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협(李相協)
[생졸년] 1893년(고종 30)∼195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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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인. 본관은 경주(慶州). 호는 하몽(何夢). 서울에서 용우(用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909년 일본에 건너가 게이오대학(慶應大學)에 유학하고 1912년 귀국하여 매일신보사에 입사하였다. 이후 변일(卞一)을 통하여 기자수업에 정진하며 전인적 언론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는 한편, 〈눈물〉(1913)·〈정부원 貞婦怨〉·〈해왕성 海王星〉(1916∼1917)·〈무궁화〉(1918) 등 신소설을 《매일신보》에 연재, 발표하여 문명을 얻고, 1918년 매일신보사 편집장이 되었다.
이듬해에는 고종의 국상관계 취재를 전담하여 그 기사로 만인의 심금을 울렸다.
3·1운동에 충격을 받고 기자생활에서 물러나 신문관(新文館)에 관여하다가, 이해 가을경부터 민족지(民族紙)창간준비에 전념한 결과 이듬해 1월 6일 《동아일보》의 창간허가를 일제 당국으로부터 받게 되어 4월 1일 창간을 보기에 이르렀다.
당시 《동아일보》 초대편집국장으로 논설위원과 사회부장·정리부장을 겸하여 1면에 ‘횡설수설’란을, 사회면에 ‘휴지통’란을 신설, 집필을 도맡다시피 하여 20대의 만능신문인으로 언론계의 혜성이었다.
이듬해 가을 이 신문의 편집 겸 발행인의 명예직을 사임하고 편집국장으로 근속하며 1922년 4월 12일자 창간2주년 기념호에 백악산인(白岳山人)이라는 필명으로 〈재등실(齋藤實)군에게 여(與)함〉을 발표하여 조선총독의 비정을 날카롭게 성토함으로써 압수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같은해 8월 6일에는 일본에 특파되어 니가타현(新潟縣) 시나노천(信濃川)수력전기회사의 한국인학살사건현장 특보를 하는가 하면, 외국에 나가 광고까지 유치해와 1923년 봄 동아일보사 상무취체역 겸 편집국장으로 정경부장이 되고, 이해 9월 일본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사건 때 단독 도일하여 목숨을 걸고 한인학살현장 특보의 개가를 올렸다.
이듬해 4월 동아일보사 퇴사 후 9월 조선일보사 이사 및 편집고문으로 입사하여 조석간 발행으로 만화 〈멍텅구리〉의 연재를 시작하고, 여기자 최은희(崔恩喜)의 특채 등으로 획기적인 지면쇄신을 단행하였으며, 1924년 9월 필화사건으로 신문이 무기정간되자 사직하였다.
1926년 11월 《시대일보 時代日報》 판권을 인수하여 《중외일보 中外日報》로 제목을 바꾸어 속간하였다. 1931년 이 신문사를 떠나기까지 통산 12년간 민간항일신문 3대지의 기반을 다져놓았다.
1926년 가을 정음회(正音會)발기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33년 다시 언론계에 복귀, 매일신보사 부사장에 취임하여 1941년까지 8년간 재직하였다.
8·15광복으로 《매일신보》가 미군정에 인계될 당시 한때 부사장을 지냈으며, 1951년 자유신문사(自由新聞社)사장 또는 부사장으로 만년까지 근속하였다.
편저에 《경기도지 京畿道誌》 3권(1954)이 있다.
[참고문헌]
◇記者半世紀(柳光烈, 瑞文堂, 1969)
◇韓國新聞史硏究(李海暢, 成文閣, 1971)
◇新聞夜話(金乙漢, 一潮閣, 1971)
◇李昇馥八旬記 三千百日紅(任重彬, 人物硏究所, 1974)
◇韓國新聞史(崔埈, 一潮閣, 1974)
◇韓國言論人物誌(趙容萬外, 韓國新聞硏究所, 1981)
◇何夢의 才勝薄德(李承萬記, 月刊中央, 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