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事思史>조선 왕을 말하다.
[제81호] 20080927 입력
■ ‘집안’에 갇힌 아버지, 칼로 맞선 아들
악역을 자청한 두 임금 태종
②골육상쟁
↑서울 성동구 행당동에 있는 살곶이다리(箭串橋·전곶교)이다.
1420년(세종 3년) 세종이 태종을 위하여 다리를 놓을 것을 명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과 당대 일류 건축가인 공조판서 박자청(朴子靑)으로 하여금 직접 공사를 감독하게 하였다. 길이 78m로 당시 가장 긴 다리였다. <사진 권태균>
개국은 했으나 불안한 신생 왕조였다. ‘조선이 과연 얼마나 갈까?’라는 의구심이 짙게 깔려 있었다.
개국 초 감찰 (監察) 김부(金扶)가 좌정승 조준(趙浚)의 집 앞을 지나다가 “비록 큰 집을 지었지만 어찌 오래 살게 되겠는가? 뒤에 반드시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될 것이다”고 말했던 것도 이런 분위기의 소산이었다.
이성계는 “이는 조선 사직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말”이라며 김부를 사형시켰지만 신생 왕조에 대한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세자 책봉이었다. 이성계 사후를 노리는 고려 부흥 세력이 상존하는 상황에서 강력한 인물을 세자로 책봉해 미래를 다져야 했다.
이성계는 첫째 부인인 향처(鄕妻) 한씨(1337~1391)에게서 여섯 아들을, 개경에서 얻은 경처(京妻) 강씨(?~1396)에게서 두 아들을 낳았다. 강씨는 개경 명가 출신이었지만 한씨가 사망하는 공양왕 3년까지는 후처일 수밖에 없었고, 두 아들 역시 서자(庶子)에 불과했다.
조선 개국 당시 열한 살에 불과했던 강씨의 둘째 방석은 아무 공을 세우지 못했고, 두어 살 위의 형 방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 명종 때 문신 이정형(李廷馨)이 쓴 『동각잡기(東閣雜記)』와 『태조실록』은 개국 초 태조가 배극렴·조준·정도전 등 공신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 세자 문제를 논의하자 ‘시국이 평안할 때는 적자(嫡子)를 세우고, 시국이 어지러울 때는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고 전한다.
개국 초의 혼란기였으므로 당연히 ‘공이 있는 자’를 우선해야 했는데, 이 경우 정몽주를 격살해 개국의 기틀을 연 방원이 유리했다. 시국이 평안하다면 적장자(嫡長子)인 진안대군 방우(芳雨·태조 2년 사망)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방우는 조선 개창에 부정적이었으므로 제외한다면 둘째 방과(芳果·정종)나 방원을 세워야 했다.
그러나 이 논의를 들은 신덕왕후 강씨의 통곡 소리가 전세를 뒤집었다. 『동각잡기』는 “뒷날 또 배극렴 등을 불러 의논하니 다시는 적자를 세워야 하느니, 공 있는 이를 세워야 하느니 하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한다. 태조 1년(1392) 열한 살의 방석(芳碩)이 세자가 된 것은 오로지 모친의 눈물 덕분이었다.
정도전도 『조선경국전』의 ‘세자를 정함’이란 글에서 “세자는 천하 국가의 근본이다.
옛날 선왕(先王)이 장자(長子)를 세자로 세운 것은 (형제간의) 다툼을 막기 위한 것이고, 현자(賢者)를 세운 것은 덕(德)을 높이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지금 우리 동궁(방석)은 뛰어난 자질과 온화한 성품으로…”라며 장자도 현자도 아닌 방석의 세자 책봉이 가져올 문제에는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이는 눈을 감는다고 없어질 문제가 아니었다. 방원은 우왕 9년(1383) 이성계 집안에서는 최초로 과거에 급제했다.
변방 무가(武家) 출신이란 콤플렉스를 갖고 있던 이성계는 이때 “대궐 뜰에서 절하고 사례하여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고 전할 정도로 기뻐했다. 신덕왕후도 방원의 글 읽는 소리를 듣고는 “왜 내게서 나오지 않았을까”라고 한탄했다고 『동각잡기』는 전하지만, 스물여섯의 장년인 그는 열한 살 이복동생에게 밀려났다.
방원은 반발했다. 단순히 이복형제 사이의 자리다툼이 아니라 조선의 미래 문제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漢) 고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 같은 개국공신들을 제거한 것처럼 피의 숙청을 통해 왕실을 반석 위에 올려놓아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안을 나라로 만든 화가위국(化家爲國)의 부친과 맞서야 했다.
태조 7년(1398) 8월 방원이 군사를 일으켜 세자 방석·방번 형제와 배후의 정도전을 죽인 것은 사실상 부친을 공격한 것이었다.
이 제1차 왕자의 난은 당(唐) 고조 9년(626) 태종 이세민이 장안(長安·현 서안) 북쪽 현무문(玄武門)에서 태자인 친형 이건성(李建成)과 넷째 동생 원길(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차지한 ‘현무문의 변(變)’과 흡사했다.
