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신도비명

점필재 김종직선생 신도비명 병서.

야촌(1) 2009. 2. 12. 05:12

  점필재 김종직 선생 신도비명 병서

(佔畢齋 金宗直 先生 神道碑銘 幷序)

 

홍귀달(洪貴達) 찬(撰)

 

덕행(德行), 문장(文章), 정사(政事)는 공문(孔門)의 고제(高弟)로서도 겸한 이가 있지 않았으니, 더구나 그 밖의 사람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재주가 우수한 사람은 행실에 결점이 있고, 성품이 소박한 사람은 다스림이 졸렬한 것이 바로 일반적인 상태이다.

 

그런데 우리 문간공(文簡公) 같은 이는 그렇지 않다. 행실은 남의 표본이 되고 학문은 남의 스승이 되었으며, 생존시에는 상(上)이 후히 대우하였고 작고한 뒤에는 뭇 사람들이 슬퍼하며 사모하였으니, 어쩌면 공의 한 몸이 경중(輕重)에 그토록 관계될 수 있었단 말인가.

 

공의 휘(諱)는 종직(宗直)이고 자는 계온(季昷)이며 선산인(善山人)으로 호는 점필재(佔畢齋)이다.

공은 타고난 자품이 매우 고상하여 총각 때부터 시(詩)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고 날마다 수만언(數萬言) 씩을 기억하였다.

 

그리하여 약관(弱冠) 이전에 문명(文名)을 크게 떨쳤다. 경태(景泰 : 명경제(明景帝)의 연호) 계유년 방(榜)의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천순(天順 명 영종(明英宗)의 연호) 기묘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승문 정자(承文正字)에 선보(選補)되었다.

 

이 때 어공 세겸(魚公世謙)은 시를 잘한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본원(本院)의 선진(先進)이 되어 공의 시를 보고는 감탄하여 말하기를,『나에게 채찍을 잡고 노예 노릇을 하게 하더라도 의당 달게 받겠다』고 하였다.

 

본원의 검교(檢校)에 승진되었다가 감찰(監察)에 전임되었는데, 마침 입대(入對)했다가 상의 뜻에 거슬리어 파면되었다. 다시 기용되어 영남 병마평사(嶺南兵馬評事)가 되었다가 들어가서 교리(校理)가 되었다.

 

상이 즉위한 처음에 경연(經筵)을 열고 문학(文學)하는 선비들을 특별히 선발했는데, 선발된 사람 십수인(十數人) 가운데서 공이 가장 뛰어났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함양 군수(咸陽郡守)로 나갔는데, 고을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학문을 진흥시켜 인재를 양성하고, 백성을 편케 하고 민중과 화합하는 것을 힘썼으므로, 정사의 성적이 제일(第一)이었다.

 

그리하여 상이 이르기를,『종직은 고을을 잘 다스려 명성이 있으니, 승천(陞遷)시키라』하고, 마침내 승문원 참교(承文院參校)에 임명하였다. 이 해에 마침 중시(重試)가 있었는데, 모두 공에게 권하여 말하기를『중시는 문사(文士)가 속히 진취하는 계제가 된다고』 하였으나, 끝내 응시하지 않으니, 물론(物論)이 고상하게 여겼다.

 

그 후 얼마 안 되어 선산 부사(善山府使)가 되었다가, 모친이 작고하자 3년 동안 여묘살이를 하면서 상례(喪禮)를 일체 주 문공(朱文公)의 예대로 준행하고, 너무 슬퍼하여 몸이 수척해진 것이 예에 지나쳤으므로, 사람들이 그 성효(誠孝)에 감복하였다.

 

복(服)을 마치고는 금산(金山)에 서당(書堂)을 짓고 그 곁에는 못을 만들어 연(蓮)을 심어놓고서 그 당(堂)의 편액(扁額)을 경렴(景濂)이라 써서 걸었으니, 대체로 무극옹(無極翁)을 사모하는 뜻에서였다. 그리고는 날마다 그 안에서 읊조리며 세상일에 뜻이 없었다.

 

그러다가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로 부름을 받고는 병으로 사양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으므로, 마지못하여 일어나 부임하였다. 경연(經筵)에 입시(入侍)하여서는 말은 간략 하면서도 뜻이 통창하였고, 강독(講讀)을 가장 잘했기 때문에 은총이 공에게 치우쳐 좌부승지(左副承旨)에 치올려 임명되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 자리에 결원이 생기어 특명으로 공에게 도승지를 제수하자, 공이 감히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하니, 상이 하교하기를『경(卿)의 문장(文章)과 정사(政事)가 충분히 감당할 만하니, 사양하지 말라』하였다.

