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사언(楊士彦)
조선전기의 문인 및 이름난 필예가(筆藝家)
[생졸년] 1517년(중종 12)∼1584년(선조 17).
[문과] 명종(明宗) 1년(1546) 병오(丙午)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20위
[생원진사시] 중종(中宗) 35년 (1540) 경자(庚子) 식년시(式年試) 1등(一等) 2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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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완구(完邱)· 창해(滄海)· 해객(海客)으로, 주부인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형 사준(士俊), 아우 사기(士奇)와 함께 문명을 떨쳐 중국의 미산삼소(眉山三蘇)에 견주어졌고, 아들 만고(萬古)도 문장과 서예로 이름이 전한다.
1546년(명종 1) 문과에 급제하여 대동승(大同丞)을 거쳐 삼등·함흥·평창·강릉·회양·안변·철원 등 8고을의 수령을 지냈다. 자연을 즐겨 회양군수로 있을 때는 금강산에 자주 가서 경치를 완상하였으며, 만폭동(萬瀑洞)의 바위에 ‘蓬萊楓岳元化洞天’이라 새겨진 그의 글씨가 지금도 남아 있다.
안변군수로 있을 때는 선정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관계(官階)를 받았고, 북변의 병란을 예지하고 마초를 많이 비축하여 위급을 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지릉(智陵)에 일어난 화재의 책임을 지고 해서(海西)로 귀양갔다가 2년 뒤 풀려 돌아오는 길에 죽었다. 그는 40년간이나 관직에 있으면서도 전혀 부정이 없었고 유족에게 재산을 남기지도 아니하였다.
그의 글씨는 해서와 초서에 능하여 안평대군(安平大君)· 김구(金絿)· 한호(韓濩)와 함께 조선 전기 4대서가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큰 글자를 잘 썼다. 한시는 작위성이 없고 자연스러워 천의무봉(天衣無縫)이라는 평판이 있었다.
가사(歌辭)에 어떤 여인의 아름다움을 읊은 〈미인별곡 美人別曲〉과 을묘왜란 때 남정군(南征軍)에 종군하고 읊은 〈남정가 南征歌〉가 있으며, 이밖에 시조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는 지금도 널리 애송되고 있다.
한편, 그는 남사고(南師古)에게서 역술(易術)을 배워 임진왜란을 정확히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문집으로 《봉래집 蓬萊集》이 있고, 유묵으로 그가 지은 〈미인별곡〉과 허강(許橿)이 지은 〈서호별곡 西湖別曲〉이 연세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楊士彦의 南征歌(金東旭, 延世大學校論文集 9집―人文科學―, 1963)
◇蓬萊遺墨(국어국문학 58∼60호,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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