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숙종의 빈(조선 제20대왕 경종의 생모)
희빈장씨 묘(禧嬪張氏 墓) - 장희빈(張禧嬪)
●숙종가계도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 빈 산에 낙엽 우수수 떨어지는데
絶后風貌此寂廖(절후풍모차적료) 절색의 왕비 풍모 이리 쓸쓸할 줄이야
可惜一夢難更現(가석일몽난경현) 슬프도다, (그 미모) 꿈에서도 다시 볼 수 없으니
昔年歌曲卽今暮(석년가곡즉금모) 옛날 (장희빈) 노래 바로 이 저녁을 위한 걸 줄이야
서울 서쪽 경기도 고양시에 다섯 왕릉을 모신 서오릉(西五陵)이 있다.
경릉, 창릉, 명릉, 익릉, 홍릉. 숙종이 잠든 곳이 명릉(明陵)인데, 제1계비 인현왕후도 함께 모셔 쌍분이 되었다.
그 옆으로 곡장을 달리해서 제2계비 인원왕후를 모셨다. 숙종이 왼쪽으로 눈길 주면 인현왕후요, 오른쪽을 바라보면 인원왕후이다. 그럼, 숙종의 원비는 어디에 계신가? 서오릉의 하나인 익릉(翼陵)이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숙종 왕릉에서 멀리 떨어진 후미진 곳에 봉분만 달랑 있는 대빈묘(大嬪墓)가 있다.
홍살문도 없고 정자각도 없는 이 무덤이 희빈 장씨, 장희빈의 묘이다.
1722년(경종 2) 10월에 장희빈을 추존하여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이라 했기에 대빈묘라 부르는 것이다. 석물이 간소하게 서 있기는 하나 왕릉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왕과 왕비의 무덤을 능(陵)이라 하고, 세자와 세자빈의 무덤 그리고 왕을 낳은 부모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한다.
장희빈은 왕의 생모지만, 폐비 되었기에 무덤의 명칭이 묘가 되었다. 장희빈은 서오릉 안에 묻히고 싶었을까? 원래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에 묘를 썼다.
그런데 터가 불길하다 해서 바로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로 옮겨졌다. 물론 숙종 때의 일이다. 그렇게 수백년, 광주 땅에서 외로움을 벗 삼아 잠들어 있었다. 잡풀 무성한 묘소, 잊혀 진 여인으로 지내던 이 시절이 차라리 마음 편하지 않았을까?
1969년에 묘역으로 길이 나게 되면서 지금의 자리로 옮겨오게 되었다.
돌고 돌아 초라한 모습으로 숙종의 그늘에 거처를 잡은 것이다.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김해김씨 삼현파(판도판서공 휘 관파)
희빈 장씨 묘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었으나 1969년에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원형을 그대로 옮겨오게 됩니다.
↑옥산부대빈 장씨 묘표(玉山府大嬪 張氏墓表)
↑사진출처 : 나홀로테마여행>柳堂
●장희빈(張禧嬪)
생졸년 : 1659년(효종 10) 11월 3일(음력 9월 19일) ~ 1701년(숙종 27) 11월 9일(음력 10월 10일))
조선 제19대 왕 숙종의 빈『嬪,1659년(효종 10)~1701년(숙종 27)』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아버지는 장형(張炯)이며, 역관(驛官) 장현(張炫)의 종질녀이다. 어려서 나인(內人)으로 궁에 들어가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1686년(숙종 12) 숙원(淑媛)이 되었으며, 1688년 소의(昭儀)로 있을 때 왕자 윤(昀 : 뒤의 경종)을 낳았다.
이듬해 1월 숙종이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반대를 물리치고 윤을 원자로 책봉함에 따라 내명부 정1품 희빈으로 승격되었다.
그해 2월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실권하고 남인이 집권했으며, 7월에는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가 폐위되었다.
1690년 윤이 세자로 책봉되면서 왕비로 책립되었다. 1694년 서인 김춘택(金春澤)·한중혁(韓重爀) 등의 민비복위운동을 계기로 남인이 옥사를 일으켰으나 숙종이 오히려 남인을 제거하고 서인을 재집권시킨 갑술환국이 일어났다.
그해 4월 민비가 복위됨에 따라 다시 희빈으로 밀려났고, 오빠 장희재(張希載)와 함께 복위를 도모했으나 무산되었다. 1701년 민비가 병으로 죽자, 궁인·무녀 등과 함께 민비를 무고(巫蠱)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사사(賜死)되었다.
이때 희빈장씨 및 남인에게 동정적이었던 남구만(南九萬)·최석정(崔錫鼎) 등 소론도 몰락하게 되고 노론이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숙종은 이후 빈을 비로 승격하는 것을 법으로 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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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빈 장 씨 묘지 이야기
[조선시대]
1701년 음력 10월 8일 사사된 희빈의 무덤은 처음에 양주 인장리(仁章里,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일대에 있었다. 그러나 여러 사람들이 묘자리가 불길하고 결점이 많다고 하여 1718년(숙종 44년) 음력 2월 20일 숙종은 희빈의 묘를 천장할 것을 명한다.
이후 당시 예조참의가 1년여 간이나 경기도 내에서 길지를 찾아 헤맨 끝에 그해 음력 12월 장소가 수원 청호촌(靑好村)과 광주 진해촌(眞海村, 지금의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문형리의 두 곳으로 좁혀졌고, 최종적으로 찬반 양론이 있던 수원보다는 광주 진해촌이 좋겠다는 숙종의 결정에 따라 진해촌으로 옮겼다.
이듬해인 1719년(숙종 45년) 천장이 완료되었는데, 천장 때에는 세자(경종)와 세자빈 어씨(선의왕후)가 망곡례를 거행하였다. 한편 희빈의 묘가 천장될 때에는 희빈의 첫 며느리인 단의 빈 심씨(단의왕후)의 상중이었는데, 세자는 상중에 생모의 묘를 옮기면서 생모의 복권을 시도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실제로 희빈은 1722년(경종 2년) 음력 10월 10일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으로 추존되고, 절기마다 제사를 받게 되었다.
[현대]
그러나 현대에 들어오면서 희빈의 묘는 거의 폐허와 다름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이후1969년 묘소를 통과하는 도로가 생기는 바람에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의 서오릉(西五陵) 경내로 이전하였다.
서오릉에는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 金氏)의 능인 익릉(翼陵),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및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가 함께 묻혀있는 명릉(明陵)이 있는데, 여기에 희빈의 묘까지 들어오면서 숙종과 그 왕비 4명은 모두 같은 곳에 묻히게 되었다.
[묘의 구성]
묘소는 봉분 주위를 곡담이 둘러싸고 있으며, 장명등(長明燈)과 문인석(文人石) 한 쌍이 배치되어 있다. 보통 후궁들의 묘소 중 '원(園)'에는 문인석과 석마(石馬) 등이 갖춰져 있으나, 대빈 묘에는 석마 등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또 희빈의 묘는 서오릉 경내에서도 매우 구석진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규모도 작을 뿐 아니라 전체적인 석물이나 분위기 등이 사대부가의 묘보다도 못하다고 한다.
자료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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