 

이윽고 이조 참판(吏曹參判)과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에 전임되어서는 금대(金帶) 하나를 특별히 하사하였으니, 특별한 대우가 이러하였다. 뒤에 호남(湖南)을 관찰(觀察)할 적에는 성색(聲色)을 동요하지 않고도 일로(一路)가 숙연해졌다.

 

다시 들어와서 한성 윤(漢城尹), 공조 참판(工曹參判)을 역임하고 형조 판서(刑曹判書)에 초탁되어 홍문관 제학(弘文館提學)을 겸하였다. 홍치(弘治) 기유년 가을에는 병으로 사직하고 지중추(知中樞)에 옮겨 제수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가기 위하여 하루는 동래(東萊)의 온정(溫井)에 가서 목욕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공은 그대로 밀양(密陽)의 전장(田庄)으로 가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상이 특별히 전직(前職)을 체직하지 말도록 허락하였다. 그러자 혹자가 녹봉을 받기를 권하였으나 응하지 않고 세 번이나 사양하였지만, 윤허하지 않고 심지어 두 차례나 친히 비답(批答)을 지어 내리기까지 하였는데, 그 비답에는 “마음이 바르고 성실하여 거짓이 없고, 학문에 연원이 있다.[端慤無僞 學問淵源]”는 등의 말이 있었다.

 

그리고 공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듣고는 본도(本道)로 하여금 쌀 70석을 보내주게 하고, 내의(內醫)를 보내어 약을 하사하였다. 임자 년 8월 19일에 작고하니, 향년이 62세였다. 부음이 알려지자 2일 동안 철조(掇朝)하였고, 태상시(太常寺)에서 시호를 문간(文簡)으로 의정하였다.

 

공의 고(考) 숙자(叔滋)는 성균 사예(成均司藝)로 호조 판서(戶曹判書)에 추증되었고, 조(祖)인 성균 진사(成均進士) 관(琯)과 증조(曾祖)인 사재령(司宰令) 은유(恩宥)에게도 모두 봉작(封爵)이 추증되었다.

 

공은 울진 현령(蔚珍縣令) 조계문(曺繼門)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곤(緄)은 해평인(海平人) 홍문 수찬(弘文修撰) 김맹성(金孟性)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일찍 죽었고, 그 다음은 모두 요절하였으며, 큰 딸은 생원(生員) 유세미(柳世湄)에게 시집갔고, 다음은 생원 이핵(李翮)에게 시집갔다.

 

뒤에는 남평인(南平人) 첨정(僉正) 문극정(文克貞)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숭년(嵩年)이고, 딸은 직장(直長) 신용계(申用啓)에게 시집갔으나 후사가 없다.

 

공은 평소 집에 있을 적에는 첫닭이 울면 일어나서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의관(衣冠)을 단정히 하고 앉아 있었는데, 아무리 처자(妻子)의 사이라 하더라도 나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또 소싯적에는 사예공이 병들어 수척해지자 공이 이를 매우 걱정하여 유천부(籲天賦)를 짓기도 하였다.

 

그리고 대부인(大夫人)이 생존한 당시에는 공이 항상 조정에 편히 있지 못하고 외직을 요청하여 세 번이나 지방관으로 나가서 대부인을 봉양하였다. 공의 백씨(伯氏)가 악창[癰]을 앓을 적에는, 의원이 지렁이의 즙[蚯蚓汁]이 좋다고 말하자, 공이 그 지렁이의 즙을 먼저 맛보고 백씨에게 먹였는데, 과연 효험이 있었다.

 

뒤에 백씨가 서울에서 객사(客死)했을 적에는 공이 널[柩]을 받들고 고향에 반장(返葬)하였고, 백씨의 아이를 마치 자기 자식처럼 어루만져 돌보고 가르쳐서 성립(成立)하게 하였으니, 그 타고난 효우(孝友)의 지극하기가 이러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거하여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는 간략함을 따르고 번거로움을 막았으며, 정(靜)을 주로 삼고 동(動)을 제재하였으므로, 있는 곳마다 형적을 드러내지 않고도 일이 다스려지고 백성들이 차마 속이지 못하였다.

