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현실과의 타협은 숙명
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58호 | 20100321 입력
목숨 걸고 권력쟁취에 나섰다가 불행해진 정객이 많은 반면 권력이 그냥 굴러들어오는 행운아도 없지 않다.
권력을 줍는 행운을 누릴 수는 있지만 성공한 정치가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정치가로 성공하려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해야 하는데 성종은 현상적 처방에 만족했다.
성종이 외면한 시대의 문제는 고스란히 연산군의 어깨에 지워졌다.
명묘조서총대시예도(明廟朝瑞蔥臺試藝圖) 사진가 권태균
국왕이 서총대에 친히 나가서 활쏘기 우승자에게 말 두필을 하사하는 내용의 그림이다.
고려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
절반의 성공 성종
⑦ 무예 장려
성종 때 사림들이 조정에 진출하면서 두 가지 현상이 발생했다.
사림들이 공신집단들의 불법과 전횡을 비판해 조정의 도덕성을 높인 반면 문치(文治) 편향에 따른 국가의 문약화(文弱化)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국왕에게 국가의 문약화 방지는 방치할 수 없는 문제였다. 성종은 사례(射禮)와 강무(講武)를 직접 주관하는 것으로 ‘무인 군주’의 모습도 보이려 했다.
사례는 서울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활을 쏘는 대사례(大射禮)와 지방에서 지방관이 주재하는 향사례(鄕射禮)로 나뉜다. 『논어(論語)』 팔일(八佾)편에서 공자는 “군자는 다투지 않으나 반드시 활쏘기는 그렇지 않다.
서로 읍하고 사양하며 단에 올라 활을 쏘고 내려와서 마시니 그 다툼이 군자답도다(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其爭也君子)”라고 말했다. 대사례는 『의례(儀禮)』의 한 편명(篇名)일 정도로 국왕의 주요 의식 중 하나였다.
성종은 재위 8년(1477) 8월 성균관 문묘(文廟)에서 공자 및 선현들을 제사하는 석전(釋奠)을 거행하고 명륜당에 나가 특별 과거를 보았다. 1400여 명의 거자(擧子:응시생) 중 권건(權建) 등 4명의 급제자를 선발했는데, 내구마(內廐馬:임금의 말)를 타고 유가(遊街:급제자의 가두행진)하는 행렬에 구경꾼이 수천 명에 달했다고 전하고 있다.
성종은 이때 사단(射壇)에 나가 대사례를 행했는데 화살 넉 대를 쏘아 1시(矢)를 맞혔고 월산대군과 영의정 정창손 이하 68명이 짝을 지어 쏘았는데 맞힌 자는 상을 주고 못 맞힌 자는 벌주를 내렸다.
↑선릉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다.
[출처]이덕일의 事思史: 조선 왕을 말하다-남의 힘으로 왕이 된 성종, 현실과의 타협은 숙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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