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02. 23일 한겨레신문의 기고문입니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길을찾아서]
독립운동가 인정받지 못한 임정고문 - 동농 김자동
임정의 품 안에서
보재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가 끝난 뒤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보재는 그해 7월 박용만· 윤병구· 이승만 등과 함께 재미동포 대표자회의를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열어, 한인들의 각성과 단결을 촉구했다.
1909년 2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국민회가 결성된다. 이후 국민회는 오랫동안 재미 항일운동의 중심이 됐는데, 보재는 샌프란시스코 총회에서 총회장으로 당선된 정재관 선생과 더불어 이 기구 창설을 주도했다.
두 분은 그해 5월 국민회 샌프란시스코와 하와이, 두 지방 총회의 위촉으로 원동 방면에서 활동하도록 파견돼 1917년 러시아 땅에서 서거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보재는 이때 석오 이동녕 등과 간도 지역에 서전서숙을 세워 민족교육에도 힘썼다.
국내에서 의병투쟁을 하다 잔여 병력을 이끌고 만주 지역으로 후퇴한 유인석 선생, 간도 절도사 출신의 이범윤 선생, 홍범도 장군에게는 항일 통합군단을 편성하도록 촉구했다. 안중근 의사도 옥중에서 보재를 높이 평가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15년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등이 상하이에서 신한혁명당을 결성했을 때도 당시 러시아에 있는 보재가 본부장으로 추대 받았다. 석오가 1919년 임시정부가 수립될 당시 보재와 같은 능력과 명성을 구비한 어른이 살아 계셨다면 임정 초기에 좀 더 큰 몫을 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는 말도 들은 적이 있다.
보재는 항일투쟁의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장’을 받았다.
반면 일성 이준 선생은 그보다 한 급 위이며 최상급인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일제의 침략 만행을 호소하러 갔을 때, 보재는 정사, 이준과 이위종은 부사라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준은 일제의 농간에 의해 만국평화회의 참석을 거부당한 뒤 바로 분사해 이후 활동이 없었지만,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보재는 이후에도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미 타계한 항일투사에 대해서까지 후세들이 등급을 정해 평가하는 제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적어도 등급을 정하는 데는 기준이 명확하고 공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기야 보재는 그래도 서훈을 받았지만, 내 할아버지(동농 김가진)는 아직까지 서훈이 보류되고 있다.
처음 보류된 이유는 할아버지가 충청감찰사로 재직할 때 관군을 동원해 의병장 민종식을 체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 근거는 <매천야록>에 그런 내용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매천 황현은 물론 애국지사이지만 보수적인 분으로 개혁파인 할아버지에 대해 다른 글에서도 좋지 않게 평한 바 있다.
‘야록’이라 함은 그 자체 정사는 아니다. 나도 사실을 알 길이 없으므로 얼마 전 민족문제연구소에 조사해 주도록 부탁한 일이 있다. 전해들은 말을 적은 ‘야록’과 달리 연구소에서 조사한 결과, 당시 일본 주차군사령부의 보고를 보면 민종식 의병장은 일본군이 체포했다는 것이 분명히 나타나 있다.
그때까지는 의병 토벌이 한국 관헌 소관이었고 일본군의 토벌작전은 불법이었으나, 실제로는 많은 지역에서 거의 전적으로 일본군이 토벌작전을 진행했다. 또 다른, 일본군 보고에, 한국 관헌이 토벌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일군이 ‘부득이’ 투입된 것이라는 기록도 발견됐다.
전에는 보훈심사가 만장일치제로 운영되어, 곧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통과가 안 되므로 ‘보류’해야 했다. 일단 보류되면 ‘새로운 사실’을 제시해야만 재심할 수 있도록 돼 있다. 몇 해 전 만장일치제는 개정되었으나 실제로 한두 명이 심사를 지연시키고자 계속 이의를 제기하면 심의 대상자가 많은 상황에서 한 사람의 문제만 갖고 시간을 지나치게 소비할 수 없어 다시 ‘보류’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할아버지가 의병장 체포와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에도 자신들의 잘못된 판단을 되돌리는 것이 싫어서인지 계속 당치도 않은 구실로 심사를 지연시키는 이들이 있다. 이런 한두 사람 때문에 지하 독립운동 조직 대동단의 총재였고, 74살에 망명해 임시정부의 고문을 지냈던 할아버지는 아직도 독립운동사에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분으로 남아 있다. 후손으로서 너무나 죄송스럽고 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 기념사업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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