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겨울 봉원사(奉元寺)에서 바로본 한양
날이 매섭다.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겨울철, 낙엽 진 야산에 오르면 서울이 활짝 시야에 다가온다.
삭막하지만 마음에 드는 벗과 함께라면 더욱 통쾌할 것이다.
혹 이것이 어려우면 김조순(金祖淳)의 글을 따라 봉원사 뒷산에 올라보자.
기묘년(1819) 동짓달 16일 유자범(兪子範)의 처인서옥(處仁書屋)에서 술을 마셨다.
김명원(金明遠), 조군소(趙君素), 이숙가(李叔嘉), 조사현(趙士顯), 이사소(李士昭 ), 이문오(李文吾), 김사정(金士精)은 모두 우리 모임에 속한 사람들이다. 막 술을 마시려 할 때 산에서 불어온 바람이 사립문을 흔들고 싸락눈이 막 날리기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서 술기운이 거나해지고 밤이 깊어지자 맑은 달빛이 뜰에 비치었다.
갑자기 자범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렇게 말하였다.
“이 밤이 참으로 즐겁소. 그러나 우리들은 답답하게 도회지에 갇혀 멋없이 지내는 것을 늘 한스러워 하였으니, 다음에는 성곽 바깥으로 나들이를 하는 것이 어떻겠소?”
내가 말하였다.
“이 논의는 매우 묘하오. 성 서쪽 봉원사(奉元寺)는 나와 명원이 여름에 휴가를 보내던 곳인데, 한 번 떠나온 후 40년이나 되었소. 매양 다시 들르겠노라 생각해왔지요. 한번 가보도록 하지요.”
자범이 말하였다.
“좋지요. 사소의 집이 그곳에서 가까우니 주관하도록 해야겠소. 또 좋은 일이니 열흘 후로 약속을 잡는 것이 좋겠지요. 해가 뜰 무렵 사소의 집에 모여 옷소매를 나란히 하여 가도록 하지요. 약속을 어기지 마시오. 따로 기별하지 않겠습니다.”
모두들 좋다고 하였다.
기일이 되자 모두 약속한 대로 모였다. 전날 저녁에 사소가 사람을 시켜 행장을 꾸리게 하였다.
봉원사의 중이 와서 인도하였다. 마침내 둥그내고개[圓峴] 서쪽에서부터 승전봉(勝戰峰)을 걸어서 넘었다.
이중예(李仲睿)가 이 소식을 듣고 술을 가지고 뒤따라 왔다. 정말 일 벌이기 좋아하는 사람이다.
승전봉 뒤는 얼음과 눈이 덮여 있어 발걸음을 뗄 때마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발을 잠깐이라도 멈칫 하면 넘어지게 되니 정말 고생스러웠다.
절에 이르니 풍광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황량하여 더욱 마음이 쓰였다.
예전의 중들은 한 명도 남아 있는 이가 없었다.
두 명의 주지는 삭발한 머리가 싸락눈이 소복하게 쌓인 듯 하얗게 세었다.
우습다, 인생이 이렇게 허망함이. 저 변함이 없는 갠지즈 강물과 같지 못하여 안타깝다.
함께 불전을 배회하면서 한참동안 감회에 젖었다.
함께 따라온 사람 중에 바둑은 한흥(漢興), 노래는 군빈(君賓), 거문고는 익대(益大)가 잘하는데 모두 솜씨가 제일이다. 또 새 사냥을 하는 이가 있는데 백발을 쏘아 한 발도 놓치지 않으니 그 또한 빼어난 기술이다.
각기 잘하는 바를 발휘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즐거움을 더하게 하였다.
식사에는 매운 양념을 쓰지 않았으니 승려들의 법을 따른 것이다.
밥을 먹을 때는 한 줄로 앉고 승려를 시켜 종을 울리게 하였다.
나도 들고 다니는 소쿠리에서 나무로 만든 발우를 꺼내어 여러 차례 밥을 받았다.
앉아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
한밤이 되자 두 명의 승려가 소리를 나란히 하여 불경을 외웠다. 그 소리가 웅심하고 청아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성찰하는 마음이 들게 하였다. 한 젊은 승려가 제법 의리를 담론할 줄 알고 자태가 단정하여 사랑스러웠다.
술을 마시다 새벽이 되어서야 베개를 나란히 하여 잠을 잤다. 방이 호젓한데다 따뜻하여 매우 추운 밤이지만 추위를 느끼지 못하였다. 다음날 나와 명원은 각기 시 몇 편을 지었다. 밥을 먹은 후 함께 돌아가는 길에 다시 승전봉에 올랐다.
이때 구름과 햇살이 맑고 고왔다. 가슴속이 탁 트였다. 동으로 한양성을 내려다보았다.
성 안팎의 누각과 골목길이 손금처럼 보였다.
북쪽으로는 삼각산과 도봉산인데 쌓인 눈이 빛을 뿜어 휘황찬란, 번쩍번쩍하여 무어라 형용할 수 없었다.
서남쪽으로 큰 한강이 깡깡 언 채 구불구불 뻗어 있다. 수십 리에 걸쳐 파란 유리를 강물 위에 갈아놓은 듯하다.
긴 바람이 모래와 눈을 불어 마치 안개가 낀 듯 흐릿하였다. 서로 돌아보며 매우 즐거워하였다.
바위에 걸터앉아 술을 데우고 거문고를 타는 이를 시켜 노래에 맞추어 연주하게 하였다.
