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김해규의 지명이야기
[321호] 2006년 05월 03일 (수) 00:00:00 / 평택시민신문 webmaster@pttimes.com
진위면 가곡리-1
‘가오실’이 ‘가야실’로 변음 되었다가 나중에는 개실이라는 사투리로 씌여
가곡리 가야실 일 때는 백사 이항복의 사패지였다.
‘경주이씨천’이라고 쓰여진 표석이 이를 증명한다.
가야실은 본래 안동권씨의 터였으나 4백년 동안 관료를 배출하지 못해 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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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은 보리바람이 부는 계절
●가곡리 가야실
5월은 보리이삭이 패는 계절이다. 우리 조상들은 보리 고개의 배고픔을 청보리를 보며, 견뎠다. 때로는 배고픔의 한이 사무치게 밀려올 때는 여물지도 않은 청 보리를 흩어 죽을 끊였다. 남의 논을 부쳐 먹는 사람도 보리농사만큼은 소작료를 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리는 민중들의 곡식이었다. 배고픔을 잊게 하는 희망이었다. 하지만 요즘 5월의 들녘 어디에도 청 보리밭이 없다. 간혹 있다고 해도 한두 마지기가 고작이고, 오성면 농업기술센터와 팽성읍 본정리에는 관상용으로 심어 놓기까지 하였다.
보리가 우리 식탁에서 멀어진 것은 그만큼 살기가 나아졌다는 증거일 것이다. 더구나 수입 밀가루로 만든 피자와 칼국수, 라면과 자장면을 주식에 버금갈 만큼 잘 먹는 현실은 보리농사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도일동을 지나 은산리를 지는데 논에서는 못자리와 논갈이가 한창이다. 못자리는 노인층의 일이라면 트랙터로 논갈이를 하는 일은 비교적 젊은 층의 일이다. 길을 달리다 일하는 모습이 이채로워 논 옆에 차를 세웠다. 논두렁에서 못자리를 손보던 윤여행(65)씨는 카메라를 들이대는 낮선 불청객을 위해 자연스런 포즈를 취해주었다.
지나가는 말로 올해 농사 근황을 물었더니 땅이 꺼져라 긴 한숨부터 내쉬었다. 쌀 수입개방으로 쌀값은 떨어지는데 농기계 사용료와 인건비는 날로 높아만 가는 바람에 도무지 해 먹을 수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농사를 때려 치자니 할 줄 아는 게 없고 나이까지 먹어서 공장에서는 받아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다행히 자식들은 잘 커서 도시로 나간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인데 답답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돌렸다.
■ 가 오실일까 개실일까?
지난 주 화요일 ‘지명이야기’ 독자인 이창우(82) 옹에게서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삼년 전에도 통화를 한 적이 있었던 이 분은 지난 번 마산리 기사에 대하여 몇 가지 지적을 하였다. 그 가운데 경주 이씨와 관련된 내용이 눈길을 끌었는데 가곡 리 와 동천 리 에 대한 것은 매우 흥미로웠다.
이 분에 따르면 진위면(振威面) 일대에 흩어져 있는 경주이씨(慶州李氏)는 판관공파가 아니라 상서공파(尙書公派)라고 바로잡았다. 상서공파(尙書公派)는 동천리에 세조(世祖)와 동서관계였던 이연손(李延孫)의 후손들을 남겨 놓았고, 마산리 숲 안 말과 가곡 리 일대에는 이성무의 후손들을 남겨 놓았다고 하였다.
특히 안동 판관(安東判官)을 지낸 성무(成茂)는 네 아들을 두었는데, 세째 아들 찬성공(贊成公) 예신(禮臣)에게서 선조때 유명했던 정승(政丞)으로 그의 손자(孫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배출하였고 현손인 좌수운판관(左水運判官-從五品)을 지낸 이정좌(李鼎佐)와 5대손 좌의정(左議政) 이경일(李敬一) 순조 때 이조판서(吏曹判書-正二品)를 지낸 이계조(李啓朝-恒福의 8대손), 그리고 일제강점기 만주에 신흥무관학교와 경학사를 세워 만주무장독립투쟁의 빛나는 전통을 세운 이회영(李會榮)과 그의 동생으로 상해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해방 후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李始榮), 김대중 정부에서 국정원장을 지낸 이종찬(李鍾贊)등 걸출한 인물들을 줄줄이 배출했다.
이창우 옹은 가곡1, 2리 가야실 일대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의 사패지(賜牌地-임금이 내려준 전답)였다고 말했다. 이곳이 경주 이씨의 사패지였음은 개실정미소 옆에 있는 ‘경주이씨 천’이라고 쓰여진 표석으로도 증명된다고 하였다. 개실이 경주 이씨의 사패지였을 때 가야실은 ‘가오실(嘉梧室)로 불렸다고 한다.
