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상화(李相和) - 민족시인

야촌(1) 2011. 3. 13. 13:14

■ 39世 이상화(李相和)

 

[생졸년] 1901년(고종 5)∼1943년.

[세계도] 경주이씨 익재공후→21世 소경공→28世 논복공(論福公)→32世 무실(茂實)공의 7대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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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상화(李相和)의 본관은 경주(慶州)로. 호는 무량(無量)· 상화(尙火, 想華)· 백아(白啞). 1901년 5월 9일(음력 4월 5일) 대구부 본정 2정목 12번지, 지금의 주소로는 대구광역시 중구 서문로 2가 12번지에서 아버지 우남(又南) 이시우(李時雨)와 모친 김신자(金愼子-김해김씨)의 4형제중 둘째 아들로 출생했다.

 

조부 이동진(李東珍)은 구한말 무일푼에서, 시작하여 서문시장의 시전(일종의 돈놀이)과 낙동강 무역을 통해 삼천석의 거부가된 인물이었다. 7세때 아버지를 잃고, 14세까지 가정 사숙에서 큰아버지 소남(小南) 일우(一雨)의 훈도를 받으며 수학하였다.

 

18세에 경성중앙학교(지금의 중동중학교)3년을 수료하고 강원도 금강산일대를 방랑하였다.

1922년 파리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의 아테네프랑세에서 2년간 프랑스어와 프랑스문학을 공부하다가 동경대지진을 겪고 귀국하였다.

 

친구 백기만(白基萬)의 《상화(尙火)와 고월(古月)》에 의하면, 1917년 대구에서 현진건(玄鎭健)·백기만·이상백(李相栢)과 《거화 炬火》를 프린트판으로 내면서 시작활동(詩作活動)을 하였다. 21세에는 현진건의 소개로 박종화(朴鍾和)를 만나 홍사용(洪思容)·나도향(羅稻香)·박영희(朴英熙) 등과 함께 《백조 白潮》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 때에는 백기만 등과 함께 대구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또한, 김기진(金基鎭) 등과 함께 1925년 파스큘라(Paskyula)라는 문학연구단체 조직에 가담하였으며, 그해 8월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의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27년에는 의열단(義烈團) 이종암(李鍾巖)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하였다가 1년 만에 실패하였다.

 

1937년 3월에는 장군인 형 이상정(李相定)을 만나러 만경(滿京)에 3개월간 갔다와서 일본관헌에게 구금되었다가 11월말경 석방되었다. 그뒤 3년간 대구 교남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권투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그의 나이 40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여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시정석〉 등을 시도하였으나 완성을 보지 못하고 43세에 위암으로 죽었다. 문단데뷔는 《백조》 동인으로서 그 창간호에 발표한 〈말세의 희탄(欷嘆)〉(1922)·〈단조 單調〉(1922)를 비롯하여 〈가을의 풍경〉(1922)·〈이중(二重)의 사망〉(1923)·〈나의 침실로〉1923)로써 이름을 떨쳤다.

 

특히, 〈나의 침실로〉는 1920년대 초기의 온갖 주제가 한데 결합한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어떠한 외적 금제로도 다스려질수 없는 생명의 강렬한 욕망과 호흡이 있고, 복합적인 인습에의 공공연한 반역·도전이 있으며, 이 모두를 포용하는 낭만적 도주의 상징이자 죽음의 다른 표현인 ‘침실’이 등장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 〈몽환병 夢幻病〉(개벽, 1925)·〈비음 緋音〉(개벽, 1925)·〈이별(離別)을 하느니〉(조선문단, 1925) 등이 있다. 이와는 달리 경향파적 양상을 드러내는 작품들로는 〈가상〉·〈구루마꾼〉·〈엿장사〉·〈거러지〉(이상은 개벽, 1925)가 있고,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개벽, 1926)의 사회참여적인 색조로 원숙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개벽》지 폐간의 계기가 된 작품인만큼 치열한 반골기질의 표현으로 주목된다.

 

이 계열의 작품으로는 〈조소 嘲笑〉(개벽, 1925)·〈통곡 慟哭〉(개벽, 1926)·〈도―쿄에서〉(문예운동, 1926)·〈파―란비〉〈신여성, 1926〉·〈선구자(先驅者)의 노래〉(개벽, 1925)·〈조선병 朝鮮病〉(개벽, 1926)·〈비갠 아침〉(개벽, 1926)·〈저므는놀안에서〉(조선문예, 1928)가 있다. 그의 후기 작품경향은 철저한 회의와 좌절의 경향을 보여주는데 그 대표적 작품으로는 〈역천 逆天〉(시원, 1935)·〈서러운해조〉(문장, 1941) 등이 있다.

 

발굴된 작품으로는 《상화와 고월》에 수록된 16편을 비롯하여 58편이다. 문학사적으로 평가하면, 어떤 외부적 금제로도 억누를 수 없는 개인의 존엄성과 자연적 충동(情)의 가치를 역설한 이광수(李光洙)의 논리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백조파’ 동인의 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은 시인으로, 방자한 낭만과 미숙성과 사회개혁과 일제에의 저항과 우월감에 가득한 계몽주의와 로맨틱한 혁명사상을 노래하고, 쓰고, 외쳤던 문학사적 의의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비는 1946년 동향인 김소운(金素雲)의 발의로 대구 달성공원에 세워졌다.

그의 묘지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 산 13-1 이다.

 

[참고문헌]

◇ 韓國近代詩人硏究(金㶅東, 一潮閣, 1974)

◇ 文學과 歷史的 人間(金興圭, 창작과 비평사, 1980)

◇ 李相和詩의 硏究史的 檢討(崔東鎬, 이상화연구, 새문社, 1981)

◇現代韓國의 浪漫主義詩에 관한 硏究(金容稷, 서울大學校論文集 14, 1968)

◇ 파토스와 저항(金埈五, 식민지시대의 시인연구, 시인사

 

 

▲ 좌로부터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1894년. 8. 9 서울~1963년. 6. 3. 서울]

◇무량(無量) 이상화[李相和-1901년. 4. 5 대구∼1943년. 4. 25 .서울]

◇ 백파(白派) 조석기[趙碩基·1899년 12 .9~1976년.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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