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안마을 진입도로 입구(장락교 왼편의 노상주차장에 10여대를 주차할 수 있습니다.
↑제천시 지정보호수, 수령400년느티나무 (위치 제천시 장락동 1024번지 : 탑안로10길)
↑왼편 농로를 따라 올라가면 쉽게 갈 수 있습니다.
↑산소 소재지 : 충청북도 제천시 장락2동 탑안마을
↑촬영>2011. 04. 11(월요일)>건돌(李元熙)
■ 성균생원 경주이공 타 묘갈명(成均生員 慶州李公鼉墓碣銘)
◇24世 경주이씨 팔별 집 4째분.
제천(堤川)에서 동쪽으로 얼마 안 떨어진 곳에 한 골이 있으니 장락(長樂) 탑 안이라 한다.
오가는 사람들이 눈에 익혀 두었다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서로 이르기를 이는 경주이공(慶州李公) 재사당(再思堂)의 아우 생원공(生員公)이 세상을 버리고 피해 살던 곳이라고 한다.
또 그 도덕문장(道德文章)이 훌륭한 계통을 이어온 훌륭한 스승에게서 배우고 익힌 것임을 들어 기리었다. 나무만 봐도 그 산을 안다고 하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구렁 뒤 산기슭에 북북 동쪽을 등지고 앉은 자리에 서너자 높이의 묘(墓)가 있으니 이는 공(公)이 묻히신 산소(山所)이다.
공(公)이 굳기신지 수백 년이 되었으나 묘에는 행적(行蹟)을 드러낸 비석이 없어 그 후손된 사람들이 이를 걱정하고 송구(悚懼) 스럽게 생각하여 지난해 경신(庚申 : 1980) 시향(時享)날 여러 후손들이 묘 앞에 모여서 이에 대한 의논을 내어 안(案)을 세우고 방책(方策)을 물었고, 모두의 동의(同議)를 얻어서 돈을 걷어 모아 가지고 상석(床石)을 다시 해놓고 비석(碑石)을 세워 묘에 이르는 길을 밝히기로 하였다.
종약회장(宗約會長) 상원(相遠)이 상엽(相燁)과 문희(文熙) 두 사람과 함께 그 집안 조상의 행적(行蹟)을 적은 기록을 가져다주며, 그 명(銘)과 서문(序文)을 용우(龍雨)에게 부탁해 왔다.
글은 도저히 맡을 수 없으나 정의(情誼)는 또한 도저히 사양(辭讓) 할 수 없어 그 집에 전(傳)해 내려오는 옛날 들은 이야기와 족보(族譜)에 의거(依據)해서 다음과 같이 대충 개요(槪要)만 적는다.
공(公)은 이름을 타(鼉)라 하고, 자(字)는 덕수(德叟)라 하며, 성(性)은 이씨(李氏)요, 본(本)은 경주(慶州)이다. 신라개국공신(新羅開國功臣) 이름을 알평(謁平)이라 하는 어른이 시조(始祖)이고, 고려 말엽의 문충공 익재 선생인 이름을 제현(齊賢)이라 하는 어른은 공의 7대조이다.
고조(高祖)는 도안무사(都按撫使)를 지냈고, 이름을 신(伸)이라 하는 분이며, 증조(曾祖)는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지냈고, 이름을 계번(繼蕃)이라 하는 분이고, 할아버지는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를 지냈고, 이름을 윤인(尹仁)이라 하였다.
아버지는 창 평 현령(昌平縣令)을 지냈고, 이름을 공린(公麟)이라 하였으며, 어머니는 순천 박 씨로 사육신인 팽 년(彭年)의 따님이요. 팔형제를 두셨으니, 공은 그 중(中)의 넷째 아드님이시다.
