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世 이사균(李思鈞)
[생졸년] 1471년(성종2)~1536년(중종31)
[세 계] 익재공후 22世 청호공(淸湖公) 희(暿)의 증손자.
[문과] 중종(中宗) 2년(1507) 정묘(丁卯) 중시(重試) 2등(二等) 2[探花郞]위(3/6)
[문과] 연산군(燕山君) 4년(1498) 무오(戊午) 식년시(式年試) 2등(二等) 4위(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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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로 자(字)는 중경(重卿). 호는 눌헌(訥軒). 시호는 문강(文剛). 경상도 관찰사 이희(李暿)의 증손자요, 조부(祖父)는 계반(繼潘), 아버지는 판관(判官) 식(湜)으로. 출생지와 거주지는 미상이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承文院 權知)로 들어갔다가 2년 뒤 홍문관(弘文館)의 정자(正字-正九品)에 제수 되었다. 이어 저작(著作-正八品)을 거쳐 1503년(연산군 9) 부수찬(副修撰-從六品)으로 승진 하였으나,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추숭(追崇)에 소극적이였다는 이유로 보은(報恩)으로 유배 되었다가 곧 곤양(昆陽)으로 옮겨졌다.
그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부수찬으로 복직되었으며, 1507년(중종 2) 문과중시(文科重試) 을과(乙科)로 급제하고, 지평(持平-正五品) · 이조 정랑(吏曹正郞-正五品) · 부응교(副應敎-從四品) · 집의(執義-從三品) 등의 관직을 지낸 뒤, 1510년(중종 5) 동부승지(同副承旨-正三品)에 제수되었다.
이로부터 여러 승지직을 두루 지내고 1513년에 이르러 도승지에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체직되어 강원도 관찰사로 나갔다. 3년 뒤에는 공조 및 형조의 참판을 거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從二品)가 되어 왕비 책봉을 위한 주청사(奏請使)의 부사(副使)로 뽑혀 명(明)에 다녀왔다.
중종 1518년(중종 13)에는 전주 부윤(全州府尹-從二品)으로 나갔다가 이듬해 특지(特旨)로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正三品)에 제수되었다. 이후 함경도(咸鏡道). 전라도(全羅道) · 충청도(忠淸道)의 관찰사(觀察使-從二品)와 형조(刑曹) 및 이조(吏曹)의 참판(參判-從二品)을 역임하고 중종 24년(1529) 8월에 왕의 특명을 받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이 되었으나 한달만에 체직되었다.
그 사이 1522년(중종 17년) 명(明) 황태후의 책봉에 즈음하여 진하사(進賀使)로 선발되어 다시 명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532년(중종 27년) 이조 판서(吏曹判書-正二品))에 오른뒤 이듬해에는 병조(兵曹) 및 호조(戶曹) 의 판서(判書-正二品를 역임하고 참찬(參贊)이 되어 나세찬(羅世纘)을 구하려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從二品)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6년(중종 31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正二品)에 다시 제수되어 돌아왔고 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正二品)로 자리를 옮겨 타계하였다. 문무를 겸비하였고 기개가 있었으며, 뜻이 굳어 적지 않은 비방이 있기도 하였으나, 많은 사대부들로 부터 칭송을 받았다.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건축하는 것을 일삼았으므로 민폐를 끼치기도 하였다. 한편 성품이 방탕하고 익살스러우며 조심성이 없었다는 사평(史評)이 있기도 하다. 시호는 문강(文剛)이며, 문집(文集)으로는 《눌헌집(訥軒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