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향복과 포천
글 .사진/김경식
바람 맵찬 겨울날 서울의 북쪽 포천으로 향하는 길에서 만난 나무들은 오히려 자신의 옷을 벗고 생존을 준비하고 있다. 봄날 피어났던 나뭇잎과 여름에 무성하던 숲은 모두 어디로 갔는가.
자식 같던 열매들과 이별한 나무들이 그 해쓱한 얼굴로 살랑거리며 겨울옷으로 무장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지 않은가. 계곡에서 들려오던 낭랑한 여울물 소리 들리지 않지만, 나뭇가지 우듬지 사이로 푸르른 하늘이 올려다 보인다. 한 겨울 나무들은 자신의 옷을 벗어 언 대지를 덮고 있다.
하늘과 햇살을 분배하면서 행복을 나누려는 겨울나무는 절망을 희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향하는 생명나무이다. 이 땅을 살다가 떠나간 조상들 삶의 사연들이 눈발이 되어 흩뿌려 주길 기대하면서 길을 떠난다.
의정부를 지나 포천 가는 길에 슬픔이 휘몰아 가는 시 한편이 가슴에 와서 부서진다.
북쪽은 고향
그 북쪽은 여인이 팔려간 나라
머언 산맥에 바람이 얼어붙을 때
다시 풀릴 때
시름 많은 북쪽 하늘에
마음은 눈감을 줄 모른다.
● 이용악 시인의 시 ‘북쪽’ 전문
우리 조상들은 이 길을 따라 북으로 떠났다. 역사적인 파란과 곡절이 있을 때에 이 길은 슬픔과 이별의 길이었다. 그러나 나무들은 조상들이 세상을 떠날 때마다 자신의 이파리를 파랗게 흔들어 주었다. 더 맑고 행복한 삶을 기원하며 강물은 더욱 파랗게 흘러 갔으며, 가을에는 대지와 강물에 잎을 떨구며 많은 사연의 편지를 보내 주었다.
↑ 산정호수
민초들이 흘린 이별의 눈물의 사연들을 선비들이 기록하더니 오늘까지 전하며 시가 되고, 문장이 되어 문학으로 살아 남았다. 이제 겨울의 나무들은 알몸으로 맑고 행복한 공기 알갱이를 호흡하며 봄을 기다리리던 땅에도 뿌리는 땅속을 파고들며 다가올 봄을 준비하고, 나무들은 저마다 자신과 이웃을 위해 옷을 벗으며 겨울 시련에 도전하고 있다.
황홀한 봄날의 아름다운 삶을 위해 목숨을 걸고 있는 나무들이 홀몸으로 겨울을 나고 있는 것이다.
짧은 봄날처럼 젊음은 꿈결처럼 흘러가고 먼 조상들의 아득한 역사의 갈피를 찾아 길을 나서길 몇 년이던가. 중년의 나이에 길을 떠나며 늘 기대하는 것은 역사적인 인물들과 이름 없던 민초들의 삶을 조명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겨울 기행은 늘 스산한 그리움을 동반했다. 이번 포천 기행도 마찬가지다.
위선과 교만을 포기하고 겸손과 정직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겨울나무들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진 포천의 모습들이 음산하다. 사람살이가 녹녹하지 않아서 인지 도로 주변의 간판들은 더욱 더 커지고 원색적이다.
한강하류를 따라 이어진 자유로를 거쳐 외곽순환도로 일산IC를 거쳐 의정부IC를 나오면 이내 포천입구로 이어지는 의정부 동쪽이다.
43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측석검문소를 나오고 이내 소흘읍이다. 왼쪽에는 고층아파트 군락들이 모습이 흡사 서울 같다. 거의 모든 지방 도시들이 서울을 닮아 간다. 아파트는 늘 성량갑처럼 직사각형으로 세워진 모양을 하고 그만 그만하게 단지를 조성하고 있다.
요즈음은 아파트 이름도 다양한 이름의 마을로 짓는다.
그러나 편안하기 때문에 살아가고 있는 이 아파트의 삶은 머지않아 새로운 문제를 유발시킬 것이다.
43번 국도가 이렇게 변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오른쪽으로는 포천천이 흘러가지만 도로변의 상가들로 인해 잘 보이질 않는다. ‘우리병원’과 버스터미널입구를 지나면 우측으로 가산면으로 이어지는 360번 지방도로와 연결된다. 이곳에서 화산서원은 차로 5분 거리다. 포천 출신의 문인은 양사언 선생이다.