공은 연산 무오사화(戊午士禍 : 1498년)에 중형(仲兄) 재사당(再思堂)이 화(禍)에 걸리자 이에 관련되어 부자형제(父子兄第)가 함께 죄(罪)를 받아 각지로 분산(分散)되어 모두 귀양 가서 고생 하시다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이 풀리고 억울한 죄명과 누명을 깨끗이 씻어 주고 불러 올렸으나 벼슬에 뜻을 끊고 모두 다시 각지(各地)로 분산하여 자취를 숨겼으니 이에 공은 산수가 적막(寂寞)하고, 후미진 곳으로 자취를 감추고 세상에 나가서 활동할 생각을 끊고 스스로 깨끗이 절조(節操)를 지키며 세상의 잘못됨을 분하게 여기고 탄식하며 걱정하고 마음을 아파하였다.
어진 사람으로서 말년까지 액(厄)을 만남이 어찌하여 이런 지경에 까지 이르렀단 말인가!?
공은 나면서 머리가 명석(明晳)하고 재주와 슬기가 뛰어났으며 체모(體貌)가 준수(俊秀)하고 건장 하셨으며, 기상(氣像)과 도량(度量)이 활짝 트이고 시원하여 뜻이 크고 힘차고 당당하고 떳떳하였고, 서두르지 않고 느긋하시고 욕심(慾心)이 없어 담담(淡淡)하여 인품이 높으셨다.
널리 배우고 익혔으며 기억력이 좋으셔서 인격과 재예(才藝)가 갖추어져 있어서 어떠한 방면에도 능(能)하셨다. 선비들은 서로 추대(推戴)하고 존중 하였고, 장차 큰 그릇이 될 것이라고 바래었는데 불행 하게도 세상과 때를 잘못 만나서 세상을 피(避)해서 궁(窮)한 생활로 평생을 마치셨으니 어찌 아깝고 아깝지 아니한가.
배위(配位)는 의흥 박씨(義興朴氏)요. 지홍(之鴻)의 따님이시고 묘(墓)는 공의 묘와 같은 자리에 있다.
공(公)은 자손이 없어 재사당공(再思堂公)의 넷째 아드님 발(渤)을 계자(系子)로 삼았고, 발(渤)은 뒤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追贈)되었다.
발(渤)이 2남 4녀를 두었으니, 장남(長男)은 경윤(憬胤)으로 증 이조판서(贈 吏曹判書)요. 차남(次男)은 신윤(愼胤)으로 참봉(參奉)이다. 장녀(長女)는 이인검(李仁儉)에게 출가(出嫁)했고, 차녀(次女)는 이형(李衡)에게 출가했고, 3녀(女)는 박계장(朴繼章)에게 출가해서 군수(郡守)요. 4녀(女)는 오사문(吳士文)에게 출가해서 현감(縣監)이다.
경윤(憬胤)이 6남 1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대수(大遂)로 군수(郡守)를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되었으며, 2남은 대건(大建)으로, 성균 진사(成均進士)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으며,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配享)되었고, 3남은 대적(大迪)으로, 생원(生員)이며, 4남은 대일(大逸)로, 진사(進士)며, 5남은 대괄(大适)로, 도승지(都承旨)에 증직(贈職)되었고, 6남은 대린(大遴)으로, 병절교위(秉節校尉)가 되었다. 여(女)는 박인걸(朴仁傑)에게 출가해서 주부(主簿)가 되었다.
신연(愼胤)은 2남을 두었으니, 장남은 대정(大頲)으로 참봉(參奉)이고, 차남(次男)은 대진(大進)이니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다. 현손(玄孫)은 곧, 대수(大遂)는 4남 2녀를 두었으니 통덕랑(通德郞 시진(時振)과 선무랑(宣務郞) 시연(時挻)과 찰방(察訪)에 증 사복시정(贈 司僕寺正)인 시원(時援)과 시강(時扛)을 두었고, 대건(大建)은 형제를 두었으니 형조판서(刑曹判書)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고, 충익(忠翼)이라 시호(諡號)를 받은 시발(時發)과 부사(府使)인 시득(時得)을 두었고, 대적(大迪)은 6남을 두었으니 시중(時中)과 홍적(弘績)에게 출계한 시행(時行)과, 시창(時昌)과 시흥(時興)과, 시광(時光)과 대일(大逸)에게 출계(出系)한 시망(時望)을 두었다.
