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비밀의 문을 연 황남대총
무덤방 크기만 동서 24m에 남북 20m
남북 길이 120m에 봉분 높이 23m에 이르는 현존 한반도 최대 규모 고분인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塚)이 1천600년 만에 마침내 문을 열었다. 남편이자 신라왕이었을 남자는 남쪽 봉분에, 그의 부인은 북쪽 봉분에 자리한 쌍둥이 적석목곽분(績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인 황남대총 특별전이 6일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6일 개막했다.
일반 관람 개시에 하루 앞서 취재진에 먼저 공개된 이번 특별전은 황남대총 쌍분(雙墳) 중에서도 남분(南墳) 봉토 안에서 발견된 나무 기둥 구멍을 기초로 목조건축물을 실물의 95% 크기로 복원한 것이다.
이 모형은 완벽한 복원품이 아니라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기둥 구멍 흔적을 기초로 나무 기둥을 박고 들보를 얹은 수준이지만, 그것만으로도 왜 이 무덤을 대총(大塚. 큰무덤)이라 하는지, 그리고 왜 현존 국내 고분 중 가장 규모가 크다고 하는지를 실감케 하기에 충분했다.
이 목조구조물의 정확한 기능은 알 수가 없다. 무덤을 만들기 위한 구조물이라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최근에는 신라고고학 전공자인 차순철 국립경주분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가 무덤을 조성하기 전에 시신을 임시로 안치해 둔 공간인 빈전(殯殿)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제기하기도 했다.
어떻든 이 목조구조물은 발굴조사 결과 규모가 동서 24m에 남북 20m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 사학과 교수이기도 한 최광식 박물관장은 "내가 명색이 신라사 전공자인데, 그동안 황남대총 발굴성과를 인용해 글도 쓰고 강연도 많이 했지만, 나부터가 막상 이런 규모에 압도당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 목조구조물 복판에 무덤 주인공이 안치된 목곽(木槨)과 목관이 배치돼 있다. 그리고 목조구조물 한쪽(서쪽) 끝에는 토기를 비롯한 부장품을 집중적으로 묻은 공간인 부곽(副郭)이 있다. 이번 특별전은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이런 무덤 배치를 기본적으로 재현하고자 했다.
목조구조물 중앙에 관을 배치하는 한편, 부곽에는 실제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서도 어린아이 키만한 대옹(大瓮) 몇 점을 전시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남분과 북분에서 출토된 무수한 유물 중에서도 각 종류를 대표할 만한 것들을 내놓았다.
신라가 왜 '황금의 나라'인지를 실감케 하는 각종 금그릇과 금귀걸이, 금관, 금제허리띠가 전시장에 그득했다. 비단 황금뿐만 아니라 은제, 동제 그릇도 풍부하고, 이 무덤이 만들어졌을 서기 400년대 신라사회에서는 어쩌면 황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을지 모르는 각종 로만글라스(로마제 유리제품)도 자태를 드러냈다.
박물관 측은 이번 전시를 통해 남분과 북분의 차이 또한 부각하고자 했다. 두 봉분이 맞닿은 곳을 조사한 결과 북쪽 봉토가 남쪽 봉토를 깎아먹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남분이 먼저 만들어지고 북분이 나중에 조성됐음을 의미한다.
나아가 두 봉분은 출토 유물에서도 적지 않은 차이를 보인다. 남분에서는 각종 무기류가 압도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데 비해, 북분에서는 이런 유물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북분에서는 '부인대'(夫人帶)라는 글자를 적은 유물까지 확인됐다. 북쪽이 여성, 남쪽이 남성을 위한 무덤이라는 사실을 이로써 확실히 알 수 있다.
5만8천441점에 달하는 황남대총 총 출토품 중 '겨우' 1천268점만을 내놓은 이번 특별전 전시품만으로도 남분과 북분은 차이가 비교적 확연히 드러난다. 아무튼 1973년 이후 1975년까지 대대적으로 발굴된 황남대총이 이제야 그 비밀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20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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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 용산 이전개관 5주년 기념 특별전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개막
●황남대총북분 출토 금관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용산 이전개관(2005.10.28) 5주년을 기념하여 특별전시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을 개최한다. 1975년까지 경주 황남대총(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 중에서 가장 큰 것으로 봉분이 두개인 쌍릉임. 문화재청의 전신인 문화재관리국이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하였음)에서 발굴한 유물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왕릉의 전모를 한 눈에 알 수 있도록 한 특별전으로 신라 왕릉 하나만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론 처음이다.