실례로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이 ‘가오실(嘉梧室) 정승’이라고 불렸던 것도 이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다가 후대로 오면서 가오실이 ‘가야실’로 변음되었고 나중에는 ‘개실’이라는 사투리로까지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가곡리 답사는 이창우 옹의 주장에 대한 확인작업에서 출발하였다. 조사결과 가야실에는 경주 이씨가 한 집도 남아 있지 않다. 사패지로 받았다는 광활한 땅도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그것을 이창우 옹은 경술국치 직전 신민회 회원이었던 이회영씨와 형제들이 남만주 삼원보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면서 가야실 땅을 산을 관리하던 고(高)씨네에게 오만 냥에 팔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개실 방앗간 옆에 있었다는 표석도 방앗간과 그 옆의 구멍가게까지 없어진 지금까지 제자리에 있었다.
더구나 신 가곡에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광좌와 인척관계였던 이정좌의 묘와 신도비, 순조와 헌종 때 판서를 지낸 이계조의 묘와 묘표, 이들을 제사하는 재실이 남아 있어 더욱 신뢰를 갖게 하였다.
더구나 가야실과 이웃한 아곡마을 주변에는 아직도 경주 이 씨의 땅들이 남아 있고 조선 후기 송시열의 문인이었던 이세필이 처음 낙향한 곳도 봉남 3리 아곡이었던 점도 가곡 리 경주 이 씨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요소였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일제강점기 조선을 대표하는 집안으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훌륭한 가문의 뿌리가 평택지방이라는 것인데, 생각할수록 즐겁다.
■ 가야실은 본래 안동 권(權)씨의 터전
●가곡리 신가곡
가야실의 주인을 놓고 논쟁을 벌일 때 빼 놓을 수 없는 집안이 구가곡과 뒷 성지의 안동 권씨다. 가곡리의 안동 권 씨는 성환 파로 입 향 조 권 휴 이래 18대를 살아왔다. 18대면 대략 540년으로 세조 때의 인물 이연손이 살았던 시대와 비슷하고 백사 이항복보다는 130년쯤 이른 시기다.
이들은 본래 진위면과 가까운 용인군 남사면 아골이라는 마을에 살았는데 권휴 때 이곳으로 이거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안동 권 씨의 최초 입 향지가 가야 실이라는 확증은 없다. 그 이유는 입향조 권휴를 비롯하여 형제들이 만기사 입구 거북 산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동 권 씨가 동천 리 에 입 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짐작할 때 조선 전기이므로 외가나 처가의 상속재산과 관련 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였던 권혁보(75)씨는 그 사실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신 안동 권씨가 가야실에 터를 잡은 시기가 권휴의 큰아들 진사공 때라는 것을 말해주어 가야실로의 이거(移去)시기를 짐작케 하였다. 그렇다면 위의 내용이 어느 정도 맞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사공의 자손은 구가곡(2리)과 신가곡(1리)에 흩어져 산다.
하지만 가야실에 정착한 뒤 안동 권씨 집에서는 큰 인물이 배출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의금부 도사 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지만 자력으로 문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에는 통상적으로 3대(代)를 거치며 관료를 배출하지 못하면 양반이 아니라는 관념이 있었다.
하다못해 생원, 진사시라도 합격해야 양반으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데, 4백 여 년 동안 관료를 거의 배출하지 못했다는 것은 가문의 위세 뿐 아니라 경제기반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가야실의 안동 권씨도 조선 후기를 거치며 쇠락을 길로 접어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영조 5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1728. 영조 4년) 때 권서봉 등이 이인좌의 편에 적극 가담하면서 정치, 사회적 지위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안동 권씨 가문의 재앙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해방 직후 염병이라고 불렸던 장티푸스가 온 마을을 휩쓸면서 집안은 적몰의 위기를 겪었다.
사실 이 때만 해도 안동 권씨는 큰 재산은 없었지만 종손 권오상을 필두로 학문과 권위에서 존경을 받았다.
권혁보(78)씨에 따르면 염병을 옮긴 사람은 종가(宗家)에서 머슴을 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전염병이 돌면서 가문을 떠받치던 3, 40대 가장 여러 명이 죽어갔다. 종손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게 되자 집안은 쑥대밭이 되었다.
종부(從夫)는 살아남은 아들과 딸을 키우며 가문을 지켰지만 힘겨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종손을 대학교육까지 시키고 나중에 미국 유학까지 보낸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자란 종손 권순용(70세)씨는 미국에 유학한 뒤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러던 중 유일한 의지였던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가 죽으면서 권순용씨의 절망감은 무척 컸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권순용씨는 종손의 위치와 역할을 버리고 미국에 주저앉았다.
현재 종가(宗家)는 종손의 막내 누이가 혼자 지키고 있다. 하지만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관리가 안 되는 데다 여기저기서 폐품들을 주워서 쌓아 놓는 바람에 고물상처럼 변했다.
종손이 없다 보니 제사를 비롯한 집안의 대소사를 권순보씨가 맡게 되었다. 종손과 당숙관계여서 일가친척들 중에서는 가장 가까운 지손(支孫)이기 때문이지만 없는 재산에 한 달에도 몇 차례씩 있는 제사를 받드는 일은 무척 힘들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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