그러나 이번 문학기행을「이항복(李恒福)과 포천抱川」으로 정한 것은 문인으로 이항복을 조명하기 위해서다. 조선의 정치인들은 대부분 문인이다. 관용과 포용이 필요한 시기에 그런 인물을 찾다보니 백사 이항복이 제격이었다. 그의 태어남과 죽음이 또한 예사롭지 않기도 해서다.
↑화산서원
말년에 유배지에서 죽음을 맞이하여 우리가 찾아가는 그 묘소에 묻힐 때까지 그는 험난한 조선의 운명을 두 어깨에 걸머지고 있던 인물이 아니던가. 이제 조선 중기의 문인이며, 뛰어난 명재상이었던 이항복(李恒福, 1556~1618)의 삶의 발자취를 찾아 간다. 그의 호는 필운(弼雲)과 백사(白沙)이다.
고려 문인 이제현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참판을 지낸 이몽량이다. 이항복은 태어날 때부터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틀이나 젖을 먹지 않고 사흘이나 울지 않았기 때문이다. 7세에 이미 문학성이 뛰어난 시를 지을 줄 알았다. 아버지가「칼과 거문고」로 시를 지으라고 하자, 단박에 붓을 들어 썼다고 전하는 시를 읽어 본다.
검유장부기( 劍有丈夫氣)
금장천고음( 琴藏千古音)
칼은
사나이의 기운을
지녔고
거문고는
먼 옛날 소리를
지녔네
어린 이항복의 시상이 놀랍지 아니한가. 이런 시상을 떠올리며 글을 지을 수 있는 것은 하늘이 내린 재능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지금 찾아가는 가산면 금현리 일대는 그의 선현들의 고향마을이다. 포천군은 백사의 할아버지 때부터 은거했던 곳이다.
이항복은 조상들의 산소가 있는 곳이어서 어린 시절부터 자주 찾던 곳이 포천이다. 물론 부모님이 세상을 떠났을 때 몇 년간의 시묘살이도 하였을 것이다. 이항복이 세상을 떠나자 유언에 따라 자신도 부모님 묘소 가까운 곳에 묻혔다.
↑화산서원
포천 고을의 선비들은 백사의 학덕을 잊지 못하여 포천시 가산면 방축리 산16번지에 화산서원을 세워 그의 학문과 덕행을 기억하였다. 1635년에 세웠으니 그 세월이 아득하다. 숙종(1675년)때 ≪화산(花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아 국가적 서원으로 유지되어 왔다.
화산서원의 건축물은 인덕각과 동강재, 필운재 등과 출입문인 내·외삼문이 있다. ‘인덕각’은 이항복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건물이며,정면 3칸, 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동강재와 필운재는 강당을 겸한 재실이지만 학문을 토론하거나 유림이 모임을 갖는 장소로 쓰인다고 하지만 평소에는 이 문을 열지 않는다.
한때 화산서원은 이항복의 동서인 금남군 정충신 장군도 배향하기도 했었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금남로는 금난군을 기념하기 위한 길 이름인데 5,18 민주항쟁 때 당시 전두환 군부와시민군의 격전장이었다. 정충신 장군이 살아온다면 누구의 편을 들었을지 궁금하다.
화산서원은 당시 포천 선비들의 강학장소로 포천 일대의 사림들이 운집하여 백사의 학문과 덕행을 칭송하던 곳이다. 지금은 문이 굳게 닫혀 있는 것이 아쉽다. 찾아오는 이도 없는 듯 한산하다. 서원입구 왼쪽에는 작고 초라한 절 같은 집이 자리 잡고 앉아 있다.
서원 오른쪽 산은 이런 저런 묘소들이 옹기종기 누워있고 아래로는 음식점과 공장들이 즐비하다.
이곳에서 이항복 선생의 묘소까지는 그리 멀지 않다. 다만 묘소 가는 길도 역시 공장들과 음식점들의 간판이 너저분하다. 그러나 이항복 선생의 묘소를 참배하러 가는 길은 얼마나 숭고한 길인가.
주변의 경관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눈발이라도 내려주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이항복 선생의묘소를 찾아 나선다.
묘소입구 마을에는 경주이씨의 문중전시관을 신축하다가 중단한 것이 보인다.