 

평상시에는 사람을 접대하는 데 있어 온통 화기(和氣)뿐이었으나, 의리가 아닌 것이면 일개(一介)도 남에게서 취하지 않았다. 오직 경사(經史)를 탐독하여 늘그막에 이르러서도 게으를 줄을 몰랐으므로, 얻은 것이 호박(浩博)하였다.

 

그리하여 사방의 학자들이 각각 그 그릇의 크고 작음에 따라 마음에 만족하게 얻어 돌아갔는데, 한번 공의 품제(品題)를 거치면 문득 훌륭한 선비가 되어서 문학(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친 자가 태반이나 되었다.

 

지금 호조 참판(戶曹參判)인 조공 위(曺公偉)는 공의 처남이고,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 강공 백진(康公伯珍)과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 강공 중진(康公仲珍)은 공의 생질들이니, 어쩌면 공의 문에 명사들이 이렇게 모였단 말인가. 세상에서 이 때문에 더욱 기이하게 여긴다.

 

공이 편찬한 《청구풍아(靑丘風雅)》, 《동문수(東文粹)》, 《여지승람(輿地勝覽)》이 세상에 행해지고 있다. 공이 작고한 뒤에는 공이 저술한 시문(詩文)이 더욱 귀중하게 여겨져서 문도(門徒)들이 본집(本集)과 《이존록(彝尊錄)》을 편집해 놓았는데, 상이 대궐로 들여오도록 명하여 조석 사이에 간행하기를 명할 것이다.

 

내가 평생에 공과 가장 서로 의분(義分)이 있는 사이라 하여, 조태허(曺太虛)가 나에게 글을 지어서 비석에 새기게 해주기를 요청하니, 내 글이 졸렬하다고 해서 사양할 수가 없어.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오산숭숭(烏山崇崇) : 오산은 하도 높고

낙수용용(洛水溶溶) : 낙수는 도도히 흘러서

수기사종(秀氣斯鍾) : 빼어난 기운이 여기에 모였네

 

일월위명(日月委明) : 일월의 밝은 빛이 쌓이고

규벽윤정(奎壁淪精) : 규벽의 정기가 여기에 잠겨

문인내생(文人乃生) : 문인이 이에 태어났도다.

 

박흡구분(博洽丘墳) : 옛 서적을 널리 읽어 알았고

기고시문(奇古詩文) : 시문은 기이하고 고아하여

승입양분(陞立揚芬) : 조정에 올라서 명성을 발휘하였네.

 

등당강의(登堂講疑) : 당에 올라 의심난 뜻 강의하니

과문문기(過門問奇) : 문하에 와서 기자를 물어라

후학시구(後學蓍龜) : 후학들의 시귀가 되었도다.

 

부언효호(父焉孝乎) : 부모에게는 효도를 하고

형언우우(兄焉友于) : 형에게는 우애를 하니

가정이유(家庭怡愉) : 가정이 모두 화락하였네.

 

임민이자(臨民以慈) : 백성을 인자함으로 다스리니

거후여사(去後餘思) : 떠난 뒤에도 백성들이 사모하여

향유유사(鄕有遺祠) : 향리에 사당이 세워졌도다.

 

논사경악(論思經幄) : 경악에서 담론하고 사려하며

면대일각(面對日角) : 주상과 직접 면대하여서는

독응총악(獨膺寵渥) : 큰 은총을 혼자 받았네.

 

숭반준급(崇班峻級) : 높은 반열 높은 작급을

여계이섭(如階而躡) : 계단 따라 오르듯이 하여

인망윤협(人望允協) : 인망이 진실로 화합했는데

 

천탈하속(天奪何速) : 하늘이 왜 그리 속히 빼앗는고

민실무녹(民實無祿) : 백성이 실로 복이 없음이라

구중함척(九重含戚) : 구중궁궐에서 걱정을 품는도다.

 

공은 만류할 수가 없으나 / 공불가류(公不可留) : 공은 만류할 수가 없으나

령명천추(令名千秋) : 좋은 명성은 천추에 전할 게고

유고한우(遺稿汗牛) : 유고는 한우 충동에 이르리라.

 

공다명실(公多名實) : 공은 명성과 실상이 많은지라

기령민몰(其令泯沒) : 이것이 묻히게 둘 수 없어

아금재필(我今載筆) : 내가 이제 붓 잡아 기록하노라.

