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선조유적. 유물

충무공 이수일 장군 - 경주이씨국당공파

야촌(1) 2011. 3. 6. 17:32

충무공 이수일 장군

 

↑충무공 이수일 장군 영정(忠武公 李守一將軍 影幀  : 1554~1632)


 [시도유형문화재] 제178호
 [명 칭] 이수일진무공신록권및영정(李守一振武功臣錄券 및 影幀)
 [지정일] 1995.06.30
 [소재지] 충북 충주시 가금면 탑평리 47-5
 [소유자] 경주이씨국당공파
-------------------------------------------------------------------------------------------------------------------------------------

공신녹권이란 나라에서 공이 있는 신하에게 공신으로 임명할 때 내리는 임명서를 말한다. 이 녹권은 조선 인조 때의 무신 이수일(1554∼1632)에게 내려진 것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로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진무공신 2등 계림부원군에 봉해질 때에 내린 것이다.

이수일은 조선중기의 무신으로 1583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선전관 등의 벼슬을 거쳤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1624년 이괄의 난 때에는 반란군을 무찌르고 서울을 되찾은 공으로 군에 봉해졌다.

이수일의 영정은 전신상과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은 상, 정면상 3점으로, 전신상은 구름무늬가 그려진 흑 녹색관복에 마치 1장의 천으로 마름질하여 붙여 놓은듯하여 흉배무늬는 해태상 주위에 모란이 장식되어 있고, 두 손을 모아 마주잡은 자세의 전신교의 좌상을 갖추고 있다.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앉은상은 붉은 채색으로 엷게 그려진 얼굴과 주름 선은 전신상의 선들과 일치해 종이를 대고 베낀 것같이 보이지만 수염이나, 귀, 관모표현이 미흡하고 간략히 윤곽을 그린 후 채색하였다.

이 영정의 표현은 17세기 초의 특징을 고루 표현한 것으로 보여 진 것이다. 

 

   

↑충무공 이수일 장군 묘소(忠武公 李守一將軍 墓所) 

 

[시도기념물] 제21호
[명 칭] 충무공 이수일 장군 묘소(忠武公 李守一 將軍 墓所)
[지정일] 1978.02.22
[소재지] 충북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202-1
-------------------------------------------------------------------------------------------------------------------------------------

조선 중기의 무신인 은암(隱庵) 이수일(1554∼1632)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16년(1583)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의 벼슬을 거쳐 선전관이 되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장기현감으로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밀양목사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맡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성주목사로서 왜적을 격퇴하였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겸 부원수가 되어 반란군을 대파하였다.


충청북도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에 위치한 그의 묘는 부인 전주 이씨와 합장한 것으로 화강암으로 봉분의 아래 부분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동자석 한쌍이 있고, 오른쪽에는 김집이 글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쓴 묘비가 세워져 있다.


묘소의 아래쪽에는 현종 8년(1667)에 대리석으로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근처 길가에 세운 비)가 있으며, 50m 떨어진 곳에는 사당(祠堂)이 있다.  

 

  

 

↑충무공 이수일 신도비(忠武公 李守一 神道碑)

 

[시도유형문화재] 제205호
[명 칭] 충무공이수일신도비(忠武公李守一神道碑)
[지정일] 2001.03.30
[소재지] 충북 충주시 금가면 오석리 산202-1 
[시 대] 조선 현종

------------------------------------------------------------- 

조선 중기의 무신 이수일(1554∼1632) 장군의 업적을 기리는 신도비로, 신도비는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碑)를 말한다.


이수일(1554∼1632)의 호는 은암(隱庵)이며, 선조 16년(1583)에 무과에 급제한 후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큰 공을 세웠다. 그 후 밀양부사와 경상좌도 수군절도사를 맡았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왜적 격퇴에 공을 세워 가선대부에 올랐다.

 

인조 2년(1624) 이괄의 난이 일어났을 때에는 반란군을 크게 무찔러 이겨 서울을 수복한 공으로 진무공신 2등에 계림부원군에 봉해진 뒤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이 비는 받침과 머릿돌은 화강암으로 만들고 몸체는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받침은 웅장하고 추상적인 형태로 거북 모양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4,100여 자의 글자를 새긴 비를 만들어 올렸다. 머릿돌의 앞뒷면에는 각각 2마리의 용을 섬세하게 조각하여 새겼다. 비의 크기는 전체 높이가 420㎝, 비신높이 243㎝, 비의 폭 97㎝, 비의 두께 27㎝이다.


조선 현종 8년(1667)에 세운 이 비는 이경여가 글을 짓고 김좌명이 글씨를 썼으며, 김수항이 비문을 새겼다. 웅장하고 섬세한 조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거북 받침돌의 형태가 미술사적 자료와 학술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비의 주변에는 이수일의 묘(충청북도 시도 기념물 제21호)와 사당인 충훈사(忠勳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