백사 이항복의 14대 종손 이상욱(李相旭, 1942년생) 씨가 10년 넘게 공사를 하는 중에도 아직 완공을 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누구에겐가 들은 기억이 난다. 고가의 재실은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듯이 흉가로 방치되어 있다. 대문이 굳게 잠겨 있는 것을 틈사이로 들여다보니 내부가 어둑하다.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지 아주 오래 되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온 나라가 혼비백산 할 때 흔들림 없이 조선의 조정과 백성을 위해 혼신을 다했던 그의 묘소도 초라하다. 그러나 문인으로 그의 묘소는 오히려 소박하길 다행이다.
만약 그의 묘소가 화려하였다면 문학기행 장소로는 적합하지 않았으리라. 겨울날 그의 묘소는 주변의 공단 지역과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대의 민초들인 노동자들과 그들의 이웃들이 쉽게 다가 갈 수 있는 장소이기에 의미가 있으리라. 묘소 입구에 서 있는 이항복 신도비문은 대제학과 영의정을 역임한 상촌 신흠(1566~1628)이 글을 지었다. 신흠은 대문장가였다.
양명학도 인정한 사람이고 보면 학문과 실천의 범주가 넓었던 사람이다. 문학적인 이론이 정립되었으며 시를 형이상학적으로 인정했다. 그가 이항복 선생의 일대기를 쓴 것은 의당 당연할지 모른다. 신도비문을 찬한 것이 이정구라는 설도 있다. 그 역시 당대 뛰어난 문장가 였기 때문이다. 신도비문의 글씨는 문묘에 배향된 학자인 김집1574~1656)이 글씨를 썼다.
그는 김장생의 아들로 조선의 예학을 확립한 사람이다. 신도비의 전서는 김상용(1561~1637)의 글씨다.
그는 우의정으로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함락에 격분하여 순절한 충신이었다. 비석은 중국황제가 직접 하사한 옥석이라고 전한다.
지금이야 중국제품이 형편없는 상품이지만 당시에는 아마도 포천 근방 100리 내에서는 가장 구경거리였을 터이다. 이항복의 신도비는 당연히 국보급이다. 그러나 비각없이 풍우에 시달리고 있다. 풍수가들은 이항복의 묘터가 주산인 한북정맥 죽엽산(600.6m)을 주목한다.
이곳에서 청룡이 평지로 빠르게 하산했다가 몸통을 비틀면서 들판으로 달리다 여의주를 지니고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한다. 문자로 해석하면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의 명당이라 하는데 지금은 공장들이 들어서서 풍수가의 말을 믿기가 어렵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8명의 정승과 3명의 대제학, 178명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경주이씨들의 득세가 이를 증명하리라.
풍수에 문외한자로서 내가 믿는 것은 오직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이다.
조상들이 덕을 많이 배풀어 후손들이 잘 되고 이웃과도 화목한 것을 믿을뿐이다.
조선왕조신록에 게재된 이항복에 관한 인물평이 그의 삶을 대변하리라.
↑이항복 묘소
광해군실록인 왕조실록 128권, 광해군10년 5월13일자의 기사를 박석무 선생의 번역으로 읽어본다.
「전 영의정 오성부원군 이항복이 유배된 곳(함경도 북청)에서 세상을 떠났다.
항복은 호걸스럽고 시원한 성품에 넓은 아량과 풍도(風度)가 있었다.
젊어서는 이덕형(李德馨)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며 문학(文學)으로 두 분이 함께 진출하여 현달했다.
정철은 항상 상서로운 기린과 봉과 같은 사람이라고 칭했다. 임진왜란에 도승지(都承旨)로서 임금을 호종한 이유로 병조판서(兵曹判書)에 발탁되어 공로가 가장 컸었다.
평생 동안 세력가에게 머리 숙이는 글은 짓지 않았고, 집에 들어오는 선물이나 기증품은 받은 적이 없어
벼슬이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나 집안이 가난하기가 가난한 선비 집안과 같았다.…」
라고 사가(史家)는 역사적 평가를 내렸다.
이항복은 학문이 높고 뛰어난 문인이었다. 문학을 통한 자기 욕심을 버리고 소박한 삶과 겸손한 마음을 가진 정치가였다. 세상이 어지럽고 경제적인 문제로 나라가 난리다. 이런 시기에 이항복의 시 한편은 시대를 뛰어 넘어 오늘에도 유효하다.
世亂疎儒術(세란소유술) : 어지러운 세상, 공자 가르침 멀고
時危忌太言(시위기태언) : 시절이 하도 험해 큰 어른의 말도 꺼리네
不眠憂社稷(불면우사직) : 잠 못 이루고 나라 걱정하면서도
無力濟黎元(무력제려원) : 창생들을 구제할 만한 힘도 없도다.
