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조선시대 인물

최진립(崔震立)

야촌(1) 2008. 8. 31. 03:07

■최진립(崔震)

    [생졸년] 1568년(선조 1) ~ 1636년(인조 14)

 

경주 최씨는 26파로 나뉘며, 그중 사성공파(최눌)의 손자 정무공 최진립장군은 아래와 같은 공을 세웠다.

사성공 최눌은 조선초기의 청백리이다.

 

동학창시자 최제우 또한 최진립 장군의 후손이며, 경주 교동의 최부자 또한 최진립 장군의 후손이다.

이 글을 쓰는 나 또한 최진립 장군의 14대 손이며..경주 내남에는 새각당이라는 최진립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있다.

 

사당 입구 문 아래에 최진립 장군의 보검이 묻혀있다는 전설이 있어, 몇 해전 방송국에서도 오고 한참을 파내려 갔으나 전설의 보검은 발견되지 않아 아쉬웠다.^^ 교동 최부자의 집은 원효대사와 신라 29대 무열왕의 첫째딸인 요석공주가 살던 터인 요석궁이 있던 터이다.

 

시대 : 조선시대  

설명
인조 14년(1636) 이해도 저물려는 12월 9일 청나라의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쳐들어왔다. 의주부윤(義州府尹) 임경업(林慶業)장군은 백마산성(白馬山城)에 의거하여 적군을 맞고 한치도 물러서지 않고 굳게 지켰다.

 

청군은 하는 수 없이 임경업장군이 지키는 곳을 피해서 서울로 직행하여 출발한지 10여일에 벌써 서울 근방까지 육박했다. 밤을 세우며 회의한 끝에 일단 서울을 강화도(江華島)로 옮기기로 하고 우선 봉림대군을 비롯한 남녀 귀족들을 그곳으로 떠나 보내고 왕과 세자도 곧 뒤따르기로 했다.

인조가 소현세자(昭縣世子)를 비롯한 백관을 이끌고 강화도로 향했을 때는 이미 청나라 대군이 강화도로 가는 길마저도 막은 뒤였다. 왕의 일행은 하는 수 없이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난을 했다.

 

청군은 꼬리를 물다 시피 뒤따라 와서 산성을 겹겹으로 에워 쌓았다. 왕이 남한산성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각도의 관원들은 군사를 모집하고 또는 관군을 정비해서 남한산성의 임금을 구하고자 몰려오기 시작했다.


충청도의 감사인 정세규도 군사를 정비하여 남한산성으로 진군할 차비를 차렸다. 최진립장군은 공주의 영병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을 향해 북으로 향했다. 남한산성에서 30리 떨어진 용인의 험천에 이르렀을 때는 선봉(先鋒)이 되어 있었다.

 

오랑캐들도 이 지세를 알고 이미 대군을 배치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진군하던 우리 군사와 오랑캐들은 전열을 가다듬고는 들이 닥친다. 노장 최진립은 오랑캐들을 쏘아보면서 태산처럼 버티고 서서 우뢰같은 소리로 병졸을 격려한다.

 

달려드는 오랑캐들에게 날랜 솜씨로 화살을 쏘아붙였으나 전세를 뒤집을 수는 없었다. 우리 군사들에게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노장군은 마지막까지 주위를 지키고 있었던 수하병졸들에게 명령을 내렸으나 그들은 주공을 홀로 남겨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군의 호령은 추상같았다. 그들은 눈물을 소매로 씻으면서 그 자리를 물러섰다.

이제 싸움은 끝났다. 지옥의 모습을 방불케하던 들판에는 정막이 깔리고 피무지개가 서던 싸움터에는 눈보라마저 몰아쳤다. 노장군의 온몸에는 화살이 빽빽히 꽂혀 있었을 뿐 아니라 수십창(數十槍)의 상처까지도 입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들도 노복도 통곡마저도 집어삼키고 그 처참한 모습에 피눈물을 쏟았다.

최진립의 장열한 최후의 소식을 들은 인조임금께서는 옷소매를 눈물로 적셨다.

