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역사이야기

"권력은 나눌 수 없다" 태종의 혹독한 가르침

야촌(1) 2010. 10. 24. 13:25

■ 「권력은 나눌 수 없다」태종의 혹독한 가르침.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9호 | 20100328 입력

 

모든 시대에는 명암이 존재하는데 세종시대 또한 마찬가지다. 

세종이 강행했던 ‘수령고소금지법’은 백성들의 큰 반발을 샀다. 

애민 군주로 알려진 세종이 왜 이런 악법을 고수했는지는 더 연구해야 할 과제이지만 순리를 거스르는 이런 법은 조선의 개국정신과도 맞지 않았다. 이런 진통들을 겪으며 세종은 비로소 백성들이 나라의 근본이란 깨달음으로 나아갔다.

 

↑만송원 쓰시마섬 이즈하라시에 있다. 쓰시마섬의 토착 영주인 소씨(宗氏)의 원찰이다. 

    태종은 대마도 정벌을 통해 세종에게 군권을 어떻게 쓰는지 가르쳤다.

    <쓰시마섬=사진가 권태균>

 

성공한 국왕들 세종

① 애민 군주의 출발

 

세종 4년(1422) 5월 8일. 세종은 와병 중인 상왕(태종)을 모시고 연화방(蓮花坊) 신궁(新宮)으로 갔다. 

거처를 옮겨 병을 피하려는 뜻이었는데, 이때 세종은 왕자들과 걸어서 갔다. 

 

『세종실록』은 세종이 약이나 음식을 모두 직접 받들어 올리고, “병이 심할 때는 밤새 곁에서 시중들면서 잠시도 옷을 벗고 주무시지 않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걱정했다(『세종실록』 5월 8일)”고 전하고 있다. 

 

태종은 그해 3월과 4월 연달아 사냥을 나갈 정도로 건강했기 때문에 와병은 뜻밖이었다. 

상왕은 가는 곳마다 노루와 산돼지·사슴들을 쏘아 잡았고, 4월 6일 건강하게 귀경했는데 그 직후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세종은 종묘, 소격전(昭格殿:일월성신에게 제사하는 곳)과 여러 명찰(名刹)에 대신들을 보내 제사 지내게 하고, 참찬 변계량(卞季良) 등에게 성요법(星曜法)에 따라 길흉을 점쳐보게도 했다. 성요법은 병든 날짜를 들어서 병을 알아내는 점서(占筮)의 일종이다. 5월 2일에는 일죄(一罪:사형죄) 이하는 모두 석방시켰다. 

 

이런 조치들이 효험을 보았는지 태종은 잠시 회복되는 듯했으나 5월 9일 저녁부터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드디어 세종은 그날 밤 이고(二鼓=10시쯤)에 “부왕의 병이 나으실 것 같지 않으니 유사(有司)에 명하여 재궁(梓宮:관)을 준비하게 하라”고 말했고, 다음 날인 5월 10일 태종은 만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상한 것은 태종의 병명에 대해 별다른 기록이 없다는 점이다. 

태종은 그해 9월 6일 헌릉(獻陵)에 안장되는데 효령대군이 읽은 애책문(哀冊文)에 “하루아침에 작은 병[미양(微恙)]을 만나 대점(大漸=임금이 위독함)에 이르러 낫지 못하셨다”고 전할 뿐이다.

 

▲심온(沈溫=세종의 장인)의 묘와 사당

    태종은 심온이 사위의 왕권을 제약할 것을 우려해 사형시켰다. 심온은 외손자인 문종에 의해 신원되었다.

    사진가 권태균 

 

이미 4년 동안 왕위에 있었지만 세종의 진정한 친정은 태종의 죽음 이후부터였다. 4년 전인 세종 즉위 직후 발생한 강상인(姜尙仁)과 장인 심온(沈溫)의 옥사는 권력이 누구에게 있는지를 선포한 셈이었다.
 