草草新年夢(초초신년몽) : 초조해 하는 것은 새해의 꿈
蕭蕭古驛軒(소소고역헌) : 쓸쓸한 것은 옛 역사로다
家鄕已千里(가향이천리) : 고향집 벌써 천리나 멀어
誰肯問寒暄(수긍문한훤) : 그 누가 내 안부를 물어줄거나.
● 이항복의 시 ‘잠못 이루며’ 전문
이항복은 당파를 초월한 분이었고 오직 조정과 백성이 있을 뿐이었다.
문장과 학문이 뛰어나 대제학을 역임하였으며, 정치적 역량이 대단하였고 덕이 많은 영의정을 지냈다.
다섯 살이나 적은 한음 이덕형과 벼슬길에 나섰다. 이덕형이 먼저 대제학(31세)에 오르고 정승의 벼슬에도(38세) 먼저 오른다.
그러나 이항복은 이덕형을 경쟁의 대상이나 라이벌로 여기지 않았다. 가슴이 넓은 정치가였다.
한음 이덕형도 넓은 아량을 가졌기에 오늘까지 그들의 우정이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이덕형이 5년 먼저 세상을 떠나자, 시신을 염해주었고 묘지명을 지어 이덕형의 삶을 정리해 준 사람도 다름아닌 이항복이었다.
훌륭한 문장과 사물을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그였기에 이율곡 선생의 비문, 사암 박순의 행장, 이순신 장군의 노량비문, 이언적 묘지명과 문집발문, 권율장군의 묘지명이 모두 이항복이 쓴 것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일등공신이며 도학에 바탕을 둔 문장으로 시와 문장 위인들의 역사적 평가를 담당하는 역할도 맡았다. 임진왜란의 혼란한 와중에도 자신의 목숨을 걸고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여 명나라의 원병을 받아 왜적을 물리친다.
평상시에는 늘 여유있고 농담잘하는 사람이었지만 공평하지 않고 정의롭지 못하면 목숨을 걸고 바로잡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성품을 가진 사람이다. 결국 광해군의 계비 인목대비의 폐비를 반대하다 북청까지 유배가서 죽음을 맞이한 사람이다.
문권을 잡은 대제학과 덕으로 다스린 영의정을 지낸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충신이라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가 주어진다. 이항복의 애국심과 공평무사한 일처리, 훌륭한 문장과 학문은 민족사상의 바탕이자 영원한 사표다. 선비 정신과 청렴한 공직생활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정치가인 그의 삶은 민족혼의 큰 본보기다.
이항복인 국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시종신이 된 때는 1590년(선조 23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2년전이다. 1592년 4월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로서 선조를 모시고 임진강을 건넌 공을 인정받아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의 군봉을 받는다.
평양에 도착하자 형조판서에 오르고 병조판서로 옮겨 왜군 격퇴의 지휘봉을 잡는다.
임진왜란 동안 다섯 차례나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군권을 잡고 왜적을 물리치기 위한 외교적인 지혜를 발휘한다.
임진왜란 당시 중국인 정응태가 황제에게 조선이 명을 침범한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무고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명나라에서 조선을 적국으로 여길 수 있는 매우 민감한 상황이었다.
이항복은 선조의 명령을 받고 명나라로 달려가 황제를 설득한다. 그의 외교력으로 정응태의 무고임을 밝혀내었으며 왜군을 물리치는 계기를 마련한다. 이항복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영의정에 오른다. 조선을 구한 공로가 인정되어 '오성부원군'에 봉해지고 이런 이유로 ‘오성대감’이라는 별칭이 오늘까지 전해온다.
권력은 10년을 가지 못하는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하던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집권하자 그는 이제 역적이 된다. 북청땅으로 귀양길에 오른다.
광해군은 외교적 역량은 있었으나 당파싸움이 치열해지면서 판단이 흐려진다.
결국 이복형제를 죽이고 인목대비를 폐비한다.
이항복은 죽음을 무릅쓰고 이를 반대하다가 유배지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이항복은 63세의 노구를 이끌고 북청으로 길을 떠난다.
그가 눈물을 흘리며 지었을 이 시조는 아직까지 심금을 울린다.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
고신원루를 비삼아 띄워다가
임 계신 구중심처에 뿌려본들 어떠리
찬바람 휘몰아치던 겨울날이었을 1618년 1월18일 회양의 철령을 넘으면서 이 시를 썼을 것이다.