대일(大逸)은 무후(無后)하여 시망(時望)을 들여 계후(系后)하였다. 대괄(大括)은 4남을 두었으니 시필(時弼). 시홍(時洪). 시원(時元). 시걸(時杰)이다. 대린(大遴)은 5남 1녀를 두었으니 시남(時南). 시만(時晩). 현감(縣監)인 시준(時浚). 시하(時夏). 시춘(時春)이다.
대정(大頲)은 첨추(僉樞)인 시보(時保)를 두었고, 대진(大進)은 시정(時正)을 두었다. 현손(玄孫) 이하는 여(女)는 생략했고, 7대손에 이르러서는 일괄(一括)해서 차례로 종손(宗孫)부터 이름과 관직(官職)만 적었다.
이는 각 문중을 망라(網羅)하기 위해서 부득이 기록 했고, 각각 그 생부(生父)를 적지 않았으니, 그것은 자수(字數)가 너무 많아지기 때문이었으니 착오(錯誤)없기를 바라오며, 양해(諒解)있기를 빈다. 다만 번역문에서는 7대손도 여(女)는 생략하고 계대(系代)를 밝혀 적었음을 첨언(添言)한다.
5대손은 시진(時振)이 무후(無后)하여 조카 영선(榮先)을 입계(入系)했고, 시정(時挺)은 3남 4녀를 두었으니, 회선(恢先)과 복선(腹先)과 시진(時振)에게 출계한 영선(榮先)이다.시원(時援)은 3남을 두었으니 무선(茂先)은 부사과(副司果)요. 태선(泰先)은 참의(參議)를 증직(贈職) 받았고, 경선(慶先)은 첨추(僉樞)이다. 시강(時扛)은 상정(尙正)을 두었다.
시발(時發)은 6남 5녀를 두었으니,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贈職) 받은 경연(慶衍)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시호(諡號)가 익헌(翼憲)인 경휘(慶徽)와, 좌의정(左議政)인 경억(慶億)과, 찰방(察訪)인 경충(慶忠)과, 현감(縣監)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된 경선(慶善)과, 군자감정(軍資監正)인 경종(慶從)이다.
시득(時得)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좌승지(左承旨)에 증직(贈職)된 경회(慶會)와 경복(慶復)이다. 시중(時中)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준선(遵先)과 장(璋)에게 출계(出系)한 후룡(後龍)과 부선(莩先)과 시망(時望)에게 출계한 흠선(欽先)이다.
시창(時昌)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헌선(憲先), 승선(承先), 광선(光先)이다. 시흥(時興)은 형제를 두었으니, 숭선(崇先), 준선(竣先)이다. 시광(時光)은 경성(慶聖)을 두고, 시망(時望)은 일녀(一女)를 두었으니 흠선(欽先)으로 계후(系后)하였다.
시필(時弼)은 경안(慶安)을 두었고, 시홍(時洪)은 경도(慶道)를 두었고, 시원(時元)은 형제를 두었으니 기선(基先)과 상선(像先)이다. 시걸(時杰)은 성선(盛先)을 두었다.
시남(時南)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수직(壽職) 동추(同樞)인 효선(孝先)과 생원(生員)인 각선(覺先)이다. 시만(時晩)은 경년(慶年)을 두었고, 시준(時浚)은 경우(慶佑)를 두었으니 동추(同樞)에 증직 되었다.
시하(時夏)는 경득(慶得)을 두었고, 시춘(時春)은 성균진사(成均進士) 경관(慶官)을 두었다. 시보(時保)는 감역(監役)인 도선(道先)을 두었고, 시정(時正)은 경선(慶先)을 두었다.
6대손인즉 영선(榮先)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인용((寅龍)과 인린(寅麟)과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인 인봉(寅鳳)과 인학(寅鶴)이다.회선(恢先)은 3남을 두었으니 인휘(寅輝)와 인원(寅元)과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인 인주(寅柱)이다.
