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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흔적 간직한 ‘경북 고령’

야촌(1) 2011. 4. 19. 00:10

대가야의 흔적 간직한 ‘경북 고령’

봉긋 솟은 왕릉 그 속에 숨쉬는 1500년 역사

경향신문 | 고령 | 글·사진 최병준 기자 | 입력 2010.03.23 17:40

 

'사백년 동안, 왕들의 상여는 능선 위로 올라갔다. 능선 아래쪽으로 산은 깨끗이 벌목되었다. 무덤들이 늘어선 능선은 마을 어디에서나 뚜렷이 보였다. 왕들의 무덤은 우뚝하게 두드러져서 하늘 아래에 닿았다. (중략) 왕들은 죽어서 하늘 가까운 산 위에 묻혔지만, 왕들의 내세는 여전히 능선 아래의 들판인 듯 싶었다.'(김훈의 < 현의 노래 > )

 

 

 

김훈의 묘사는 정확했다. 15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고령 읍내 산 아래서 왕릉은 마치 이정표처럼 잘 보였다.

신라의 왕릉도, 조선의 왕릉도 산 위로 올라간 적이 없는데 가야의 왕릉은 유독 산에 있다.

 

하기야 볕 좋은 들녘에 있었다면 이미 불도저가 밀어버리고 신도시가 세워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문화유산해설사 이용호씨는 "현세가 내세로 이어진다는 계세 사상 때문에 그렇다"고 했다. "무덤을 높은 곳에 써서 왕의 힘을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스스로도 자신의 땅을 굽어보고 싶어서"란다.

경북 고령은 가야왕국 중 가장 강대했던 대가야가 번성했던 땅이다. 하지만 가야라는 나라는 사람들의 머릿속에 또렷하지 않다. 사료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AD 42년부터 562년까지 520년 동안 존속했던 대가야의 경우 사서에 등장하는 왕의 이름도 겨우 5명뿐이니 일반인들이 역사를 제대로 알 리 없다.

 

성산가야(성주), 금관가야(김해), 소가야(고성),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합천) 등 6가야의 이름을 다 아는 사람도 드물다. 그래서 가야는 우리에게 '희미하다'.

가야가 남긴 것은 능과 소리(가야금)뿐이다. 건축물도 사원도 탑도 없다. 이집트 왕가의 계곡처럼 고령의 주산 주변에 수많은 능이 있다. 현재 확인된 것만 176개. 군청에서는 200개 정도라고 하고, 문화유산해설사 이씨는 재조사를 하면 400개 정도는 될 것으로 봤다. 능선 위에 능들이 봉곳하게 올려져 있는데, 산책로는 능과 능 사이로 놓여 있다.

대체 능의 주인은 누굴까. 왕인지, 고관대작인지 알려진 것은 없다. 고분군이 다 왕릉은 아니다. 이 많은 능 중 발굴조사를 마친 능은 지금까지 딱 10개뿐. 출토유물을 보고 왕인지, 고관대작인지 추정만 할 뿐이다. 고분군으로 이어지는 입구에 44호 고분의 내부를 복원해놓은 박물관이 있다.

 

1970년대 발굴된 이 고분은 당시 40개의 무덤이 있었고 유골은 22구가 발굴됐다. 특이한 것은 30대 남녀가 머리와 발을 포갠 채 묻힌 곳도 있고, 30대 남자와 8세 여자아이가 묻힌 무덤도 있다. 사학자들은 이를 순장의 증거로 생각한다. 공동묘지라면 묻힌 순서에 따라 흙의 층이 다를 텐데 조사 결과 한날한시에 묻힌 것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소설 < 현의 노래 > 의 첫부분에는 가야의 순장 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순장자들은 왕보다 먼저 각자의 구덩이 속에 누워 왕의 하관을 맞았다. 늙은 부부가 머리와 다리를 거꾸로 포개고 한 구덩이 속에 누웠고 젊은 부부는 아이를 사이에 끼고 모로 누워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아낙이 허연 젖을 들어내고 젖꼭지를 물려 우는 아이의 입을 막았다. 처녀는 긴 타래 머리 두 가닥을 가슴위로 가지런히 하고 누워서 숨을 골랐다.'

