대무(雙劍對舞)  

 

일체의 배경을 무시하고 검무 하는 장면만 가득채운 대담성을 보였으나. 주제표현에 조금도 군색함이 나타나지 않으나. 이는 인물의 포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라 하겠다. 시각의 초점이 되는 검무 기생들은. 의상에서 청홍의 강렬한 대조를 보이면서 화면을 압도하는데. 주인을 비롯한 관객들과 악공들이 이를 중심으로 포열(布列)함으로서 화면의 비중은 평형을 이룬다.

 

그런데 검무기생의 날렵한 동작에서 오는 율동감은, 관객들의 도취된 몸짓과 악공들의 신바람 나는 연주에 혼연일치를 보여 아연 활기를 띤다. 이렇게 놀이에 참석한 인물들의 심리를 꿰뚫어 순간적인 동작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 놓을수 있다는 것은. 아무리 화가의 예리한 안목이라 하더라도 그리 쉽지 않을 일이다.

 

따라서 작가 신윤복이 이런 세계에 얼마나 익숙하였던가를 짐작할수 있는데. 인물들이 하나같이 극도로 세련된 차림을 보이는 것도 그의 주변을 보는듯 흥미롭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단오풍정(端午風情-1805)


신윤복의 작품 중에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작품이죠. 단오날에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그네를

뛰며 놀던 조선 시대 여인들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놀이의 이유는 악귀를 물리

치고자 하는 액땜의 뜻이 있다고 합니다.

 

멀리서 목욕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는 소년들은 절간의 젊은 스님들 같은 데요, 그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무녀신무(巫女神舞-1805)


일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는 풍경입니다.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춤을 추는 무당 앞에서 무언

가를 열심히 빌고 있는 아낙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혜원은 이렇게 흥미롭고 이색적인 생활의

풍경을 화폭에 담길 즐겨하였지요.

 

그래서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이 기녀, 무녀 들입니다. 여기서도 기녀의 붉은 의상은 우리의

선을 기녀에게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미인도(간송 미술관 소장)

 

낭군님 앞에서 옷고름을 살짝 풀며 수줍은 듯 요염하게 그러나

품위를 잃치 않은 모습이 정말 아름답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기다림.

 

버들가지 산들 그리는 동네 어귀에서 한 여인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립니다. 머리 가채를 보면 어염집 규수가 아니라도 정혼한 아

낙네임을 알수 있습니다.

 

그리고 살포시 뒤로 돌려 쥔 모자가 기다림의 상대입니다. 저 모자

스님들이 쓰는 송락인데. 이 그림에서는 땡중이 되어버리겠네

요. 그래도 설레는 기다림의 마음.. 오롯이 드러내니 역시 신윤복

입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연소답청(年少踏靑)

 

연소답청(年少踏靑)이란 젊은 선비들이 푸른 새싹을 밟는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 양반들의

유한놀이 문화인들놀이를 말한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청금상령

 

연못가에서 세 남자가 기생을 데리고 유희를 즐기고 있는 모습입니다. 옛 선비들은 기생

들과 즐기는 놀이도 양반들이 지녀야 할 풍류로 생각하였기에, 당당하면서도 자신감 넘

치는 모습들이 보입니다.

     

기녀들의 옷맵시나 선비들의 옷매무새, 가야금, 우아한 정원의 나무들이 매우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어 당시의 생활상을 잘 알게 해 줍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주사거배(酒肆擧盃)

 