복선(復先)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부사과(副司果) 인전(寅烇)과 인화(寅華)와 인방(寅芳)이다. 무선(茂先)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무과급제(武科及第)한 인기(寅麒)와 인붕(寅鵬)과 태선(泰先)에게 출계한 인기(寅夔)이다.
태선(泰先)은 무후(無后)하여, 인기(寅夔)를 입계(入系)했고, 경선(慶先)은 인열(寅烈)을 두고, 상정(尙正)은 춘흥(春興)을 두었다. 경연(慶衍)은 무후하여 인환(寅煥)으로 계후(系后)했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이 되었다.
경휘(慶徽)는 6남을 두었으니 인환(寅煥)은 경연(慶衍)에게 출계했고, 사복시정(司僕寺正)으로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配享)된 인혁(寅爀)과, 인욱(寅煜)과, 인찬(寅燦)과, 부사(府使) 인희(寅熺)와, 인식(寅烒)이다.
경억(慶億)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인소(寅熽)는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에 이조판서에 증직 되었고, 인병(寅炳)은 감사(監司)요. 인엽(寅燁)은 대제학(大提學)이다. 경충(慶忠)은 5남을 두었으니, 주부(主簿) 인영(寅榮)과, 무과급제 하고 참의를 증직 받은 인수(寅燧)와, 교위(校尉) 인광(寅 火+光)과, 인정(寅烶)과, 좌승지(左承旨) 인정(寅灯)이다.
경선(慶善)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진사(進士) 인섭(寅燮)과 진사((進士) 인형(寅炯)이다. 경종(慶)은 3남 1녀를 두었으니, 첨추(僉樞)에 증직된 인현(寅炫)과, 인봉(寅奉)과, 인창(寅昌)이다. 경회(慶會)는 4남을 두었으니, 인량(寅亮)과,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된 인형(寅馨)과, 사마(司馬)인 인빈(寅賓)과, 부사(府使)인 인정(寅貞)이다.
경복(慶復)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인원(寅元), 인화(寅華), 인방(寅芳)이다.
준선(遵先)은 3남을 두었으니, 인돈(寅燉), 인경(寅燝), 인온(寅熅)이다.
부선(孚先)은 인덕(寅德)을 두었고, 헌선(憲先)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정건(廷謇), 정흡(廷翕), 정하(廷夏), 정익(廷翊)이요.승선(承先)은 3남 4녀를 두었으니, 정찬(廷燦)과, 정욱(廷煜)과, 공조참의(工曹參議) 정량(廷良)이다.
광선(光先)은 6남을 두었으니 정설(廷卨), 인장(寅章), 정춘(廷春), 인순(寅純), 인방(寅邦), 인협(寅協)이다. 숭선(崇先)은 정휘(廷輝)를 두었고, 준선(竣先)은 정엽(廷燁)을 두었고, 경성(慶聖)은 인학(寅學)을 두었다.
흠선(欽先)은 무후하여, 인황(寅煌)으로 계후(系后)하여, 사복시정(司僕寺正)이 되었고, 경안(慶安)은 인기(寅起)를 두었고, 경도(慶道)는 인매(寅邁)를 두었고, 성선(盛先)은 인익(寅益)을 두었고, 효선(孝先)은 인희(寅爔)를 두었고, 각선(覺先)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인익(寅熤)과 인영(寅煐)이다.
경년(慶年)은 인건(寅健)을 두었고, 경우(慶佑)는 형제를 두었으니, 사과(司果)인 인필(寅弼)과 성균 생원(成均 生員) 인래(寅來)이다. 경득(慶得)은 인장(寅章)을 두었고, 경관(慶官)은 인현(寅炫)을 두었으니, 성균 생원 이다.
도선(道先)은 무후하여, 인급(寅火+及)을 입계(入系)했다. 경선(慶先)은 형제를 두었으니, 인택(寅澤)과 인준(寅俊)이다.