당시만 해도 순장은 풍습이었다. 신라 지증왕 때인 502년 남녀 5명씩 순장했던 풍습을 폐지하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발굴 결과 30호와 32호 고분에서는 금동관이 나왔다. 해서 역사학자들이 추측하기를 가야도 부족국가의 수준을 넘은 왕권국가일 것으로 여긴다.

 

1500년 전은 칼과 창의 시대다. 왕과 제후의 힘은 철에서 나왔다. 가야는 바로 그 철기문화가 꽃피던 곳이다. 대표적인 가야의 유물은 철갑옷이다. 철판을 통째로 붙여 만든 보병의 갑옷과 비늘처럼 붙여 만든 기병의 갑옷 두 종류다. 쇠를 달궈 벼리던 야철장은 합천 외에 고령 미숭산과 합천 야로면에도 있다. 김훈의 소설에선 대장장이 이름이 야로다.

능 사이로 놓인 길은 걷기 참 좋다. 데이트 온 연인들도 보인다. 과거 죽음의 땅이었을 테고, 신성한 궁전 같은 곳이었던 주산의 고분군은 이제 마을 주민에겐 산책로로 변했다. 고분군에서는 고령 읍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200기 가까운 왕릉 사잇길을 둘러보는 데는 두 시간이 걸린단다. 주변에 벤치도 놓여 있어서 마실 삼아 오는 사람들이 있다.

쇠로 일어선 가야는 562년 신라 진흥왕의 칼에 무너졌다. 가실왕의 명령으로 530~540년 가야금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우륵도 551~554년 신라에 망명했다. 신라는 가야의 소리까지 차지한 셈이다.

기자가 찾은 날은 고령 장날이었다. 장터 한가운데 대장간이 있었다. 45년 동안 쇠를 벼려왔다는 이상철씨(67)는 "배우러 왔다가 힘들어서 모두 떠나버려 직장생활하는 아들을 데려왔다"고 했다. 그에겐 소설 속 대장장이 야로처럼 쇠냄새가 배어 있었다. 하지만 그의 대장간은 공장에서 척척 찍어내놓는 중국산에 밀릴지도 모른다.

 

장터를 빠져나오니 마을 뒷산 가야릉이 또렷하게 나타났다. 고령 사람들은 뒷산에 상투 같은 능을 이고 1500년이나 살아왔다. 역사는 희미해도 거긴 가야가 실재하고 있다.

여행길잡이

*중부내륙고속도로 고령IC에서 빠진다. 고령 읍내에서 가야 고분군이 보인다. 대가야 박물관(054-950-6066) 옆에 고분군으로 올라가는 산책로가 있다. *대가야 축제가 4월8일부터 11일까지 4일 동안 열린다. 축제 기간에는 KTX 동대구역에서 고령을 잇는 셔틀버스가 운행된다. 대가야체험축제추진위(fest.daegaya.net 054-950-6424)

*대가야박물관 앞 대가야역사테마파크(054-950-6704) 내에 통나무집을 새로 열었다. 10동이며 4인실은 4만원, 6인실은 6만원이다. 예약 홈페이지는 제작 중이며 축제 기간의 예약은 모두 끝났다고 한다.

*개실마을(www.gaesil.net 054-956-4022)은 문충공 김종직의 후손들이 모여 사는 선산 김씨 집성촌. 도승지 한성부윤 형조판서를 지냈으나 그가 지은 조의제문이 연산군 때 무오사화를 일으킨 원인이 됐다. 종택과 함께 한옥집들이 민박을 한다. 엿 만들기 체험, 딸기 체험 등을 해볼 수 있다. 20가구 한옥 민박( 5만원).

*고령 5일장(4·9장)도 볼 만하다. 대형 할인매장이 없고 큰 슈퍼마켓만 3개뿐인 고령장터엔 난전을 포함, 600~700개나 되는 상가가 들어선다. 오골계, 구지뽕, 개장수,약초, 양은냄비, 뻥튀기…. 별별 걸 다 판다.

< 고령 | 글·사진 최병준 기자 bj@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