주사거배의 뜻은 ‘술집에서 술잔을 들다’ 라는 뜻입니다. 말 그대로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풍경을 그린 그림인데 한가지 중요한 사실은 여기서 보여주는 술집이 기생집도 아니고 주막도 아닌 ‘선술집’의 풍경이란 점입니다. 우리나라 회화 중 선술집을 묘사한 유일한 그림이기에 이 그림의 가치는 매우 높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도 "선술집"이란 곳이 많이 있는데 보통 "값이 저렴한 술집"  "값싼 안주에 간단히 한잔 하는 술집"이란 뜻으로 많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는 정확한 뜻이 아닙니다. 선술집의 뜻은 "서서 술을 마시는 술집"이란 뜻입니다.즉 얼마나 오래 마시거나 많이 마시는 것과는 상관없이 무조건 서서 마시는 술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약 전부 서서 마시는 선술집에서 배짱 좋게 앉아 술을 마시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공공연하게 시비를 걸어 큰 싸움이 벌어지곤 했다 합니다. 그림을 보더라도 그 누구도 앉아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선 인물을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풍속도는 우리가 쉽게 수긍할 수 있고 보는 즉시 바로 느낌이 오는 그림이라 쉽게 지나쳐 버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풍속도의 가장 재미있는 감상법은 인물 하나하나를 꼼꼼히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그림이 어떤 광경, 어떤 순간을 을 묘사한 것인지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림의 등장인물은 총 6명인데 남자가 다섯에 술집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한 명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붉은 옷을 입고 노란 초립을 쓴 가운데 사람입니다. 아마 이 복장 신윤복의 그림 중 술집 그림에서는 빠지지 않는 인물인데 <야금모행> <유곽쟁웅> 등등 에서 꽤 여러 번 등장한 인물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주점의 역사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문헌에 의하면 고려 성종2년에 송도에 주점을 허가해주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반 민초들이 이용하는 현대적 의미의 주점은 조선 후기 숙종 때 본격적으로 널리 생겨납니다. 

 

조선 후기에 주점이 널리 퍼진 이유는 주점은 화폐 유통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라에서 화폐를 널리 유통시킬 목적으로 관용주점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그 후 화폐의 유통과 지역간 상거래의 발달로 술뿐 아니라 잠자리와 음식까지 제공하는 주막이 본격적으로 퍼져 19세기 조선 말기까지 전국 곳곳에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김없이 주막이 들어 서게 됩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월하정인(月下情人)

 

어스름한 달빛 아래서 양반인 듯 잘 차려 입은 남자가 초롱불을 들고 길을 재촉하는 것 같네요. 여자는 쓰개  치마를 둘러쓰고 다소곳한 모습으로 조금은 주저하는 듯한 모습이구요. 배경은 간략히 묘사되어 있지만 대신 이들의 표정과 행동에서 미루어 짐작되는 그네들의 감정은 온화폭이 모자라는 듯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왼쪽 담에는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月沈沈夜三更 兩人心事兩人知)."라고 씌여 있습니다. 당시 조선시대의 "톱레스 치마저고리"는 1911년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입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월하밀회(月夜密會-1805)


달빛만 고요한 한 밤중에 인적 드문 길의 후미진 담장 밑에서 한상의 남녀가 깊은 정을

나누고 있습니다. 남자는 차림새로 보아 관청의 무관인 듯 하고, 그 남자의 여인은 기생

인 것 같습니다.

 

그들의 만남을 한켠에서 지켜보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이들의 만남을 주선해준 사람

듯 하구요. 담장 밖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듯한 화가의 시선이 재미있습니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기방무사(妓房無事-1805년) 

 

방안에서 남녀가 무슨 일을 하고 있다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당황한 듯 하죠?

아마도 방안의 여인은 기생의 몸종이고, 방안의 남자는 기생을 찾아왔다가 그녀의 몸종과

사랑을 나누던 게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갑자기 기생이 들어오니 사내는 이불로 자신의 벗은 몸을 가린 듯 하구요. 혜원의 춘화 중

에는 이와 같은 내용으로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벌거벗은 사내의 모습이 그려진 그림이 있

답니다.

 

 

↑삼추가연(三秋佳緣)

 

기생의 초야권을 사는 것을 '머리 얹어준다'라고 하는데, 이는 머리를 땋아 위로 틀어 올릴 수 있게 해준다는 뜻이다. 동기(童妓)의 초야권을 사는 사람은 금침(衾枕)과 의복, 그리고 당일 연회비를 담당해야 하룻밤을 치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 한바 와 같이 조선시대의 관기는 '조'라는 것이 있어서, 아무리 상대방이 높은 관직에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초야를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혜원의 작품중 <국화 옆에서>가 바로 초야권을 사는 장면으로 보인다.

