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103호] 20090228 입력
■ 국란을 겪은 임금들 인조
③ 外患 부른 쿠데타
인조와 서인이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몰라서 친명반청(親明反淸) 정책을 고수한 것은 아니었다.
친명 사대는 정권 획득과 유지의 명분이었다. 군사는 없지만 전쟁불사론이 횡행했고 현실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입을 열지 못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국제 정세는 국내 정세에 파묻혀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되었다. 이 양자 사이 모순의 충돌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었다.
↑남한산성(55Χ42㎝) : 주화론과 척화론의 대립 속에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인조는 이불조차 없는 한겨울을 보내
야만 했다. <우승우(한국화가)>
인조반정은 혼돈의 끝이 아니라 시작에 불과했다. 광해군 폐출에 대한 반발이 계속되었다.
인조 1년(1623) 8월에는 김덕원(金德元)·주대윤(朱大允) 등이, 10월에는 황현(黃晛)·이유림(李有林) 등이 사형당했다.
군사를 동원한 기찰이 대폭 강화된 가운데 인조 2년(1624)에는 광해군 때 좌의정이었던 박홍구(朴弘耉)가 다시 사형당했다. 저항이 잇따르자 의정부는 ‘통유문(通諭文)’을 반포했는데, “전후 여러 역적들의 공초나 흉한 격문에서 말한 바는 다 동일하게 ‘폐주를 마땅히 봉환(奉還:받들어 모시고 돌아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지금의 반정은 정(正)이 아니다. 자기가 군사를 거느리고 쳐서 자기가 왕위에 올랐으니 어찌 정인가”라고 반발했다는 것이다. 인조반정이 부른 것은 내란뿐이 아니었다.
광해군이 명나라 황제에게 불충했다는 것을 쿠데타 명분으로 내건 인조정권은 욱일동승(旭日東升)하는 후금(後金:청)에 적대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누루하치는 인조 4년(1626) 2월 13만 대군으로 산해관의 길목인 영원성(寧遠城)을 공격하다가 홍이대포(紅夷大砲)의 반격을 받아 그해 7월 세상을 떠난다.
그런데 『명사(明史)』나 『청사고(淸史稿)』 같은 중국 사료에는 이런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조선의 이성령(李星齡)이 쓴 『춘파당일월록(春坡堂日月錄)』에만 기재되어 있다. 9월 누루하치의 여덟째 아들이자 대(對)조선 강경파인 황태극(皇太極:태종)이 즉위한다.
황태극은 후금의 실세였던 4패륵(貝勒:버일러, 皇子의 뜻) 중 넷째 서열에 불과했다.
조선의 김종일(金宗一:1597~1675)은 『노암문집(魯庵文集)』에서 “노한(老汗:누루하치)이 죽으면서 ‘나의 뜻을 이룰 능력이 있다’며 황태극을 후사로 지명했다”고 전하지만 실제 그랬다면 『청사고』가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
『청사고』 태종 본기는 “여러 패륵이 의논해 (황태극에게) 자리를 이을 것을 청하자 재삼(再三) 사양하다가 마침내 허락했다”고 전한다. 이 무렵 조선은 평안도 철산 가도(가島)에 주둔한 명나라 장수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해 후금을 자극했다.
『인조실록』 2년(1624) 6월조는 “모문룡이 군사를 풀어 놓아 횡포를 부리면서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수색해 빼앗아 연로(沿路)가 텅 비고 백성이 모두 호곡(號哭)했다”고 전하지만 인조 정권은 임진왜란 때의 원군(援軍)처럼 생각했다.
드디어 인조 5년(1627) 1월 청 태종은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 등에게 3만 군사를 주어 압록강을 넘게 했다.
향도(嚮導:길잡이)는 이괄의 난에 가담했던 한윤(韓潤)이었다.
인조 정권은 아무런 국방 대책이 없었고 이순신의 조카인 의주부윤 이완(李莞)은 의주성에서 분전하다 전사했다. 후금군의 기세를 묻는 인조의 질문에 이원익이 “철기(鐵騎)로 거침없이 쳐들어온다면 하루 동안에 8∼9식(息:1식은 30리)을 달릴 수가 있습니다”고 답변했으니 서울까지 닷새면 도달할 속도였다.
“오랑캐를 멸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고 큰소리치던 모문룡은 후금군이 철산을 공격하자 신미도(身彌島)로 잽싸게 도주했다. 인조가 병조판서 이정구(李廷龜)에게 “군병의 숫자를 아는가?”라고 묻자 “모른다”고 답변했다.
인조는 “판서가 군병의 숫자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라고 힐난했으나 이것이 인조 정권의 현실이었다.
대간(臺諫)에서 ‘전하께서국문(國門)에 나가셔서 직접 정벌에 나서겠다고 군민(軍民)을 효유하시고, 맨 먼저 도성을 떠나자고 제창한 자를 빨리 목 베어 군문에 효시하소서’라고 요청하자 인조는 “태반은 현실성이 없는 의논”이라고 반대했다.
인조는 다음 날 분조(分朝)를 편성해 세자를 전주로 보내고 자신은 강화도로 들어갔다.
