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동암 이진선생

동암공(東菴公) 이진(瑱) - 고려사절요에서

야촌(1) 2010. 1. 16. 02:35

■ 동암공(東菴公) 이 진(李瑱)

   고려사절요에서---

 

1. 충렬왕 4(忠烈王四)

   1298년(무술 24)), 원 대덕 2년

 

● 왕이 연등절(燃燈節)이므로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문한학사(文翰學士)
최감(崔旵). 박전지(朴全之). 오한경(吳漢卿). 이진(李瑱)에게 상승국(尙乘局 : 궁중의 수레나 말을 맡아보는 곳)의 안마를 하사하였다. 여러 신하가 헌수 하였는데, 차례가 네 학사에게 이르자 왕이 앞으로 나오라 하여, 술잔을 주고 이르기를,「오직 너희 여러 학사들은 바른 말을 하고 숨기지 말라」하였다.
 
●사림 학사(詞林學士) 박전지(朴全之)ㆍ오한경(吳漢卿)과 시독학사 이진(李瑱)과 시강학사 권영(權永)에게 붉은 가죽띠를 하사하였다. 왕은 항상 좌우를 물리치고 사림원에 행차하여 네 학사와 더불어 정치에 관한 것을 상의하며 손수 주식을 주면서 조용히 하루를 보내고, 혹 밤중까지 이르게 되면 궁 안의 촛불을 내주어 집까지 보내 주기도 하였으니, 총애함이 이에 비길 데가 없었다. 
 
2. 충렬왕 4(忠烈王四)
   갑진 30년,(1304), 원 대덕 8년
 
●국학의 섬학전(贍學錢)을 설치하였다.
과거에 찬성사 안향(安珦)이 학교 교육이 크게 무너지고 유학이 날로 쇠퇴하는 것을 우려하여 양부(兩府)와 의논하기를,「 재상의 직책은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는데, 이제 양현고가 탕진되어 교육에 쓸 자금이 없으니, 청컨대, 6품 이상은 각기 은(銀) 한 근씩을 내고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베를 내게 하여 양현고에 귀속시켜서 본전은 그대로 두고 이식을 받아서 영구히 교육 자금으로 만들자」 하니, 양부에서 이를 좄았다. 그 사실이 보고되니, 왕이 내고(內庫)의 금전과 양곡을 내어 보조하였다.
 
이때 밀직 고세(高世)라는 사람이 자기는 무인(武人)이라 하며 돈을 내려하지 않으니, 안향이 여러 재상에게 이르기를,「공자의 도가 만세에 법을 내려주었다,
 
신하가 임금에게 충성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효도하며, 아우가 형에게 공경하는 것이 누구의 가르침인가. 만일 '나는 무인인데 무엇 때문에 애써 돈을 내어 저 생도들을 양성하겠느냐'라고 한다면, 이 사람은 공자를 위하지 않는 것이니, 되겠는가」 하니, 고세가 듣고 매우 부끄러워 즉시 돈을 냈다.
 
향은 또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고는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 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또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史書)들을 사오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향이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산(李□)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 교수도 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향은 또 남은 돈을 박사 김문정(金文鼎)에게 주고는 강남에 보내어 공자와 70 제자의 화상을 그리고, 또 제기ㆍ악기ㆍ육경ㆍ제자ㆍ사서(史書)들을 사 오게하였다. 이때에 와서 향이 밀직부사로 치사한 이산(李□)과 전법판서 이진(李瑱)을 경사교수도감사(經史敎授都監使)로 삼기를 청하였다.
 
이리하여 금내학관(禁內學官 : 대궐 안에 있는 학관)과 내시(內侍)ㆍ삼도감(三都監)ㆍ오고(五庫)에서 수학을 원하는 선비와 칠관(七館)ㆍ십이도(十二徒)의 여러 생도들이 책을 끼고 와서 수업하는 자가 수백 명에 달하였다.

 3. 충렬왕 5(忠烈王五)
    정미 33년(1307), 원 대덕 11년  
 
●전법판서이진(李瑱)이 전왕에게 글을 올리기를,「전하께서 제실(帝室)에 공훈을 세워 돌보고 대우함이 날로 높
   아가니, 진실로 공이 있더라도 마땅히 자랑하지 말 것이며 총애를 받으면 놀란 것처럼 하여야 하겠습니다.
 
또 조신들과 더불어 화합하기를 물과 젖같이 해야 할 것입니다. 벼슬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가볍게 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벼슬은 공이 없는 사람에게 함부로 줄 수 없는 것 인데, 하물며 그 족당에게 까지 미치는 것이겠습니까.
 
부왕이 사급 한 것이라고 사칭하고 부고의 전곡을 도둑질하는 자를 모든 사람들이 미워하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토지를 사급 한 것은 공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일체 관에 회수하고, 필요 없는 관원이 많아 국록이 낭비되니 6부의 상서 외에는 모두 겸병하여 줄이도록 하소서. 이 몇 해 동안 한재와 흉년으로 백성들이 모두 먹고 살기에도 어려우니, 의당 급하지 않은 공사는 중지하소서.」하였더니, 가상하게 여겨 받아들이고, 관계를 뛰어넘어 정당문학으로 제수하였다.
 
