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승정원일기」에 나타난 청계천 준천(濬川)의 기록
1.「승정원일기」의 자료적 가치
「승정원일기」는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으면서 비서실의 기능을 했던 승정원에서 날마다 취급한 문서와 사건을 일자별로 기록한 책이다. 원래 조선건국 초부터 작성된 것으로 여겨지나, 현재는 1623년(인조 1)부터 1910년(융희 4)까지 288년간의 기록 3,243책이 남아 있다.
현재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승정원일기」는 분량 면에서 세계 최고의 역사기록물이라 할만하다.
「승정원일기」는 1999년 4월 9일 국보 제303호로 지정되었고, 2001년 9월에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
었다.
정치의 미세한 부분까지 정리된 방대한 기록, 288년간 빠짐없이 기록된 날씨, 왕의 동선 이 상세히 나타난 점은 「승정원일기」만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가치라 할 수 있다.
「승정원일기」는 실록편찬에 가장 기본적인 자료로 활용되었으며, 왕의 최측근 기관인 비서실에서 작성함으로써 국왕의 일거수일투족과 정치의 미세한 부분까지 자세히 기록하였다. 특히 국가적 역량이 결집된 행사인 경우 왕과 신하들의 대화까지 기록하여 현장의 모습을 생생하게 접할 수 있게 한다.
2. 영조시대 청계천공사, 현장의 모습들
영조가 재위 기간 의욕적으로 추진하였던 청계천공사에 관한내용을 「승정원일기」에서 찾아보면 「승정원일기」가 얼마나 상세히 싣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특히 대화체로 영조와 신하들의 의견을 적고 있어 현장의 생동감이 살아난다.
다음은 1758년(영조 34) 5월 2일 영조가 미시(未時:오후 2시경)에 숭문당에 나갔을 때의 「승정원일기」기록이다. 영조가 어영대장 홍봉한을 비롯하여 승지, 기사관, 기주관 등과 준천문제를 깊이 논의한 사실이 나타난다.
영조 : 저번에 광충교(廣衝橋)를 보니 금년 들어 더욱 흙이 메워져 있다. 가히 걱정이 된다.
홍봉한 : 하천 도랑의 준설이 매우 시급합니다.
만약 홍수를 만나면 천변(川邊) 인가는 필시 대부분 떠내려 가는 화를 입을 것입니다. <중략>
영조 : 경들이 도랑을 준천하는 일을 담당하면 좋겠다.
홍봉한 : 신들이 담당하게 된다면 어찌 진력하여 받들어 행하지 않겠습니까?
영조 : 서울의 백성들을 불러 물은 후에 실시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설령 하천을 준설해도 사토(沙土:모래흙)를 둘 곳이 없지 않은가?
홍봉한: 어떤 이는 배로 운반한다고 하고, 어떤 이는 수레나 말로 실어 나른다고 하는데, 한 번 시험해보면
알맞은 방도가 있을 것입니다.
영조(웃으며) : 성중(城中)에 배를 들일 수 있는가?
홍봉한 : 배로 운반한다는 것은 큰 비가 내린다면 가능한 방법인 듯합니다.
영조 : 사관(史官)들은 의견이 다를 수도 있으니 각자 소견을 말해보라.
사관 : 도랑을 준설하는 것이 급한 일이나, 만약 민력을 동원한다면 초반에는 원망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중략>
영조 :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말해보라.
기사관 이해진 : 신은 시골사람이라 준천의 이해난이(利害難易)에 대해 정견(定見)이 없습니다만, 도성내의
여론을 들어보니 모두 준천을 하는 것이 옳다고 합니다.
기주관 서병덕 : 준천의 방도에 대해서 강구해 본 적은 없습니다만, 북악이 잘 붕괴되고 동쪽 도랑이 잘 막
히니, 먼저 북악의 수목(樹木)을 기르고, 동쪽도랑의 막힌 부분을 깊이 파낸 연후에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입
니다.
영조 : 옳은 의견이다.