 

자헌대부 지중추부사 겸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사 지성균관사 홍귀달(洪貴達)은 찬하고,

통훈대부 창원대도호부사 김해진관병마첨절제사 오여발(吳汝撥)은 비문을 쓰고,

통훈대부 행 사간원사간 겸 춘추관편수관지제교 김세렴(金世濂)은 전(篆)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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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後誌)

 

장현광(張顯光)

 

이상의 서(序)를 갖춘 명(銘)은 홍 상공 귀달(洪相公貴達)이 찬한 것인데, 선생(先生)의 사업(事業)과 문장(文章)이 그 대개가 모두 그 가운데 기재되었으니, 어찌 후인의 문자(文字)로 군더더기를 만들 수 있겠는가.

 

본부(本府) 사람들이 선생의 덕업(德業)을 사모하여 옛 여리(閭里) 앞에 비문을 새겨 세웠었는데, 임진년의 병란(兵亂)에 보전되지 못했으므로, 난리가 평정된 뒤에는 향인(鄕人)들이 모두 중건(重建)할 것을 생각하였으나 틈을 내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지금의 부백(府伯)인 이 사문 유달(李 斯文 惟達)이 부유(府儒)들이 일제히 간청함에 따라 구문(舊文)을 가져다 새겨서 옛 길에 세웠는데, 본부 사람들이 인하여 그 수말(首末)을 진술해서 명(銘) 밑에 아울러 기록하려고 하므로, 이것을 써서 주는 바이다.

 

아, 선생이 작고한 뒤에 불행하게도 혼조(昏朝)가 정사를 어지럽히고 권간(權奸)이 화(禍)를 선동함으로써 그 참혹함이 화가 천양(泉壤)에까지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비록 그러나 선생의 도야 무슨 손상될 것이 있겠는가.

 

삼가 듣건대 당시에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명인 준사(名人 俊士)가 십수(十數)에만 그치지 않았고, 한훤(寒暄), 일두(一蠹) 양현(兩賢)도 모두 선생이 권장 계발시킨 바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 본부 사람들이 선생을 끝없이 사모하고 존상해 오다가, 난리를 겪은 뒤에 마침 어진 부사(府使)가 부임해옴을 만나서 그 숙원(宿願)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자 또 좋은 땅에 묘원(廟院)을 옮겨 세워서 스승으로 받들어 높이는 곳으로 삼으려 하고 있으니, 대체로 또한 사문(斯文)의 현통한 운수를 만난 것이다.

 

그러니 끝내 본부에서 배출되는 인재가 또한 옛날 선생의 문하에서 배출된 제유(諸儒)보다 못하지 않을것을 기필하겠다. 숭정(崇禎) 7년(1634년 인조 12) 9월 일에 자헌대부 공조판서 옥산후인(玉山後人) 장현광(張顯光)은 삼가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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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文簡公佔畢齋金先生神道碑銘(篆 題)

有明朝鮮國資憲大夫刑曹判書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贈諡文簡公佔畢齋金先生神道碑銘 幷序。

 