그때 심온·심정 형제는 “군사는 마땅히 한 곳(세종)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는 혐의로 사형당했다. 세종은 국왕 수업 중일 뿐이었는데, 점수가 나쁠 경우 양녕을 갈아치웠듯이 갈아치울 수 있었다.

그러나 세종은 훌륭한 ‘왕권 교사’인 태종 밑에서 열심히 공부했다. 태종은 심온의 옥사를 통해 왕권은 그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이미 민씨 처남 넷을 죽여 버린 전력이 있었다.『세종실록』 1년 11월 30일자에는 심지어 민씨(민무구·무질 등)의 딸에게 장가들려는 사람이 없어서 혼인 시기를 놓쳤다는 기록이 나올 정도였다.

 

태종은 조부와 부 및 자신의 관직이 없는 서인(庶人)은 민씨의 딸들과 혼인해도 좋다고 전지를 내렸지만 아무도 인혼(因婚)을 맺으려 하지 않았다. 이런 피의 숙청을 통해 태종은 왕권을 반석 위에 올려놓았다. 또한 대마도 정벌을 통해 백성을 어떻게 보호하고 나라의 위신을 드높이는지도 보여주었다.

 

세종은 행여 태종의 심기를 건드릴까 군사 문제에는 극도로 민감하게 대응했다. 

즉위년(1418) 9월 세종은 상왕을 따라 사신들을 전별할 때 별운검 총제(別雲劒摠制) 성달생·이순몽·홍섭 등이 모화루에서 칼을 차고 자신을 시립(侍立)하자 “부왕이 여기 계신데 어찌 칼을 차고 옆에 있을 수 있느냐?”면서 급히 내려가게 하고 옥에 가둘 정도였다. 자신을 밀착 경호하는 별운검이 태종의 눈에 거슬릴까 우려한 것이었다.

 

세종 즉위년(1418) 8월 세종은 헌수(獻壽: 장수를 비는 술잔을 올리는 것)할 때 무릎걸음으로 상 앞까지 나가 잔을 올렸다. 태종은 흡족해서 “내가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복(福)을 저축하려 한 것인데, 이제 도리어 더욱 높아지는구나”라고 말했다.

 

태종이 승하함으로써 비로소 세종호(號)가 출범했지만 순항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양녕대군 문제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광주에 쫓겨 가 있던 양녕은 세종 1년(1419) 1월 도주했는데 지방관들이 그 책임을 애첩 어리(於里)에게 뒤집어씌우자 어리가 분함과 근심을 이기지 못하고 목매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런 사건들은 세종에게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이 계속 양녕과 내통하는 것은 나쁜 징조였다. 상왕이 생존 시에 이미 아무도 양녕과 사통(私通)할 수 없다고 엄명을 내렸지만 세종 1년(1419) 5월 역리(驛吏) 이동인(李同仁)이 사통하다가 발각되었다. 또한 민간에서는 양녕에 대한 동정론이 살아 있었고, 양녕 또한 재기의 꿈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태종은 시종 세종에 대한 굳건한 신임을 표시했지만 양녕을 완전히 내칠 수는 없었다. 세종 1년 2월 사냥지 양근으로 찾아온 양녕에게 태종이 함께 사냥하자고 말하자 양녕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렇게 하신다면 제가 어찌 도망가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전하고 있다. 게다가 비록 실세(失勢)했지만 원경왕후 민씨는 끝내 장남에 대한 기대를 접지 않고 있었다.

 

세종 2년(1420) 민씨가, 2년 후에는 상왕마저 세상을 떠남으로써 양녕에 대한 보호막은 사라졌지만 양녕을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은 태종의 유훈이었다. 태종은 재위 18년(1418) 6월 세자 교체 후 양녕에게 통곡하면서 “하물며 네가 충녕(忠寧:세종)에게 무슨 죄가 있겠느냐? 