임란과 달리 의병이나 근왕병도 달려오지 않자 그해 3월 3일 강화부 성문 밖에 단(壇)과 희생(犧牲)을 마련해 제천(祭天)하고 정묘약조를 맺을 수밖에 없었다. 형제지맹(兄弟之盟)을 맺고 군사를 철수시킨다는 것이 핵심 조항이었다.
정묘호란은 쿠데타 정권의 무능을 만천하에 공개한 셈이어서 다시 봉기가 잇따랐다.
인조 5년 9월에는 전 세자익위사 익찬(翊贊) 이인거(李仁居)가 창의중흥대장(倡義中興大將)의 기치로 군사를 일으켜 횡성 관아를 점령했다. 제천에 유배 중인 유희분(광해군의 처남)의 조카 유효립(柳孝立)은 인조 6년(1628) 1월 4일 궁내 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기로 계획했다.
그러나 하루 전인 1월 3일 동지였던 전 세마(洗馬) 허유(許유)의 친족 허적의 고변으로 무산되었다.
허적은 악명 높던 인조의 부친 정원군(定遠君)을 국왕으로 추숭(追崇)하자는 상소를 여러 번 올렸다가 공론(公論)에 용납되지 못해 시골로 가 있다가 횡재한 셈이었다.
쿠데타에 대한 반발이 거셀수록 쿠데타 정권은 후금 적대정책을 강화해야 하는 모순에 빠졌다.
청 태종은 1635년(인조 13년) 찰합이(察哈爾:차하르)를 정벌해 전체 몽골족을 병합하고 이듬해 4월 국호를 청(淸)으로 개칭했다. 청 태종이 황제(皇帝)를 자칭하면서 조선을 ‘너의 나라(爾國)’라고 비하하는 국서를 보내자 격분한 조야는 전쟁불사론이 횡행했다.
그러나 이념과 입은 있었지만 군사는 없었다. 정묘호란 이후 9년이 지났지만 국방력은 전혀 강화되지 않았다. 판윤 최명길(崔鳴吉)은 인조 14년(1636) 9월 척화론(斥和論)을 비판하면서 “강물이 얼면 화가 목전에 닥칠 것”이라고 경고했으나 인조는 묵묵부답이었고 척화파는 최명길의 목을 베어야 한다고 목청을 드높였다.
척화에 동조하자니 군사가 없고 강화를 따르자니 쿠데타 명분을 부인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 것이었다.
인조는 재위 14년(1636) 11월 특지로 교리 조빈(趙贇)을 평안도 도사로 임명했는데 『인조실록』은 “척화론을 극력 주장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문신을 평안도에 두면 안 된다는 건의가 잇따라 충청도 도사로 이전시켰다. 척화는 주장하되 전쟁터에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 입만 살아있던 성리학자들의 본질이었다. 인조 14년(1636) 12월 9일 청 태종은 12만 병력을 거느리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휘하의 예친왕(豫親王) 다탁(多鐸)은 선봉 마부대(馬夫大)의 기병부대에게 의주 백마산성을 우회해 곧바로 서울로 남하시켰다. 14일에 개성 유수가 청군이 개성을 통과했다고 보고하자 인조는 다시 강화도로 파천하기로 결정했으나 이미 길이 끊긴 상황이었다.
인조는 할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는데 『인조실록』은 “성 안 백성 중 부자·형제·부부가 서로를 잃고 통곡하는 소리가 하늘을 뒤흔들었다”고 전해 주고 있다. 게다가 남한산성은 겨울 농성 장소가 아니었다.
1만3000여 병력과 1만4000여 석의 양곡이 있었으나 혹한은 청나라 군사보다 무서운 적이었다.
추위에 강한 청군이 눈 덮인 산성을 포위했으나 구원군은 오지 않았다. 얼어 죽는 군사들이 속출하는 가운데 인조 15년(1637) 1월 26일 강화도가 나흘 전에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는 그달 30일 신하를 뜻하는 푸른 남염의(藍染衣)를 입고 소현세자를 비롯한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는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백성들에게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성리학자들의 시대착오적인 세계관이 부른 외환(外患)에 불과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을 제주로 옮겼는데, 신경진(申景진)·구굉(具宏)·신경인(申景<798B>) 등 반정공신들이 경기수사(京畿水使) 신경진(申景珍)에게 “잘 처리하라(善處)”고 연명서를 보냈다.
‘몰래 죽이라(潛害)’는 뜻이었으나 신경진이 따르지 않았다고 『연려실기술』은 전한다. 병자호란은 세상이 이미 성리학적 세계관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실례였다. 인질로 간 소현세자는 이를 깨달았으나 혼자만의 깨달음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 역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몬 "仁祖" (0) | 2010.09.15 |
---|---|
새 세상을 봤지만 권력에서 소외된 후계자의 좌절 (0) | 2010.09.15 |
피의 보복이 부른 政治 실종, 전란을 부르다 (0) | 2010.09.15 |
국익 위에 당론, 임금 갈아치우는 쿠데타 명분으로 (0) | 2010.09.15 |
소통과 통합에 실패한 군주, 외롭게 몰락하다. (0) | 2010.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