4. 충렬왕 5(忠烈王五)
   무신 34년(1308) 원 무종(武宗) 지대(至大) 원년
 
●겨울 10월에 중문에 방을 붙여 이르기를,「왕륜사의 주지 인조(仁照), 용암사(龍巖寺)의 주지 용선(用宣), 선암사(仙巖寺)의 주지 약굉(若宏)과 최단(崔湍)ㆍ권한공(權漢功)ㆍ김지겸(金之謙)ㆍ김사원(金士元)ㆍ최실(崔實)ㆍ환이(桓頣)ㆍ오현량(吳玄良)ㆍ강방언(姜邦彦). 이진(李瑱). 강융(姜融). 조통(趙通). 조적(曹頔). 조석(曹碩). 최현(崔玄). 정자우(鄭子羽). 최중공(崔仲公). 문점(文坫). 이백겸(李伯謙)을 제외한 사람들은 특별히 부르지 아니하면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였다.
 
 5. 충숙왕(忠肅王)
    갑인 원년(1314), 원 연우(延祐) 원년
 
●6월에찬성사  권부(權溥),상의회의 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이진(李瑱). 삼사사 권한공(權漢功) 등을 성균관에 모아서 새로 구입한 서적을 고열(考閱)시키고, 또 경학을 시험보였다. 이전에 성균제거사(成均提擧司)에서 박사(博士) 유연(柳衍)ㆍ학유(學諭) 유적(兪迪)을 중국 강남(江南)에 보내어서 서적을 구입하게 하였더니,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파선(破船)하여 연 등이 알몸으로 해안(海岸)에 올랐다.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홍약(洪瀹)이 태자부참군(太子府參軍)으로서 남경(南京)에 있다가, 연에게 보초(寶鈔) 1백 50정(錠)을 주고 경적(經籍) 1만 8백 권을 사서 돌아가게 하였다
 
 6. 충숙왕(忠肅王)
    신유 8년(1321), 원 영종(英宗) 지치(至治) 원년
 
●삼사사 김순(金恂), 밀직사 백원항(白元恒), 밀직부사 윤석(尹碩)ㆍ전영보(全英甫)와 감찰 언부관(讞部官)에게 명해서, 권한공ㆍ채홍철에게 장형을 가하여 먼 섬에 귀양보냈다. 한공은 상왕이 소중히 여기는 신하였다. 그때 임해군(臨海君)이진(李瑱). 이 교외에서 전송하니, 한공이 말하기를,「천지가 비록 넓고 크나 한 몸을 감출 데가 없습니다」하였다.


진(瑱)이 말하기를, 「뒷간이 좋다.」하니, 한공이 매우 부끄러워하였다. 한공ㆍ홍철ㆍ광봉(光逢)ㆍ정지(廷芝) 등이 섬에 들어가지 않고 홍주(洪州) 지경에 모여서 백성들에게 끼친 폐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이보다 먼저, 상왕이 원 나라에 머물면서 나라의 정사와 창고의 출납을 모두 친근한 사람에게 맡겼으므로, 비록 잘못된 처사도 있었으나 창고는 가득 차고,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복종하더니, 상왕이 서쪽[吐蕃]으로 간 뒤부터는 환관과 좌우들이 상왕의 정책을 고치고, 옛 신하들을 내쫓느라 쉬는 날이 없었으며, 창고는 모두 비었다.
 
영보(英甫)의 아우인 중 산지(山枳)와 오불노(吳佛奴) 등이 백안독고사(伯顔禿古思)에게 붙어서 벌떼처럼 일어나 난을 선동하였다. 그때 왕은 백안독고사의 집에 유숙하였다.
 
사신(史臣)이 말하기를,「선왕이 쓰던 구인(舊人)을 〈그대로〉 쓰는 것도 또한 〈선왕의 뜻과 사업을〉 계승하는 일의 한 가지다. 한공은 태위왕(太尉王)이 중히 여겼기 때문에 귀양가게 되었으니, 왕이 효심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죽음과 삶, 영화와 욕은 명수(命數)에 달린 것이다. 한공이 뒷간으로 도망한 것은 대신의 체통을 잃은 것이다. 어찌 군자의 비웃음을 면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사신 허응린(許應麟)이 말하기를,「충선왕(忠宣王)이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같이 했다. 환관 백안독고사가 그의 간악하고 음험한 성품 때문에 충선왕에게 미움을 받고, 영종황제(英宗皇帝)에게 무고(誣告)로 참소하여 충선왕을 토번으로 귀양가게 하였으니, 충숙왕(忠肅王)에게는 같은 하늘 아래서는 함께 살 수 없는 원수이다.
 
그런데 원 나라에 들어가서는 천자에게 아뢰어서 백안독고사의 배반한 죄를 다스리지도 못하고 도리어 그의 집에 거처하였으며, 그의 일족에게 노예의 신분을 면제하여 양민이 되게까지 하였으니, 도대체 무슨 마음인가.」하였다.
 
5월에 전 직랑(直郞) 정유(鄭瑈)에게 장형을 가하여 섬에 귀양보냈다. 일찍이 왕이, 유청신ㆍ오잠이 자기를 상왕에게 참소하였다는 말을 듣고, 자못 의심하였다. 이 두 사람이 행궁에 나가서 백원항(白元恒)과 더불어 변명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원항에게 물으니, 원항은 정방길(鄭方吉)과 중 조륜(祖倫)을 지목하고, 조륜은 전 집의(執義) 서인(徐諲)을 지목하며, 서인은 정유(鄭瑈)를 지목하였다.
 
●9월에 채하중(蔡河中)이 심왕을 모시려고 다시 원 나라에 갔다. 하중이, 일찍이 변위도감(辨違都監)이 그의 아버지 홍철(洪哲)과 권한공의 전민을 추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도록 판결한 것에 원한을 품어서 도감관(都監官)을 불러 말하기를, “네가 못된 왕의 명에 따라 판결하느냐" 하였다

●검교 첨의정승 이진(李瑱). 이 졸하였다. 사람됨이 체격과 외모가 장대하고 의젓하며, 국량(局量)이 넓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