7대손인즉, 인용(寅龍)은 5남 3녀를 두고, 명조(鳴朝)를 계자(系子)로 들여 현감(縣監)이 되었고, 상조(相朝), 희조(熙朝), 태조(泰朝), 광조(光朝), 동조(東朝)이다.
인린(寅麟)은 남매(男妹)를 두었으니, 윤조(潤朝)다. 인봉(寅鳳)은 5남 1녀를 두었으니, 흥조(興朝)와 인용(寅龍)에게 출계한 명조(鳴朝)와, 태래(泰來)에게 출계한 채조(采朝)와 관조(觀朝)이다. 인학(寅鶴)은 전조(亶+飛, 朝)를 두었고, 인휘(寅輝)는 4남을 두었으니, 진곤(震坤)과 참봉(參奉)인 덕곤(德坤)과 참봉(參奉)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증직된 태곤(台坤)과 춘곤(春坤)이다.
인원(寅元)은 영조(英朝)를 두었고, 인주(寅柱)는 성곤(聖坤)을 두었고, 인전(寅烇)은 2남 4녀를 두었으니, 춘조(春朝)는 통덕랑(通德浪)이고, 그리고 하조(夏朝)이다. 인화(寅華)는 형제를 두었으니, 형조(亨朝)와 만징(萬澄)이다. 이방(寅芳)은 형제를 두었으니, 계조(啓朝)와 만옥(萬沃)이다.
인기(寅麒)은 무후하여 봉조(奉朝)를 계자 했다. 인붕(寅鵬)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창조(昌朝)와 성균생원 정조(挺朝)이다. 인기(寅夔)는 5남을 두었으니, 봉조(鳳朝)는 인기(寅麒)에게 출계했고, 도정(都正) 진조(晋朝)와 수직(壽職)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추(同樞)인 항조(恒朝)와 인협(寅協)에게 출계한 승조(升朝)와 희조(希朝)이다.
인열(寅烈)은 영곤(英坤)을 두었고, 춘흥(春興)은 태상(泰祥)을 두었다. 인환(寅煥)은 1남 5녀를 두었으나, 태곤(泰坤)을 입계하여, 경녕전(敬寧殿) 참봉(參奉)이 되었고, 대곤(岱坤)은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 되었다.
인혁(寅爀)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증직된 정곤(定坤)과 통덕랑(通德郞) 후곤(厚坤)과 인찬(寅燦)에게 출계한 제곤(濟坤)과 생원(生員)으로 참봉(參奉)을 지낸 철곤(徹坤)이다. 인욱(寅煜)은 1녀를 두고, 영곤(永坤)으로 계후(系后) 하였다. 인찬((寅燦)은 무후하여 제곤((濟坤)을 입계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 되었다.
인희(寅熺)는 4남 4녀를 두었으니, 지곤(至坤)과 인욱(寅煜)에게 출계한 영곤(永坤)과 첨추(僉樞) 현곤(顯坤)과 현감(縣監) 적곤(迪坤)이다. 인식(寅烒)은 5남 2녀를 두었으니, 부사(府使) 성곤(成坤)과 인환(寅煥)에게 출계한 태곤(泰坤)과 현감(縣監) 원곤(元坤)과 생원(生員) 진곤(震坤)과 춘곤(春坤)이다.
인소(寅熽)는 4남 1녀를 두었으니 감역(監役)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증직 받은 항곤(恒坤)과 돈녕부사(敦寧府事) 형곤(衡坤)과 감역(監役) 숭곤(崇坤)과 화곤(華坤)이다. 인병(寅炳)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를 지내고 감역(監役)을 한 서곤(瑞坤)과 운곤(運坤)이다.
인엽(寅燁)은 3남 3녀를 두었으니 생원장원(生員壯元)을 한 하곤(夏坤)과 한곤(漢坤)과 도정(都正)명곤(明坤)이다.