신라는 아주 오래 전부터 황금의 나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황금의 나라, 신라의 진정한 모습은 우리 손으로 신라 마립간(서기 4세기대 신라에서 사용한 칭호로 왕을 의미함)시기의 왕릉인 ‘황남대총’을 발굴하고 나서야 체계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거대한 왕릉의 탄생 비밀과 고대국가로 성장한 신라의 국제적 위상, 그리고 신라가 황금의 나라를 이룩하게 된 배경을 밝히는데 역점을 두었다. 총 58,441점의 황남대총 출토품 중에서 금관을 비롯한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들, 서아시아에서 온 유리그릇 등 신라 황금문화의 진수를 보여주거나 문화적 계통을 밝혀줄 1,268점을 엄선하여 전시한다.
이렇게 대규모로 일반인에게 공개하는 것은 발굴 후 처음이다. 아울러 황남대총의 구조를 쉽게 알 수 있도록 전시장에 일부 구조물을 직접 재현해 놓고, 고분 내부 구조를 입체적으로 보여주는 3D 홀로그램 영상물도 마련하였다. 이를 통해 신라 마립간시기의 왕릉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와 더불어 간접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황남대총 출토품은 최근에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새로운 국제적 기준을 제시하고 있어 학문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다. 황남대총이 신라 마립간[麻立干]의 왕릉 중 하나이기에 왕릉의 축조 시점을 추론할 수 있어 절대연대와 더불어 당시의 문화유형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왕릉에서 출토된 고구려 계열의 다양한 문물들은 중국 지안[集安]에서 근년에 발굴된 고구려 태왕릉(太王陵 : 광개토대왕비 근처에 있는 초대형 기단식 돌무지무덤으로 광개토대왕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음)의 주인공을 밝힐 수 있는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준다.
또한 최근 요동치고 있는 일본의 고훈시대[古墳時代]의 절대연대에도 황남대총 남분의 주인공은 새로운 학설의 근거를 마련해 준다. 즉 동북아시아 고고학에서 황남대총이 앞으로 진행될 연구에 시금석이 되기에, 그간의 연구 성과를 공개하는 이번 특별전시는 그 의의가 더욱 크다.
9월 6일(월) 개막식에는 황남대총 발굴에서 영감을 얻어 작곡된 ‘침향무’가 연주된다. 가야금 명인이자 ‘침향무’의 작곡자이신 황병기선생님께서 참석한 가운데 제자 지애리가 연주(장고 김웅식)하는 뜻 깊은 자리이다. 전시는 9월 7일(화)부터 10월 31일(일)까지 국립중앙박물관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에서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 2010.9.6>
■ 황남대총
황남동에 소재한 제98호 고분으로, 1980년 문화재위원회 회의에서 신라 최대의 고분이라는 뜻으로 ‘황남대총(皇南大塚)’이라는 별칭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황남대총이라는 현재의 별칭은 2개의 무덤으로 구성된 고분의 특성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황남대총쌍분’이라고 고쳐서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이 고분은 현존하는 고신라 최대의 표형(瓢形)봉토를 가진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이 고분의 발굴은 신라고분의 내부를 국민에게 보여주겠다는 교육적 의도에 따라, 대통령의 특별지시로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만3년6개월 여에 걸쳐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산하 한시적 조사단체인 경주고적발굴조사단(현 경주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굴 조사되었다.
당시까지만 하여도 5~6세기대의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에 대한 발굴자료는 일제강점기와 해방직후에 이룩하여 놓은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 대개는 일제의 발굴을 빙자한 보물찾기식의 조사와 비전문가에 의한 졸속 발굴작업 등이어서 돌무지덧널무덤의 구조나 매장내용을 과학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기본자료는 거의 없었던 셈이었다.
그러던 차에 황남대총을 제대로 조사하기 위하여 그 전초작업으로 외형이 조금 작은 천마총(황남동 제155호분)을 먼저 발굴하였고, 이어서 황남대총(황남동 제98호분)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들 2기의 고분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결정적인 전기가 되었고, 결과적으로 고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세부내용을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계기가 제공되었다.
이 황남대총의 축조연대는 대형 돌무지덧널무덤의 축조 상한연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고 있는데, 발굴조사자는 묘곽형식의 변천, 고식마구(古式馬具)의 등장시기, 신라토기의 편년, 북분에서 출토된 중국제 흑갈유자기소병(黑褐釉磁器小甁)의 매납시기 등을 근거로, 남분은 4세기 중엽경, 북분은 4세기말~5세기초경으로 추정하였다.
이에 반하여 고구려군남정설(高句麗軍南征說)이라는 고대사 연구성과를 근거로 삼는 귀고리, 신라토기편년 연구자나 혹은 중국에서의 고식마구 출현에 대한 다른 해석을 근거로 삼는 연구자들은 황남대총 남분을 5세기 중후반, 북분을 6세기초로 편년하고 있기도 하다.
또 다른 해석으로는 사료상에 나오는 왕세계(王世系)와 혼인관계 등을 비교하여 남분의 피장자를 내물마립간(奈勿麻立干)이나 눌지마립간(訥祗麻立干)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제시되어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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