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世 이무실(李茂實)
[세 계] 소경공파로 28世 논복(論福)공의 현손임.
[생졸년] 1683년(숙종 9)~1736년(영조 12) /향년 53세
[세계] 경주이씨 소경공의 후손인 28世 논복(論福)공의 현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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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의 사람으로, 초명(初名)은 계실(啓實), 자(字)는 문삼(文三), 본관(貫)은 경주(慶州)이다.
공(公)은 휘(諱) 논복(論福)공의 현손(玄孫)으로 아버지는 자헌대부(資憲大夫/正二品) 이인생[李仁生,1658년(효종 9)~1733년(영조 9)]이고, 어머니는 현풍 곽씨(玄風郭氏) 선기(善基)의 딸이다.
배(配)는 남평문씨(南平文氏) 진장(震章)의 딸이고, 계배(繼配)는 김해김씨(金海金氏)이며, 장자(長子)에 통덕랑(通德郞-正五品) 국찬(國燦)과 차(次)에 송찬(松燦)을 두었다.
그는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배 채 못(배자 못) 부근에 살던 장수 한 사람이 역모의 야심을 품고 사람을 모으고 병기를 준비하여 관아가 있는 대구를 치기 위하여 진격하였는데, 반란군이 이 고개 마루에 다 달았을 때 관군이 벌써 진을 치고 있어 한바탕 격전이 벌어졌는데, 반란군이 전멸 당했다고 한다.
그 후부터 그 곳을 작살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18세기 초 이 난을 막다가 전사한 이무실(李茂實) 공에게 이 난을 토벌한 공로로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으로 녹선 되고, 가선대부(嘉善大-從二品)에 올랐다.
아울러 바로 이 곳 산 언덕에 그의 유해를 묻었는데 현인(賢人)을 묻었다 하여 복현(伏賢)이란 지금의 동명이 붙여졌다고 전해온다. 복현동에는 무실공의 제실과 비각이 있었는데 현재는 모두 서변동으로 이전되었다. 대구 민충사(大邱 愍忠祠)에 배향 되였다.
[참고자료]
● 이무실의 천자문 목각필첩
千字文(國文訓音)(奎11944)-李茂實(朝鮮)書.
1冊(32張) 木板本 30.8×25cm. 4行 1行 4字.
양대 주흥사((梁代 周興嗣)의 《천자문(千字文)》을 월성후인(月城后人) 이무실(李茂實)이 1735년(英祖 11)
에 쓴 글씨로, 목각(木刻)하여 출판(出版)한 필첩(筆帖)이다.
이 책은 초간본(初刊本)이 아니고 필자(筆者)의 5代孫 동진(東珍)이 1894년(高宗 31)이 네 번째 간행한 것이
다. 이러한 기록과 함께 책 끝의 간기에 의하면 즉 이 책은 1830년에 重刊되고 1857년에 三刊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이책에 있는 훈(訓)과 음(音)은 초간(初刊) 당시의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글씨 교범(敎範)일 뿐 아
니라, 국어사(國語史) 자료로서 가치를 갖고 있다.
● 대구 복현동(伏賢洞) 지명유례
①후백제 견훤이 신라에 침입하여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세워 신라의 왕으로 삼고 돌아가는 길에 군사를 이곳
에 매복시켰다가 추격해 오는 고려 왕건의 군대를 맞아 금호강을 사이에 두고 싸워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이
곳은 권훤념 또는 복현암, 복현리라 불리었다고 한다.
②복현동 60번지와 94∼1, 2번지 야산에는 경주이씨 논복공(論福公) 문중의 묘지가 있었는데 이 묘지는 7대조의
무실공(茂實公)이 영조 4년(1728) 이무실(李茂實) 공이 분무일등공신(奮武一等功臣)에 봉해지면서 영조가
하사한 땅으로 '엎드려 (복=伏) 현모한다(賢慕)'는 뜻으로 이곳의 지명을 복현동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글 :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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