[上曰, 頃見廣衝橋比年尤爲湮塞, 可悶矣。鳳漢曰, 川渠之浚, 急於救焚拯溺, 若遇大水, 則川邊人家必多漂没矣。……上曰, 卿等擔當濬渠, 可也。對曰, 若使臣等當之, 則何不盡力奉行乎 上曰, 召問都民, 而後試之, 可也。上曰, 雖使濬掘, 而其沙土, 無處可置矣。鳳漢曰, 或云舟以運之, 或云車以載之, 馬以駄之, 而第試事, 則可有區處之道矣。上笑曰, 舟何以入城中乎鳳漢曰, 舟運之說, 若値大水, 則似有運去之道矣。上曰, 史官, 不爲苟同, 而各陳所見, 可也。臣達曰, 濬渠雖急, 而若動民力而爲之, 則不無初頭民怨。……上曰, 上番陳之。海鎭對曰, 臣鄕曲之人也。浚渠之利害難易, 未有定見, 而第聞城內物議, 則皆以可濬矣。秉德對曰, 浚渠之策, 曾未講究, 而北岳善崩, 東溝下塞, 必須先養北山之樹木, 深濬東溝之湮塞, 然後乃可責效矣。上曰, 是矣]
「승정원일기」는 『영조실록』과 비교해보면 특히 그 내용의 상세함을 알 수 있다.
『영조실록』에는 영조 36년 2월 23일 호조판서 홍봉한이 성 밖의 물길을 잡는 방법에 대해 아뢰자 이를 윤허한 내용이 짧게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기록은 매우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진시(辰時:오전 8시경) 희정당에서
영조 : 나의 마음은 오로지 준천(濬川)에 있다. <중략>
영조 : 오간수문의 역처가 이미 깊어졌으니 6일내 한 일이 대단하다.
홍봉한 : 그저께만 해도 역군이 수문 간에서 몸을 펴지도 못했으나 한번 구멍을 뚫으니 점차 팔 수 있었습니
다. 이것은 진실로 많은 백성의 힘이 하늘을 이긴 것입니다.
영조 : 정말 그러하다.
홍봉한 : 맹인들도 부역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영조 : 괴이한 일이다. 그들이 흙과 물을 볼 수 있는가?
홍봉한 : 반드시 그들이 가동(家僮)과 노비를 부역에 보내려는 것이니, 신들이 보내지 말라는 뜻으로 분부를
내렸습니다.
영조 : 그 마음은 가상하다.
[上曰, 予之一心, 在於濬川 ……上曰, 五間水門役處旣深, 六日內役事, 可謂壯矣。鳳漢曰, 再昨則役軍, 不能屈伸於水門之間矣。一出穴之後, 役處漸出, 眞所謂人衆勝天矣。上曰, 然矣。鳳漢曰, 盲人欲爲赴役·聚會自願矣。上曰, 可怪矣, 渠何能見水土乎 鳳漢曰, 必以渠輩家僮僕赴役, 而臣勿赴之意, 已分付矣。上曰, 其心則可嘉。]
◇승정원일기_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사이트 인용
3.『준천사실(濬川事實)』의 편찬과 ‘경진지평(庚辰地坪)’ 표석 설치
1760년 드디어 청계천 공사가 완성되고 영조는 『준천사실』의 편찬을 명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36년 3월 16일의 기록에는 『준천사실』을 만들었다는 것과, 영조가 홍봉한에게 ‘준천한 뒤에 몇 년이나 지탱할 수 있겠는가’를 물었고, 홍봉한이 말하기를 ‘그 효과가 백년을 갈 것입니다’ 라고 답한 내용, 사관이 이를 비판한 내용이 나온다.
「승정원일기」의 같은 날 유시(酉時:오후 6시경) 희정당에서 호판, 판윤, 훈련대장 등이 입시(入侍)했을 때
의 기록을 보자.
영조 : 준천공사는 지금 어디까지 했는가?
홍봉한 : 송전교에서 광통교까지 이미 완료되어 내일 연결될 것입니다.