거문고가 얼어서 더욱 운치가 있고 노랫가락은 높고 또 기운찼다.
소리가 처음에는 맑게 울려 퍼지다가 나중에는 애원조로 바뀌었다.
여음이 허공을 흔들어 솔바람 소리와 어우러져 절절하였다. 모두들 말하였다.
“반평생 노래와 거문고 소리를 들었지만 오늘 같은 날이 없었던 듯하오.”
내가 다시 입으로 긴 율시를 읊고, 앞서 지은 시와 함께 내어놓고 여러 벗들에게 답하라 하였다.
다시 사소의 집으로 돌아왔다. 각기 술 한 잔씩을 마시고 헤어졌다.
아, 이번 유람은 날이 따스하지 않고 추웠으니 그 고통이 막심하였다. 길을 나서 말을 타지 않고 걸어갔으니 그 수고로움이 막심하였다. 절에 빼어난 물이나 바위가 없어 감상할 만하지도 못하였고 식사를 할 때 큰 상에 맛난 음식을 차려놓은 일도 없었다.
모두가 다 형편없는 일이라 하겠다. 남들이 보면 즐거울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 맞겠지만 이상하게도 놀이에 함께 하였던 3-40인은 모두들 질탕하게 즐기며 기뻐 펄쩍 뛰기까지 하였다. 이는 무슨 까닭인가?
내심 마음에 맞고 밖으로 좋은 경지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마음에 맞으면 좋은 경지를 만나고 좋은 경지를 만나면 즐거움이 생기는 법이다.
즐거움이라는 것은 어떤 사물이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법이다.
그저 그 경지에 들어가지도 못하여 이를 얻지 못하는 자들에게 가르쳐 줄 만하다.
↑설평기려_정선_간송미술관 소장_겸재 정선 진경산수화(최완수 저, 범우사) 인용
- 김조순(金祖淳),〈봉원사의 유람을 기록하다[記奉元寺遊]〉,《풍고집(楓皐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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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
봉원사는 천년도 더 된 고찰이지만 우리 문화사에 그리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조선 후기 영조의 세손이었던 장조(莊祖)의 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을 위한 원당(願堂)으로 기능하였다.
이덕무(李德懋)가 이 절을 두고 지은 시에서 새로 지은 사찰이라 하였거니와 이 무렵부터 봉원사에 들어가 독서를 한 기록이 보이며 또 그곳을 소재로 한 시가 등장한다. 박지원(朴趾源)의〈허생전(許生傳)〉에 나오는 허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곳이기도 하다.
1819년 음력 11월 16일 김조순은 절친한 벗 김려(金鑢) 등과 함께 봉원사를 찾았다.
유한정(兪漢寔, 자는 子範, 호는 雲樓), 조학은(趙學殷, 자는 君素, 호는 斯隱), 이희현(李羲玄, 자는 士昭), 김조(金照, 자는 明遠, 호는 石閒 혹은 石癡), 그밖에 인명을 잘 알 수 없는 이숙가(李叔嘉), 조사현(趙士顯), 이문오(李文吾) 등이 함께 하였다.
도중에 이우재(李愚在, 仲睿)가 술을 가지고 따라왔다.
당시 한양에서 바둑과 노래, 거문고에 가장 뛰어난 사람도 함께 데리고 갔다.
둥그내고개[圓峴]에서 승전봉(勝戰峰)을 넘어간 것을 보면 오늘날 금화터널 위로 간 듯하다.
눈 내린 달밤 봉원사에서 즐거운 마음에 이들은 시를 지었다. 그리고 그 시집의 이름을 즐거운 마음과 좋은 일이라는 뜻에서 상심낙사(賞心樂事)라 이름하였다. 원래 김조순은 ‘상심낙사’라는 붓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날의 봉원사 놀이가 즐거웠고 그 붓으로 시를 지었기에 시집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원래 상심낙사는 사령운(謝靈運)의 〈의위태자업중집시서(擬魏太子鄴中集詩序)〉에 보이는 말로, 좋은 시절, 아름다운 경치, 완상하는 마음, 즐거운 일[良辰美景賞心樂事] 네 가지를 함께 다 누리기 어렵다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김조순, 김려 등의 문집에는 이때의 일을 시로 적은 것이 실려 있다.
이날 밤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평소 절친하게 지내다 일찍 죽은 이영소(李英紹, 자는 伯古)가 유한정의 꿈에 나타났다. 이영소는 벗들이 놀러올 줄 알았다 하고, 지은 시가 시원찮다 하면서
“흰 눈은 인가의 연기와 어우러지는데, 푸른 산은 도 기운과 통해 있는 듯.[白雪人烟合, 靑山道氣通]”
이라 하였다.
이 구절을 합쳐 김조순은 율시를 완성하였는데 곧 〈거듭 봉원사에서 노닐며[重遊奉元寺]〉라는 작품이다.
삭막한 겨울 풍경을 보는 것은 보통사람에게는 즐거운 일이 아니다.
날이 찬 데다 걸어서 가야 하였고, 절에 도착하여서도 좋은 음식은커녕 발우에 절밥을 받아 먹어야 하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다 즐거워하였다. 마음이 맞는 벗이 모였으니 삭막한 땅도 절로 마음에 차게 되었고, 장소가 마음에 드니 즐거움이 절로 생기게 되었기 때문이다.
글쓴이 : 이종묵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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