그리고 나라에서 장사를 치루게 하고 예관을 보내서 제사를 드리게했다.

 

그러나 전란중이라 그의 충성에 보답하는 그 이상의 조처를 마련할 겨를도 없이 해가 바뀌었다.

판중추 김시양이 조정에 올린 상소를 받은 인조임금은 즉시 교지를 내려 최진립에 병조판서를 추증하고 아울러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렸을 뿐아니라 그의 출신 마을인 경주의 이조리(伊助里)를 정표(旌表)하게 했다.

최진립의 자는 사건(士建), 호는 잠와(潛窩)이며 청백리로 이름 높았던 예(汭)의 6세손이다.

타고난 재주가 뛰어나서 하나를 배우면 둘을 깨닫는 터이라 장래가 지극히 촉망되었다.

나이가 25세에 이르렀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나라에 큰 변란이 생겨 과감하게 일어나 근방의 젊은이를 모집하고 왜적과 싸워 이들을 마을에서 소탕했다.

그는 전봉사(前奉事) 김호(金虎)와 힘을 모아서 왜적을 치고 고을을 지켰다.

 

전란이 다소 누그러졌을 때 큰 뜻을 세우기 위해 무과에 응시해서 급제했다.

관군의 부장에 임명된 그는 여러곳에서 계속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는 결사대 백여명을 이끌고 서생포(西生浦)에 근거를 두고 온갖 나쁜짓을 다하던 왜적을 공격하여 수없이 많은 것을 사살하여 큰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앞장서서 싸우던 그도 배꼽 아래에 총탄을 맞았을 뿐 아니라 왼쪽 볼에서 오른편 잇몸으로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칼로 뼈를 긁어 탄환을 빼고는 계속해서 군사를 지휘하고 적을 쳤으니 그 용감함은 전사(戰史)에도 찾을 수가 없다. 이러한 공훈으로 어모장군(禦侮將軍)의 품계에 올랐다.

그 후 관직에 나아가서 수군첨절제(水軍僉節制),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付使)등을 역임하기도 하고 부장(部將), 경기수군절도사겸교동도호부사(京畿水軍節度使兼喬棟都護付使), 공조참판(工曹參判)등의 요직을 거쳤다.

 

관직에 있을 때는 나라를 위한 한 마음으로 충성을 다했고 백성을 다스릴 때는 백성을 친자식처럼 사랑했으며 청렴하고 결백한 마음가짐과 생활은 만인의 모범이 되고도 남음이 있었다. 

 

숙종은 경주의 향리에 있는 사당에 숭열사우라는 사액을 하사하고 다시 대보단에 배향하는 광영을 내렸으니 후손들의 명예는 말할 것도 없지만 온 고을의 자랑이라고 않을 수 없다. 

본관 경주(慶州). 자 사건(士建). 호 잠와(潛窩). 시호 정무(貞武).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생 계종(繼宗)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전공을 세우고, 1594년 무과에 급제, 부장(部長)을 제수받았으나 신병으로 사퇴했다.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결사대를 조직, 서생포(西生浦)에 침입한 왜적을 무찌르고, 이어 도산(島山)싸움에서 권율(權慄) 등과 함께 전공을 세웠다.

 

1600년 여도만호 겸 선전관(呂島萬戶兼宣傳官)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가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五衛都摠府都事)를 지내고, 1615년(광해군 7) 부사(府使) 때 능창군(綾昌君) 전(佺)의 추대사건에 연루, 갑산(甲山)에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사면되어 가덕진절제첨사(加德鎭節制僉使)에 복직, 공조참판 등을 지냈다.

 

1630년(인조 8) 경기 수사(水使)로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가 되어 1634년(인조 12) 전라도수군절도사가 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 때 공주영장(公州營將)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용인(龍仁)에 이르러 싸우다 전사했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경주(慶州) 숭렬사(崇烈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정무공실기(貞武公實記)》 2권이 있다.

 

↑정무공 최진립장군 영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