德行文章政事。自孔門高弟。未有騈之者。况其外者乎。才優者行缺。性素者治拙。乃恒狀也。若吾文簡公。則不然。行爲人表。學爲人師。生而 上眷遇。歿而衆哀慕。何公之一身。關輕重也乃爾。公諱宗直。字季昷。善山人也。號佔畢齋。公天分甚高。総角有能詩聲。日記數萬言。未弱冠。文名大振。中景泰癸酉榜進士。捷天順己卯科。選補承文正字。時魚公世謙有詩名。爲本院先進。見公詩。歎曰。使我執鞭爲奴隷。當甘受之。陞本院檢校。轉監察。適入對。忤 旨罷。起爲嶺南兵馬評事。入拜校理。 上卽位初。開 經筵。特選文學之士。應選者凡十數人。公其尤也。未幾。出守咸陽郡。其治以興學育才。安民和衆爲務。政成爲第一。 上曰。宗直治郡有聲。其優遷。遂拜承文院參校。是歲。適重試。咸勸曰。重試。文士驟進之階。竟不赴。物論高之。未幾。爲善山府使。母卒。廬墓三年。喪禮一遵朱文公。哀毀過禮。人服誠孝。服闋。築書堂于金山。池其傍。種之蓮。扁其堂曰景濂。盖慕無極翁也。日吟哦其中。無意世事。以弘文館應敎徵。辭以疾。 不許。不得已而起。入侍 經筵。辭約意暢。講讀最善。故 眷注偏傾。超左副承旨。都承旨缺。特 命授公。辭不敢當。 敎曰。卿文章政事。足以堪之。勿辭。尋遷吏曹參判,同知 經筵事。特 賜金帶一腰。殊待類此。後觀察湖南。不動聲色。一路肅然。入拜漢城尹,工曹參判。超刑曹判書。兼弘文館提學。弘治己酉秋。以病辭。移授知中樞。欲謝病歸。一日。請浴東萊溫井。 許之。因卧密陽田庄。 上特許勿遆前職。或勸之受祿。不應。三辭。 不允。至 親製批答賜之。凡兩度。有端愨無僞。學問淵源等語。 聞其貧。令本道 賜米七十石。遣內醫 賜藥。壬子八月十九日卒。享年六十二。訃聞。掇朝二日。太常議謚曰文簡。公考曰叔滋。成均司藝。 贈戶曹判書。祖曰成均進士琯。曾祖。司宰令恩宥。皆 贈封爵。公娶蔚珍縣令曺繼門女。生三男二女。長曰緄。娶海平人弘文修撰金孟性之女。早歿。次皆夭。女長適生員柳世湄。次適生員李翮。後娶南平人僉正文克貞女。生一男一女。男曰嵩年。女適直長申用啓。無後。公凡居家。鷄鳴盥櫛。正衣冠端坐。雖妻孥之間。不示懶容。少時。司藝病且瘦。公憂傷。作籲天賦。大夫人在堂。公未嘗安于朝。乞外三出奉養。伯氏病癰。醫云。蚯蚓汁良。公先嘗以進。果效。後伯氏客死京師。公奉柩返葬故里。撫其孤如己出。敎誨使之成立。其孝友天性至如此。凡守職莅民。居簡以御煩。主靜以制動。所在不露形跡。事理而民不忍欺。平時。待人接物。渾然和氣。非其義。不以一介取諸人。惟耽於經史。至老忘惓。所得浩博。四方學者。隨其器之大小。充然有得而歸。一徑品題。便成佳士。以文學鳴于世者太半。今戶曹參判曹公偉。公婦弟。議政府舍人康公伯珍,弘文修撰康公仲珍。公之甥。一何公之門之萃聞人耶。世以此益奇之。公所纂靑丘風雅,東文粹,輿地勝覽。行於世。公旣歿。所著詩文。尤見貴。門徒撰本集與彝尊錄。 上命入內。朝夕 命刊矣。以余平生與公最有義分。曹太虛請爲文刻石。不可以文拙辭。銘曰。

烏山崇崇。洛水溶溶。秀氣斯鍾。日月委明。奎璧 淪精。文人乃生。博洽丘墳。奇古詩文。陞立揚芬。登堂講疑。過門問奇。後學蓍龜。父焉孝乎。兄焉友于。家庭怡愉。臨民以慈。去後餘思。鄕有遺祠。論思 經幄。面對 日角。獨膺 寵渥。崇班峻級。如階而躡。人望允協。天奪何速。民實無祿。 九重含慼。公不可留。令名千秋。遺稿汗牛。公多名實。其令冺沒。我今載筆。

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均館事洪貴達。 撰。

通訓大夫。昌原大都護府使,金海鎭管兵馬僉節制使 吳汝撥。 書。

通訓大夫。行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知製敎 金世濂。 篆。

 

後誌[張顯光]

 

右銘具序。乃洪相公貴達撰也。先生事業文章。其大槩俱載其中。豈容後人文字凟贅之哉。本府人。慕其德業。鐫竪於故閭前矣。而不保於壬辰兵亂。亂定之後。鄕人咸思重建而不暇焉。今府伯李斯文惟達。依府儒之齊懇。取刻舊文。竪諸舊道。府人仍欲陳其首末。幷錄于銘下。故書此以遺之。嗟乎。先生歿後。不幸昏朝亂政。權奸煽禍。慘至禍及泉壤。尙忍言哉。雖然。先生之道。有何損哉。窃聞。當時名人俊士之輩出其門者。不止十數焉。寒暄,一蠧兩賢。皆其所奬發也。今者。府人慕尙不已。於經亂之後。適値賢府使之莅府。而獲遂其宿願。又擬移卜廟院于吉地。以爲師宗之所焉。盖亦斯文之亨運也。畢竟本府人才之產。亦不下於昔日及門之諸儒也必矣。

崇禎七年九月 日。資憲大夫。工曹判書玉山後人張顯光。 謹誌。

[주01] 璧 : 壁

 

자료문헌 : 점필재집 문집 부록 >신도비명(神道碑銘)

 

 

↑김종직 선생 신도비각

 

↑김종직 선생 신도비 / 소재지 : 경남 밀양시 부북면 제대리 708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