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찰방 이홍각 묘지명 병서(察訪 李弘愨墓誌銘 幷序).

야촌(1) 2010. 10. 9. 15:24

이홍각『李弘愨, 1537년(중종32) ~ 1605년(선조 38)』

 

22世 호계공 이을규 세째 아들이다.

 

■ 봉직랑(奉直郞) 행 성현 찰방(行省峴察訪) 이공묘지명(李公墓誌銘) 병서(幷序)

 

   조호익(曺好益,1545~1609) 撰

 

경주이씨(慶州李氏)는 대대로 성(姓)씨가 드러나서 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에 비하기도 한다.

공의 휘(諱)는 홍각(弘慤)이고 자는 여성(汝誠)이다.

 

시조(始祖) 알평(謁平)은 신라의 시조를 보좌하여 원훈(元勳)이 되었다.

그 뒤에 자손들이 창성하여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고 나왔다. 증조부의 휘(諱)는 구산(龜山)이고 조부의 휘(諱)는 한주(漢柱)인데, 모두 덕을 숨긴 채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고(考)의 휘(諱)는 을규(乙圭)인데 한 조각의 곤옥(崑玉)과 같아서 세상에 광채를 빛내어 지초계군사(知草溪郡事)를 지내었다. 비(妣)는 영인(令人) 용궁 전씨(龍宮全氏)로, 모관(某官) 아무개의 딸이다.

 

가정(嘉靖) 정유년(1537, 중종32) 3월 6일 모시(某時)에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빼어난 자질이 있었으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문장을 짓기를 좋아하여, 드디어 한때의 걸출한 인재가 되었다.

 

무진년(1568, 선조1)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여러 차례 향천(鄕薦)에 뽑혔으며, 전례에 의거하여 남궁(南宮)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당시의 재상(宰相) 가운데 공의 재주를 아까워하는 사람이 있어서 공을 선발하여 집경전(集慶殿)에 재차 입직(入直)하게 하였으며, 경릉 참봉(敬陵參奉), 제용감 참봉(濟用監參奉)을 거쳤는데, 모두 직책을 잘 수행하였다는 것으로 이름이 드러나 봉사(奉事)로 승진하였다가 파직되었다.

 

집에서 지내면서는 안생(顔生)의 귀함을 몸소 실천하였고, 자공(子公)의 교제를 일체 끊어 벼슬길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에 대해서 전혀 마음을 쓰지 않았다. 말년에는 성현 찰방(省峴察訪)에 제수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만력(萬曆) 을사년(1605, 선조38) 10월 20일에 병으로 인해 집에서 졸하니 향년(享年) 69세였다.

부(府)의 치소(治所) 북쪽에 있는 황동(黃洞)의 언덕에 묏자리를 정하여 이해 12월 23일에 장사 지내었다.


공은 이천 서씨(利川徐氏)에게 장가들었는데, 모관 아무개의 딸이며, 좌명공신(佐命功臣) 서유(徐愈)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시인(時仁)이고, 장녀는 서광윤(徐光胤)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정계도(鄭繼道)에게 시집갔고, 삼녀는 정극후(鄭克後)에게 시집갔다. 큰 손자는 해용(海容)이고, 손녀는 어리다.


공은 성품이 너그럽고 진솔하였으며, 자기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담론할 적에는 사람을 감동시켜 싫증이 나지 않게 하였다. 나 호익이 젊었을 적에 공을 여사(旅舍)에서 뵈었는데, 한번 뵙고는 위대한 사람인 줄 알아보았다.

 

그 뒤 30년 만에 사시는 곳에서 재차 뵈었는데, 풍류와 아치는 조금도 쇠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4, 5년이 지나지도 않아서 부고가 이르니, 아, 슬프다.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짓는다.



위로 근원 거슬러 올라가 보니 / 上泝靈源
아득하니 천칠백 년 전이로구나 / 千七百年


대대로 덕 쌓으며 기반 닦아서 / 積德之基
훌륭한 후손들이 번성하였네 / 瓜瓞綿綿


날 때부터 공은 자질 빼어났으니 / 公生也挺
하늘이 기다림이 있었던 거네 / 天或有䇓


만난 시대 공과는 맞지 않아서 / 時不我諧
솥으로다 수레를 고인 격이네 / 以鼎柱車


소매 짧아 구부정히 몸 구부렸고 / 短袖長彎
집 낮아서 머리 들면 천장 닿았네 / 矮屋打頭


동쪽에 외진 언덕 하나 있으니 / 獨有東岡
넓으면서 조용한 한 구역이네 / 寬閑一區


한 몸 누워 지내기에 적당하여서 / 不贏于躬
영원토록 아름다움 드리웠어라 / 以永垂休


높다라니 하나의 언덕이 있고 / 有高一原
그윽하니 하나의 무덤이 있네 / 有幽一塋


명 지어 그 속에다 파묻었으니 / 我銘以藏
공께서 편안하게 쉬는 곳이네 / 惟公所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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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01]산동(山東)의 최씨(崔氏)와 노씨(盧氏) : 명문대족(名門大族)을 말한다. 위(魏)나라 때부터 당(唐)나라 때까