 

그림 왼쪽에 국화꽃이 피어 있고, 오른쪽에 젊은 남자와 할미, 그리고 그 앞에 댕기머리를 늘어뜨린 처녀가 있다. 남자는 얼굴을 보아하니 아주 젊은 축이고, 여자는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젊은 여인임을 알 만하다. 남자는 웃통을 벗고 대님을 쥐고 있다. 대님을 푸는 것인지 묶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님을 풀고 있다면 하룻밤을 지내기 전이고, 묶고 있다면 일이 끝난 후이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중간에 있는 추악하고 간교한 기색이 완연한 할미인데, 임을 가리고 여인에게 무언가를 소곤대고 있다.

 

아마도 "이 서방님을 오늘 밤 잘 모시면..." 혹은"이제 앞으로 서방님께서...."라는 말일 것이다. 이 할미의 정체가 궁금하다. 서울 기생과 지방 기생의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서울 기생은 기부 곧 남자가 지배하고, 지방 기생은 기모(妓母)곧 기생의 어미가 지배한다. 기모의 경우는 춘향이와 월매를 생각하면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혜원의 풍속도에 나타난 유흥 공간은 대개 서울 시정의 것으로 짐작되므로, 기생의 성을 판매하거나 기생의 초야권을 사는 이들은 기부 곧 조방군이라 불렸던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위의 늙은 할미는 기방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이는 아직 풀리지 않는 문제이다.

 

 

↑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야금모행(夜禁冒行-심야의 통금시간 몰래 나들이)

 

초승달이 떠 있는 밤, 노란 초립 아래 추위를 막기 위한 풍차를 쓴 붉은 옷의 별감이 손짓하며 뭐라고 하고 있다. 갓 쓴 양반과 긴 담뱃대를 문 기생은 모두 누비로 된 저고리와 속바지를 입었고 손에는 바람이 들지 말라고 토시를 끼고 있다. 초승달이 기운 것을 보니 밤이 한참 된 것 같다.


기생은 궁중에서 필요할 때마다 전국에서 뽑아 올렸으나 숙식은 혼자 해결해야 했다. 이것을 해결해주는 일단의 무리들을 기부(妓夫)라고 하였다. 이 둘은 서로간의 이익을 나누는 관계를 지속하다가, 기부는 차츰 기생의 남편이라는 역할과 함께 그들을 관리하는 위치로까지 확대되어간 듯하다.

 

이들의 관계를 공생(共生)이라고 해야 할까? 기부의 역할은 중인계층의 무리들, 즉 시중의 한량이나 별감 같은 하급 군인계층과 양반가의 서자 등(흔한 말로 왈패, 왈짜)도 그 한 축을 이루지 않았을까 추측되고 있다.


양반과 기생이 어디론가 가려고 하는 것을 별감(여기서는 기부로 보인다)이 배웅하는 것 같다. 바람 매운 이 겨울밤에 무슨 일로 길을 재촉하는 것인가? 오른쪽에 그려진 길 안내 맡은 작은 아이는 길 밝히는 등과 추위 막을 털모자를 들고 있다.

 

기생이 물고 있는 긴 담뱃대는 갈 길을 재촉하는 듯 아이를 가리키고 아이는 시선을 되돌려 가야할 길을 어서 가자고 재촉하는 듯하다. 중요하지 않은 듯 작게 그려 넣은 아이의 시선은 그림에 긴장감을 주고 있다.


혜원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무 작게 그려진 아이, 그림 전체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크지 않아 작게 그려진 아이지만 항상 관조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지는 것은 혹시 혜원 자신을 투영시킨 것은 아닐런지...


[야금모행]  혹시 기생과 2차(?) 나가는 풍경 아닐까? 

별감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내는 것 같은 선비를 모습이 재미있다.