이 시조에는 비대신 눈발이 나오지 않은 것이 시기에 적절하지 않지만 임금을 사랑하는 정은 절정하다.
그해 2월6일 유배지 북청에 도착한 이항복은 마음을 달래려고 시 한수를 쓴다.
‘겹겹이 싸인 산들이 정말로 호걸을 가두려는데(群山定欲囚豪傑)/
고개 돌려 일천봉우리 바라보니 갈 길을 막는구려(回望千峯鎖去程)’
라고 읊었으니 얼마나 가슴이 막혔으면 그런 시를 지었으랴.
1618년 5월13일 새벽녘 이항복은 63세로세상을 떠난다. 유배지에 도착한지 3개월이 지나서다.
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정충신 장군이 이항복을 수행했는데 시신을 거두어 선산이 있는 포천으로 6월17일 출발하여 7월12일 도착한다.
그의 부음 소식을 들은 주변의 백성들이 달려와 모두 통곡하였다고 전한다.
그때부터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곳 포천 금현리에 고이 잠들어 있다.
포천군 가산면 금현리는 오래된 마을이다. 지금은 공장들이 스며 들어와 많은 지역이 옛 모습을 잃었다.
다행스럽게 이항복의 묘소와 사당이 존재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 마을의 이름은 이성계의 둘째부인 강씨(신덕왕후)가 살았기에 궁말 또는 궁촌, 궁동 이라고도 부른다.
이항복 선생의 묘소는 합장묘이다. 첫째부인 안동권씨는 권율장군의 딸이다.
둘째 부인은 금성오씨인데 본래 이덕형이 양보한 여인이라고 한다.
북청 유배지에서 쓴 ‘雪後(설후)’라는 시가 이항복 문학의 진면목이다.
그러나 왠지 말년의 고독한 절망감을 표현하여 쓸쓸하다.
눈 온 뒤 산 사립은 늦도록 닫혀 있고
시내 다리 한낮인데 오가는 사람 적다.
화로에 묻은 불은 열기가 모락모락
알 굵은 산밤을 혼자서 구워 먹네.
눈 덮인 산속마을의 사립문도 닫혀 있는 오두막집에서 밤을 굽고 있는 이항복 선생의 모습이 측은하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얼마나 돌아갈 날을 기원했겠는가. 그 마음을 상상해 본다.
자신의 고향 포천과 한양에서 자신을 보고파 하던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울음을 찾았으리라.
그러나 이런 시기도 잠깐 그해 5월 고독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포천시 전경
포천시는 경기도 동북부 내륙에 위치한다. 동쪽으로 가평군과 강원도 화천군, 서쪽은 연천군, 동두천시, 양주시, 남쪽은 의정부시, 남양주시, 북쪽은 연천군, 강원도 철원군과 인접하고 있다. 산의 지세는 높아 한북정맥이 남북 방향으로 길게 이어졌다.
한북정맥은 함경남도와 강원도의 경계를 이루어 내려오다 평강의 추가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을 말한다.
한북정맥의 산들 중에서 광덕산(1046m), 백운산(904m), 운악산(936m)의 거봉들은 사뭇 강원도의 산세(山勢)와 흡사하다. '외부에서 물을 받지 않는다' 는 뜻의 포천(抱川)이란 지명을 만들었다.
일동면을 관통하는 일동천도 영평천으로 합쳐져서 연천군 신답리 아우라지 나루에서 한탄강에 합류한다.
포천군의 또 다른 큰 하천인 산내천(山內川)은 서쪽 외곽을 적시며 연천군 초성리를 지나 한탄강으로 흘러든다.
포천시는 역사는 아득하다. 삼한시대(마한), 삼국시대(마홀군)으로 고구려에 속하였다. 통일신라(견성군),고려시대 때부터 포주군(抱州郡)이라고 했으니 포천이란 이름은 이미 천년이 넘은 지명이다. 조선 1413년에 포천군이 되었다.
이항복 묘소를 참배와 답사를 겸하고 나니 이내 점심때다. 점심식사를 위해 여러곳을 쏘다니며 찾아본다. 청성체육공원 앞에 있는 ‘모내기’라는 신식 한옥집은 사뭇 품격도 있고 음식맛이 좋기로 소문이 나 있다.이곳에서 바라보는 포천시의 중심지는 길게 드러 누운 듯 오밀조밀하게 도시가 연결되어 있는 모습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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