 

너는 일생을 편안히 누릴 것을 알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태종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양녕을 추종하는 인물들이 있었지만 무조건 죽일 수도 없었다. 세종 4년(1422) 7월 양녕대군을 수강궁(壽康宮)에 허락 없이 출입시켰던 갑사(甲士) 김인의(金仁義)는 양녕을 상전(上典)이라고 불렀다.

 

“조선 풍속(國俗)에 종이 그 주인을 상전이라 부르고, 신하가 임금을 또한 상전이라고 부른다”는 『세종실록』의 기록처럼 양녕을 국왕으로 생각했다는 뜻이다. 세종은 재위 5년(1423) 3월 “지금부터는 비록 족친(族親)이라도 전지(傳旨)를 받은 자가 아니면 (양녕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고, 위반자는 크게 징계할 것이다”라는 교지를 사헌부에 내려 중앙과 지방에 공문을 보내 알리게 했다. 

 

하지만 세종의 치세에 불만이 있으면 곧 양녕이 거론되었다. 세종 6년(1424) 3월에는 청주 호장(戶長) 박광(朴光)이 “양녕대군께서 즉위하셨으면 백성들이 덕을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다른 호장 곽절(郭節)도 “양녕께서 즉위하셨으면 덕을 입을 수 있었을 터인데, 즉위하지 못하셔서 덕을 입지 못한다”고 말한 사건 등이 이를 말해준다.

 

세종 6년(1424) 10월에는 갑사(甲士) 지영우(池英雨)가 견룡(牽龍) 노치(盧致)에게 “내가 들으니 임금께서 철원(鐵原)에 행행(行幸)하셔서 군사를 삼기(三<6B67>)에 모을 때 양녕대군이 수강전에 나가 군사를 장악한다는데 과연 그러한가?”라고 말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 시기에 양녕의 즉위를 바라는 듯한 발언이 잇따른 이유는 세종이 법제화한 수령고소금지법(禁府民告訴)에도 한 원인이 있을 것이다. 역모 이외에는 어떠한 불법행위가 있어도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한 법이었다.

 

“근래 정신(廷臣)들이 다 말하기를 ‘지금 부민(府民)들이 수령을 기탄없이 고소하는 것을 금지시켜야 합니다’라고 하는데, 예전에 태종께서 낙천정에 행차하셨을 때 허 판서(허조)가 이 계책을 진술하자 태종께서 아름답다고 칭찬하기를 마지 아니하셨는데, 나 역시 이 뜻을 심히 아름답게 여겨 이민(吏民)들이 다시는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였다.

 

(『세종실록』 5년 6월 23일)” 세종은 어사 등을 파견해 수령의 불법행위를 징계하면 된다고 말했지만 피해자의 고소권을 박탈한 악법은 백성들을 괴롭혔다. 경기도 강음(江陰)의 백성 조원(曹元)은 수령이 전지(田地) 소송을 이유 없이 지체시키자 “지금 임금이 착하지 못하여서 이와 같은 수령을 임용했다.

 

(『세종실록』 6년 4월 4일)”고 비난한 사건이 생기기도 했다. 백성들은 목숨을 걸고 수령에게 저항하기도 했다. 세종 10년(1428) 5월 좌사간 김효정(金孝貞) 등은 “요사이 간혹 상민(常民)이 수령을 구타한 자가 있고, 혹은 역리(驛吏)가 조신(朝臣)을 능욕한 자도 있어서 보는 사람마다 한심하게 여기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물의가 계속되자 세종 13년(1431) 의정부와 6조에서 수령고소금지법을 개정하자고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세종도 “억울하고 원통한 것을 펴 주지 않는 것이 어찌 정치 하는 도리가 되겠는가”라며 “수령과 백성은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라면서 개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세종시대 역시 명(明)과 암(暗)이 함께 존재했던 것이다 

 

[출처] 이덕일의 事思史 | "권력은 나눌 수 없다" 태종의 혹독한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