 

 

↑혜원 신윤복의 유곽쟁웅(蕙園 申潤福 의 遊廓爭雄)

 

유곽은 기생집을 말한다. 기생집 앞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왼쪽의 흐트러진 상투머리에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람은 아마 이 싸움에서 진 것 같다. 가운데 버티고 서 있는 남자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벗어던진 옷을 다시 입고 있다.

 

붉은 옷의 별감은 싸움을 말리며 진 사람을 다독이고 있나 보다. 오른쪽의 남자는 술이 취했는지 얼굴이 붉고 옷이 흙투성이가 되어 있다. 아마 싸움에 진 사람과 같이 한바탕 뒹굴었나 보다. 친구의 둥근 갓 양태와 대우(위로 솟은 부분)가 떨어진 것을 주워 들고 있다. 큰 가체머리를 한 기생은 누가 이기든지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담뱃대를 물고 있다.



겉으로는 질서 잡힌 것처럼 보이는 사회도 이런 흐트러진 모습은 어딜 가나 어느 사회나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혜원은 그러한 사회의 뒷모습을 이런 그림으로 남겨놓았다.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그들의 폐쇄성 때문에 이런 그림을 그린 혜원이 마땅 했을리가 없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도화서에서 쫓겨나 이곳저곳을 떠돌며 흔히 말하는 춘화(春畵)도 그려주며 그의 인생을 그렇게 보낸 것이 아닐까 싶다.

 

 

↑혜원 신윤복의 상춘야흥(蕙園  申潤福 賞春野興)

 

진달래 꽃이 피는 어느 봄날, 양반가의 후원에서 벌어진 연희의 흥취를 그렸다.

음악에 흠뻑취한 주빈의 표정이 이날의 연희가 아주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준다.

 

[작가소개]

● 신윤복(申潤福)

    생몰년 : 1758 (영조 34) - ?(?)

 

조선 후기의 화가.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입부(笠父), 호는 혜원(蕙園). 화원(畵員)이었던 신한평(申漢枰)의 아들이다. 그의 숙부도 화원이었고, 고모는 화원의 문벌인 향천허씨에게 출가했으며, 현조(고조부)도 화원이었던 가문의 전통 덕분에 일짝아 눈을 떴지만 당대에는 크게 인정받지 못하였다.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벼슬은 첨절제사(僉節制使-從三品)를 역임하다 속화(俗畵)를 즐겨 그려 도화서(圖畵署)에서 쫓겨난 것으로 전해지는것 이외에 그의 생애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산수화에서 김홍도(金弘道)의 영향을 토대로 참신한 색채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을 남기기도 하였지만, 한량과 기녀를 중심으로 한 남녀간의 낭만이나 애정을 다룬 풍속화에서 특히 이름을 날렸다.


그의 풍속화 등은 소재의 선정이나 포착, 구성방법, 인물들의 표현방법과 설채법(設彩法) 등에서 김홍도(金弘度)와 큰 차이를 보인다. 그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즐겨 사용하여, 그의 풍속화들은 매우 세련된 감각과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또한, 그의 풍속화들은 배경을 통해서 당시의 살림과 복식 등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등, 조선 후기의 생활상과 멋을 생생하게 전하여준다. 그의 대부분의 작품들에는 짤막한 찬문(贊文)과 함께 자신의 관지(款識)와 도인(圖印)이 곁들여 있지만, 한결같이 연기(年記)를 밝히고 있지 않아 그의 화풍의 변천과정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김홍도(金弘度)와 더불어 조선 후기의 풍속화를 개척하였던 대표적 화가로서 후대의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쳐, 작가미상의 풍속화와 민화 등에는 그의 화풍을 따른 작품들이 많다.

 

대표작으로는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미인도〉와 《풍속화첩》이 있는데, 《풍속화첩》에 수록된 주요작품으로 〈단오도 端午圖〉·〈연당(蓮塘)의 여인(女人)〉·〈무무도 巫舞圖〉·〈산궁수진 山窮水盡〉·〈선유도 船遊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