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근현대 인물

이종찬(李鐘贊 : 1916~1983)

야촌(1) 2011. 1. 29. 20:06

■ 이종찬(李鐘贊)

 

↑이종찬(李鐘贊)
   [생졸년] 1916년 3월 10일~1983년 2월 10일/향년 67세



[인물요약]


1937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제49기로 졸업했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당시 소좌였다.
8·15해방 이후 육군사관학교 제8기로 졸업한 후 1949년 국방부 정훈국장 겸 제1국장을 지냈고, 1950년 수도경비사령관, 1951년 보병학교장, 1952년 육군참모총장 등을 역임했다.

 

1953년 미국참모대학을 졸업한 후 육군대학총장을 역임했다.
1960년 국방부장관, 1961년 주(駐) 이탈리아 대사, 1976년 국회의원(유신정우회 소속), 1979년 유신정우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52년 5월 부산정치파동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파병요청을 거부했고, 5·16군사정변의 사전모의 과정에서 혁명최고지도자를 권유받기도 했으나 거부하는 등, 군 재직 당시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소신(所信)을 지녔던 인물(人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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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찬(李鐘贊, 1916년 3월 10일 ~ 1983년 2월 10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군인으로 일본군장교 출신의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이다. '군의 정치적 中立'을 강조하여 독재정권에 반대했던 人物로 大韓民國에서는 참군인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여순사건의 유탄을 맞고 박정희가 숙청될 위기에 처했을 때 그를 구명하였다.
1950년의 한국전쟁에 참전하였으며, 휴전 후에는 이승만의 부당한 지시에 저항하였다.
제2공화국 때에는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파악하여 국무총리 장면에게 보고했는데, 그는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을 눈치 챈 몇 안 되는 人物이었다.

[생애 초반]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1916년 3월 10일 조선 귀족회 이사와 부회장을 지낸 이규원(李圭元)의 아들로 경상남도 진해 친가의 친척 집에서 출생하였고 경성부 본가(本家)에서 성장하였다.

 

또한 그의 원적지는 경성부이다. 그는 대한제국의 외무대신, 법부대신을 지냈고 한일 병합 조약 체결 과정에서 일본에 협력한 이하영「李夏榮, 1858(철종 9)~1919」의 장 손자(長孫子)였다.

 

재산가인 이하영의 長孫이었기에 여유 있는 가정에서 자랐으며, 1921년 京城에 근무하는 고위급 日本人 자제들을 위해 세워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에 入學하였다.

 

1928년 경성사범부속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31년 京城中學校를 졸업했다.

 

[일본 군인 활동]
1933년 경성중학 졸업 후에는 일본으로 유학,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제49기로 卒業하고 1937년임관하여 中日戰爭과 태평양전쟁 때는 最全方에서 야전사령관으로 근무했다. 광복 직전인 1945년 4월 사망한 아버지 이규원(李圭元)의 자작(子爵) 작위는 습작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군인 활동]
1945년 귀국하여 1949년 대한민국 육군의 대령으로 임관했다.
당시 반민특위의 조사를 받았으나, 친일파 집안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일본 군인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아직 젊은 나이였기에 별다른 특이점은 찾을 수가 없어 특별한 처분을 받지는 않았다.

 

1950년 수도경비사령관에 임명되어 한국전쟁을 맞았고, 제3사단장, 육군보병학교 교장을 거쳐 1951년 육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임명한 달 후 부산 정치 파동 때 대통령 이승만의 군부대 동원 명령을 거부하여 곧바로 해임되었다.

 

이때의 기개 때문에 이종찬에게는 '참군인'이라는 평판이 평생 따라다녔다.
1952년 이용문(李龍文,1916~1953). 박정희(朴正煕,1917~1979) 등으로부터 쿠데타 제의를 받았으나 거절했다.

이후 미국 유학을 거쳐 육군대학총장 등을 역임했다.

 

제2공화국 당시 박정희 등의 쿠데타 기도를 사전에 감지하여 국무총리 장면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당시 박정희의 쿠데타 기도를 눈치 챈 몇 안 되는 인물이었다. 그는 1960년 10월 장면에게 박정희를 육군 참모총장으로 기용하면 쿠데타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는 건의를 하기도 했다.



[생애 후반]
군사 정변 이후 軍政을 비판하다가 제3공화국을 지지, 국방부장관을 잠시 지낸데 이어, 주 이탈리아 대사로 6년간 근무했다. 1976년 유정회 국회의원을 역임했다.


유한회사코리아엔지니어링 代表理事 社長이 되었고, 재향군인회 고문에 위촉되었으며, 한이협회장, 성우구락부회장, 한일불교협의회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사후]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일본군 영관급 장교 경력 때문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가족관계]
◇할아버지 : 이하영(李夏榮)
◇아버지 : 이규원(李圭元)



[학력]
-경성사범학교 부설 보통학교 졸업,
-경성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육군사관학교 제49기,
-일본 육군포병학교 졸업,
-대한민국 육군사관학교 제8기,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평가와 비판]
대통령 이승만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 유명해진데다 군 후배들에게 신망이 높았던 이종찬은 일부 학자들이나 정치인들이 과거사 정리는 신중해야 하며 친일파의 후손이거나 일제 강점기에 일본군에 복무했다 하여 일괄적으로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를 펼칠 때 인용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