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태좌(李台佐) - 백사공파

야촌(1) 2010. 9. 2. 02:27

■ 29世 이태좌(李台佐)

 

   [생졸년] 1660년(현종 1) ∼ 1739년(영조 15).

   [문 과] 숙종(肅宗) 25년(1699) 기묘(己卯) 정시(庭試) 병과(丙科) 3위
   [생원진사시] 숙종(肅宗) 10년(1684) 갑자(甲子)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48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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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字)는 국언(國彦), 호(號)는 아곡(鵝谷). 영의정항복(恒福)의 현손으로, 참판 세필(世弼)의 아들이며, 영의정광좌(光佐)의 재종형이다.

1684년(숙종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9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검영(檢閱)에 올랐다. 이해 8월에 예문관(藝文館)원의 새로운 추천이 있을 때 송정명(宋正明) 등 4인을 천거하자 김진구(金鎭龜)가 난색을 나타냄으로써 이들에 대한 처리문제로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이것은 송정명 등이 과거 성균관에 있을 때 윤증(尹拯)의 소환을 청한 상소문 중에 송시열(宋時烈)을 비난하는 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뒤 사서를 거쳐 1701년 지평으로서 이세석(李世奭)의 과거시험 부정을 탄핵하였으나 왕의 동의를 얻지 못하였고, 희빈 장씨의 사사에 적극 반대하다가 파직된 최석정(崔錫鼎)· 이명세(李命世)를 신구하다가 도리어 삭탈관직을 당하고 선산으로 유배당하였다.

1705년에 풀려나 정언에 등용되고, 사서. 부수찬을 거쳐 이듬해 2월에는 문학으로서 필선 유태명(柳泰明)과 함께 경상좌우도의 암행어사로 다녀왔으며, 이어 부교리· 이조정랑· 부수찬· 집의· 응교를 거쳐 1708년 12월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이때 영서3읍(춘천·횡성·홍천)과 영동9읍에 대한 양전개변을 실시하여, 원전대동(元田大同) 2두(斗)를 감하여 1결(結) 1년 소납(所納)을 14두로 정하고 속전대동(續田大同)·삼수량(三手粮)을 전감(全減)하도록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그의 의견은 이듬해 7월에 가서야 시행되었다.

그뒤 이조참의 대사성· 대사간· 승지· 강화유수를 역임하고, 1716년 공조판서로 있을 때 윤선거(尹宣擧)문제를 논하다가 노론일색인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였으나 곧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721년(경종 1)다시 강화부유수에 재임되고, 동지의금부사, 형조· 예조· 호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722년에 비국당상(備局堂上)에서 북방소요에 대한 국력강화에 대하여 공조판서조태억(趙泰億)의 내수외양(內修外壤)을 공박하고, 자강지도(自强之道)로서 오로지 왕의 일심노력과 억사절재(抑奢節財)·근정수덕(勤政修德)·인재양성과 민심을 단결시키는 것뿐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조세·한재·조창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였다.

1725년(영조 1) 임인옥사로 삭직당하였으나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호조판서· 지경연사(知經筵事)· 병조판서· 이조판서를 거쳤고, 이듬해에는 우의정 1729년에는 좌의정· 판중추부사로 전직되었다가 1736년에는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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