현무문의 변으로 고조 이연(李淵)이 강제로 양위(讓位)당한 것처럼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도 사실상 강제로 양위당했다.
이성계는 충격을 받았고 격분했고 좌절했다. 이성계 퇴위 이틀 후인 『태조실록』 7년 9월 7일조는 “상왕이 이방석 등을 위하여 소선(素膳)을 드니 도평의사사에서 육선(肉膳)을 올리기를 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성계는 백운사(白雲寺)의 노승 신강(信剛)에게 “방번·방석이 다 죽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고 탄식했다.
심지어 태조는 왕자의 난이 발생한 한양을 버리고 개경으로 돌아가 시중(侍中) 윤환(尹桓)에게 “내가 한양에 천도(遷都)했다가 아내와 아들을 잃고 오늘 환도(還都)했으니 실로 도성 사람에게 부끄럽다. 날이 밝지 않았을 때만 출입해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해야겠다(『정종실록』 1년 3월 13일)”고도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정종 2년(1400) 1월 제2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정종실록』은 방간이 이성계에게 사람을 보내 거병 계획을 보고하자 “네가 정안(靖安)과 아비가 다르냐? 어미가 다르냐? 저 소 같은 위인이 어찌 이에 이르렀는가”라고 꾸짖었다고 전하지만 이성계가 일방적으로 방원 편만 들었을 까닭은 없다.
제2차 왕자의 난 직후 세제(世弟)로 실권을 잡은 방원이 인사하러 오자 이성계는 덕담 대신 “삼한에 귀가(貴家)·대족(大族)이 많은데, 반드시 모두 비웃을 것이다. 나도 부끄럽게 여긴다(『정종실록』 2년 2월 4일)”고 조롱했다. 그러나 방원은 부친의 경멸에 좌절하는 대신 강력한 개혁 노선을 걸었다. 사병(私兵) 혁파가 그것이었다.
정종 2년(1400) 4월 대사헌 권근(權近) 등이 “병권(兵權)은 국가의 큰 권세이니 마땅히 통속(統屬)해야지 흩어서 주장할 수 없습니다”고 사병 혁파에 대해 상소하자마자 당일로 “여러 절제사가 거느리던 군마를 해산하여 모두 그 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실록이 전하는 것처럼 전광석화처럼 사병을 혁파했다.
『정종실록』은 “병권을 잃은 자들은 모두 앙앙(怏怏·원망함)하여 밤낮으로 같이 모여 격분하고 원망함이 많았다”고 전할 정도로 반발도 작지 않았다. 그중에는 방원의 측근이자 정사·좌명 1등공신인 조영무(趙英茂)도 끼어 있었다.
대간에서 조영무의 처벌을 요구하자 방원은 두 번 반대하는 형식을 취한 후 황주(黃州)로 유배 보냈다.
이 조치에 조야가 놀랐다. 조영무까지 내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드디어 정종은 재위 2년(1400) 11월 11일 방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 전에 정종이 좌승지 이원(李原)을 보내 양위하겠다고 보고하자 이성계는 “하라고도 할 수 없고, 하지 말라고도 할 수 없다. 이제 이미 선위했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라고 싸늘하게 대답했다.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이성계는 태종 1년(1401) 5월 태종이 헌수(獻壽)하자 토산(兎山)으로 유배 간 방간을 불러 올릴 것을 요구했다. 태종은 “이것이 신이 전부터 가지고 있던 마음”이라며 명령대로 하겠다고 답했으나 대간들이 반대한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물론 이것이 태종의 본심이었다.
태종은 방간을 불러옴으로써 잘못된 신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친동기이기 때문에 목숨을 건진 것만도 다행으로 여겨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이에 반발해 함흥으로 돌아가 버렸다. 심지어 이성계는 태종 2년(1402·임오년) 계비 강씨의 친척인 안변(安邊)부사 조사의(趙思義)가 ‘강씨의 원수를 갚겠다’며 군사를 일으키자 여기 가담했다.
태상왕부인 승녕부(承寧府) 당상관 정용수와 신효창이 “태상왕을 호종해 동북면으로 가서 조사의의 역모에 참여했다”는 『태종실록』의 기록이 이를 말해 준다. 조사의의 난은 비록 진압되었지만 이성계의 가담은 무수한 뒷말을 낳았고 태종의 정통성에 큰 상처가 되었다.
태종도 “내가 무인년(1차 왕자의 난) 가을 사직의 대계(大計) 때문에 부득이 거사한 후 부왕께서 항상 불평하는 마음을 품으셨다(『태종실록』8년 6월 21일)”고 이런 사실을 인정했다. 태종은 부친은 인정하지 않지만 자신이 신생 조선을 살리는 길을 걷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아직도 많은 피를 요구하고 있었다.
'■ 역사 > 역사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더의 오판이 국가의 비극을 잉태하다. (0) | 2010.09.12 |
---|---|
왕에게 동지는 없다, 신하만 있을 뿐. (0) | 2010.09.12 |
하늘이 시킨일 오명(汚名)을 마다하리. (0) | 2010.09.12 |
안중근 의사 가계도의 빛과 그림자 (0) | 2010.03.15 |
신라왕릉 이야기 (0) | 2008.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