인영(寅榮)은 4남 3녀를 두었으니 상곤(相坤), 익곤(益坤), 흥곤(興坤), 득곤(得坤)이다. 인수(寅燧)는 6남 3녀를 두었으니, 명곤(命坤)과 응곤(應坤)과, 중곤(重坤)과 식곤(植坤)과 택곤(澤坤)과 인광(寅 火+光)에게 출계한 덕곤(德坤)이다.
인광(寅 火+光)은 2남 1녀를 두었으나 덕곤(德坤)으로 후계했고, 선곤(宣坤)과 학곤(學坤)이다. 인정(寅烶)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동곤(東坤)이다. 인정(寅灯)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인곤(寅坤)을 두었고, 인섭(寅燮)은 형제를 두었으니 유곤(維坤), 위곤(緯坤)이다.
인형(寅炯)은 4남 2녀를 두었으니, 진곤(振坤), 진곤(鎭坤), 윤곤(潤坤), 준곤(峻坤)이다. 인현(寅炫)은 형제를 두었으니, 일곤(一坤)과 오곤(五坤)이다. 인봉(寅奉)은 승곤(承坤)을 두었고, 인창(寅昌)은 3남을 두었으니, 수곤(壽坤)과 진곤(進坤)과, 교위(校尉)로 훈련원(訓鍊院) 판관(判官)인 중곤(重坤)이다.
인형(寅亮)은 2남 5녀를 두었으니, 창곤(昌坤)과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된 단곤(湍坤)이다. 인형(寅馨)은 5남 1녀를 두었으니 재곤(載坤)과 병사(兵使)를 지내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된 순곤(順坤)과 행곤(行坤)과 유곤(囿坤)과 호조참의(戶曹參議)에 증직된 수곤(秀坤)이다.
인빈(寅賓)은 6남 3녀를 두었으니, 민곤(敏坤)과 형곤(亨坤)과 수곤(守坤)과 신곤(信坤)과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증직된 존곤(存坤)과 춘곤(春坤)이다. 인정(寅貞)은 좌승지(左承旨)에 증직된 순곤(淳坤)을 두었다. 인원(寅元)은 종곤(種坤)을 두었고, 인화(寅華)는 영곤(榮坤)을 두었고, 인방(寅芳)은 형제를 두었으니 무곤(茂坤)과 만곤(滿坤)이다.
인돈(寅燉)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식곤(植坤)과 신곤(新坤)이다. 인경(寅 火+京)은 원조(元朝)를 두었고, 인온(寅熅)은 2남 3녀를 두었으니 태조(泰朝)와 익조(翊朝)이다. 인덕(寅德)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협곤(協坤)과 진곤(進坤)이다. 정건(廷謇)은 2남 1녀를 두었으니, 참판(參判)에 증직된 택곤(宅坤)과 선곤(宣坤)이다.
정하(廷夏)는 2남 3녀를 두었으니, 법곤(法坤)과 천곤(千坤)이다. 정익(廷翊)은 2남 2녀를 두었으니, 유곤(裕坤)과 시곤(始坤)이다. 정찬(廷燦)은 형제를 두었으니, 상곤(尙坤)과 차곤(次坤)이다. 정욱(廷煜)은 남매(男妹)를 두었으니, 익곤(益坤)이고, 정량(廷良)은 1남을 두었으니, 주곤(周坤)으로 계후했고, 무곤(武坤)은 참봉(參奉)을 지냈다.
정설(廷卨)은 남매를 두었으니 참봉(參奉) 철곤(哲坤)이다. 인장(寅章)은 형제를 두었으니, 춘곤(春坤)과 추곤(秋坤)이다. 정춘(廷春)은 2남을 두었으니, 현용(現龍)과 채조(彩朝)이다. 인순(寅純)은 남매를 두었으니, 첨추(僉樞) 두곤(斗坤)이다.