        지 산동 지방의 명문으로 최씨와 노씨가 있어서 오랫동안 고관(高官)의 자리를 지하였다. 《舊唐書 卷61 竇威列傳》

 

[02]영인(令人) : 조선 시대 외명부(外命婦)의 정4품과 종4품의 봉작(封爵)이다.

 

[03]남궁(南宮) : 상서성(尙書省)의 별칭이다.

      상서성이 열수(列宿)의 남궁에 속하므로 그렇게 칭하는 것이다. 또 예조(禮曹)를 칭하기도 한다.

 

[04]안생(顔生)의 귀함 : 궁벽한 시골에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즐겁게 지내는 것을 말한다.

      안생은 안회(顔回)이다. 공자(孔子)가 말하기를, “어질도다 안회(顔回)여, 한 그릇의 밥과 한 표주박의 물로 누

      추한 골에 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은 그 걱정을 견뎌내지 못하는데, 안회는 그 즐거움을 변치 않으니, 어질도

     다, 안회여.”였다. 《論語 雍也》

 

[05]자공(子公)의 교제 : 상관에게 뇌물을 주어서 벼슬길에 나아가거나 승진시켜 달라고 청탁하는 것을 말한다.

       공은 한(漢)나라 사람 진탕(陳湯)의 자이다. 한나라 성제(成帝) 때 진탕이 당시에 권세를 잡고있던 왕음(王音)

       과 알고 지는데, 지방관으로 있던 진함(陳咸)이란 자가 진탕을 통하여 왕음에게 뇌물을 주어 중앙 관서로 전

       출되기를 바랐다. 그 뒤에 마침내 뇌물로 인해 진함이 중앙 관서로 뽑혀 들어갔다. 《漢書 卷66 陳萬年傳》

 

[06]소매 …… 닿았네 : 가난하게 지낸다는 뜻이다. 소식(蘇軾)의 〈희자유(戲子由)〉 시에, “완구 선생 큰 키

        자와도 같은데, 완구의 학당은 나룻배같이 작네. 머리를 수그리고 서책을 읽다가, 기지개 한번 켜면 천장에 머

        리 닿네.[宛邱先生長如邱 宛邱學舍小如舟 常時低頭誦經史 忽然欠伸屋打頭]”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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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奉直郞行省峴察訪李公墓誌銘 幷序

 

慶州之李。爲世著姓。或比之山東崔盧。公諱弘愨。表德汝誠父。有鼻祖曰謁平者。佐羅祖爲元勳。厥後昌衍。簪纓不絶。曾王父曰龜山。王父曰漢柱。皆隱德不耀。考諱乙圭。崑玉一片。輝映于世。仕終知草溪郡事。妣令人龍宮全氏。某官某之女。以嘉靖丁酉三月六日某子。生公。幼有挺質。好讀書屬文。遂翹楚于一時。戊辰。中進士。屢預鄕薦。例擯于南宮。不恤也。時宰有愛其才。辟之。再直集慶殿。歷敬陵,濟用監參奉。皆以稱職顯。陞奉事罷。家居。躳顔生之貴。絶子公之交。進退泊如也。晩除省峴察訪。亦不起。萬曆乙巳十月二十日。以疾終于家。享年六十九。卜兆于府治之北黃洞之原。堋用是年十二月二十三日。公娶利川徐氏某官某之女。佐命功臣愈之後。生一男。曰時仁。三女。長適徐光胤。次適鄭繼道。次適鄭克後。孫男一曰海容。女幼。公性坦率。不爲表襮。與人談論。亹亹不厭。好益少時。嘗識公于旅邸。一見知爲偉人。後三十年。再見于所居。風期雅致。猶未衰。未四五年而訃至。嗚呼悲夫。銘曰。

上泝靈源。千七百年。積德之基。瓜瓞綿綿。公生也挺。天或有䇓。時不我諧。以鼎柱車。短袖長彎。矮屋打頭。獨有東岡。寬閑一區。不贏于躳。以永垂休。有高一原。有幽一塋。我銘以藏。惟公所寧。

 

출처 : 芝山集卷之四>墓誌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