수표교에서 광통교에 이르는 구간은 너무 넓어 공역(工役)이 갑절 어려웠습니다.(이하 공사 경과보고)
영조 : 나는 사토(沙土)의 처리가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금 번의 일은 매우 잘 된 것 같다.
홍계희 : 옛날에도 하천을 다스린 사례를 신도 들었습니다만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글로 써서 공사의 사실
을 기록해야 하는데 제목 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영조 : 『준천사실』로 이름을 정하라.
영조 : 금번 준천 후에 다시 막히는 일이 없겠는가?
홍봉한 : 갑을지론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백년 내에는 반드시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영조 : 승지의 의견은 어떤가?
이사관(승지) : 얼마나 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갑자기 다시 막히는 일은 분명 없을 것입니다.
홍봉한 : 차후에 한성부의 장관과 삼군문 대장이 주관하여 군문(軍門)에서 각기 약간의 재력을 각출하여 사
후 준천의 비용에 대비한다면 매우 편의할 것입니다.
구선행 : 홍봉한의 의견과 같습니다. 이렇게 한 연후에 앞으로도 실효가 있을 것입니다.
금 번 굴착이 끝난 후 각 다리에 표석(標石)을 만들고 차후에는 이것으로 한계를 삼아 항상 노출되어 있도
록 하는 것이 좋습니다.
영조 : 표석은 ‘경진지평(庚辰地坪)’으로 새기고 침수되지 않게 하면 유효할 것이다.
[上曰, 濬川役事今至何境乎 洪鳳漢曰, 自松廛橋至廣通橋, 已爲, 自明日始編結矣。自水標橋至廣通橋, 其間闊大, 工役倍難矣。上曰, 予以沙土處置爲難, 而今番事善爲矣。……洪啓禧曰, 昔之導川, 臣亦聞之, 而未得其詳, ……作一文字以記事實, 而題目難矣。上曰, 以濬川事實, 名之, 可也。……上曰, 今番濬川後, 能不更塞乎 鳳漢曰, 不無甲乙之論, 而百年內必不堙塞云矣。……上曰, 承旨之意, 何如 李思觀曰, 久近實不知, 而必不至猝然更塞矣。鳳漢曰, 此後使京兆長官·三軍門大將主管, 軍門各出若干財力, 以爲日後濬川之費, 則事甚便矣。具善行曰, 小臣之意, 與戶判同矣。如此然後, 來頭亦有實效矣。今番掘去後, 各橋皆有標石, 此後以標石爲限, 使之常露則好矣。上曰, 標石刻以庚辰地平, 而使不堙沒, 則有效矣]
이상에서 청계천 준천 사업의 경과를 「승정원일기」를 통해 살펴보았다. 『영조실록』에는 간략하게 결과에 해당하는 사실이 기록된 반면, 「승정원일기」는 결과가 나오기까지의 과정이 국왕과 신하의 대화형식으로 설명되고 있다.
또한 일이 추진된 시간, 장소, 배석인원에 대한 기록이 자세하여 국왕의 동 선을 추적할 수 있고,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제기된 찬반의견을 알 수 있다. 특히 경진지평 표석은 현재의 광통교 다리에서도 볼 수 있어 역사의 생동함을 확인할 수가 있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청계천 공사기록은『조선왕조실록』보다 「승정원일기」가 보다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조선왕조실록』이 국왕 사후사관이 기록한 사초를 중심으로 재편집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비해 「승정원일기」는 국왕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현장의 모습을 그대로 담았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는 1차 사료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던 것이다.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서는 「승정원일기」의 번역 사업을 추진 중에 있다.
계획된 책의 분량은 번역본으로 1,600책 정도이고, 1년에 20~30책이 번역되니 최소 50년에서 80년이 걸리는 사업이다. 보다 많은 인력이 투여되어 「승정원일기」의 완역이 앞당겨졌으면 한다.
「승정원일기」의 완역은 『조선왕조실록』의 완역이 그랬던 것처럼 조선시대 정치와 경제, 문화를 보다 깊고 풍부하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글쓴이 : 신병주(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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