인방(寅邦)은 형제를 두었으니, 흥곤(興坤)과 승곤(承坤)이다. 인협(寅協)은 2남 4녀를 두었으니, 승조(升朝)로 계후하고, 해조(海朝)와 한조(漢朝)이다. 정휘(廷輝)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태곤(台坤)과 추곤(樞坤)이다. 정엽(廷燁)은 4남을 두었으니, 현곤(顯坤), 인곤(仁坤), 운곤(運坤), 필곤(苾坤)이다.
인학(寅學)은 진곤(鎭坤)을 두었고, 인황(寅煌)은 4남 1녀를 두었으니, 수곤(秀坤), 창곤(昌坤), 득곤(得坤), 갑곤(甲坤)이다. 인기(寅起)는 인곤(寅坤)을 두었고, 인매(寅邁)는 유곤(有坤)을 두었고, 인마(寅麻)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한조(漢朝)와 정조(庭朝)이다.
인달(寅達)은 영조(永朝)를 두었고, 인익(寅益)은 세곤(世坤)을 두었고, 인희(寅爔)는 형제를 두었으니, 기곤(起坤)과 진곤(晋坤)이다. 인익(寅熤)은 형제를 두었으니, 부사(府使) 장곤(長坤)과 정곤(正坤)이다.
인영(寅煐)은 형곤(亨坤)을 두었고, 인건(寅健)은 유곤(裕坤)을 두었고, 인필(寅弼)은 춘곤(春坤)을 두었고, 인래(寅來)는 참곤(參坤)을 두었고, 인장(寅章)은 형제를 두었으니, 선곤(先坤)과 기곤(祺坤)이다.
인현(寅炫)은 세곤(世坤)을 두었고, 인급(寅 火+及)은 3남 2녀를 두었으니, 민곤(敏坤)과 통덕랑(通德郞) 세곤(世坤)과 팔곤(八坤)이다. 인택(寅澤)은 성곤(聖坤)을 두었고, 인준(寅俊)은 선곤(宣坤)을 두었다. 그 나머지는 이루 다 기록(記錄) 할 수가 없다.
아아!
용우(龍雨) 또한 공(公)의 친(親) 아우이신 한당공(閑堂公)의 후손으로 남다른 정의(情誼)가 있음으로서 외람되고, 욕되게도 글을 쓰게되어 이로하여 마음이 울적함을 금(禁)할 수가 없었다.
공(公)이 사시던 세상은 오래되고, 깊이 잠겨 갔기에 그 아름다운 말씀과 자세한 행적(行蹟)이 전(傳)해짐이 없고, 나시고 궂기신 연월일(年月日) 같은 것에 이르기 까지 족보(族譜)에도 없고, 그러한 것들은 기록(記錄)한 글들을 전(傳)해오지 못하였기에 증거 할 도리가 없다.
참으로 탄식(歎息)하고, 아쉬워 할 일이다. 공(公)이 가신 뒤로, 세대가(世代)가 바뀜이 그리 오래 되고, 멀지 않은 데도 자손(子孫)이 번성(蕃盛)하고, 널리 퍼져서 그 아름답고, 빛남을 일일이 헤아릴 수가 없고, 이름난 재상(宰相)과 높은 관원(官員)들이 수없이 많이 나와서 서로 바라보고 있으니, 공(公)이 끼치고 가신 은혜는 영원(永遠)히 끊기지 아니함을 넉넉히 알 것이다. 이어서 명(銘)하노니,
높은 벼슬살이 하는 집안으로,
충성(忠誠)과 효도(孝道)가 극진한 집이라 이름 높았네.
때를 만남이 불행(不幸)하여,
자취를 감추고, 이름을 숨기었건만,
이 골(洞)은 즐거움이 그치지 아니 하는 곳.
길하고 상서(祥瑞)로운 별이 항상 비추거니,
뉘라 멈추고서 공경하고, 우러러 보지 않으리.
묘(墓)앞에 우뚝 선 비석(碑石).
1981년 음 10월 1일 수립(竪立)
방 예손(傍 裔孫) 용우(龍雨) 찬(撰)
의령후인(宜寧後人) 남충현(南忠鉉) 서(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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