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보학/성씨별관향

영천최씨(永川崔氏)

야촌(1) 2007. 10. 17. 23:49

영천 최씨(永川崔氏) 편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 마을에 100여호의 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법산 최씨의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최씨(崔氏)의 관향은 125여개 본이 전하고 있으나 이중 시조가 분명히 밝혀져 있는 본관은 약 40여본이다.

그중 종인수 등이 많은 주요한 본관으로는 영천(永川)을 비롯해 경주(慶州) 전주(全州) 계림(鷄林) 동주(東州 : 철원) 해주(海州) 삭녕(朔寧) 강릉(江陵) 화순(和順) 강화(江華) 탐진(耽津 : 康津) 수원(水原) 영흥(永興) 흥해(興海) 통천(通川) 수성(隋城) 우봉(牛峰 : 金川) 충주(忠州) 등이다. 1)


우리나라 최씨의 기원은 박혁거세 탄생전설에 나오는 신라 6부촌장중의 한사람인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의 촌장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으로 하늘에서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다고 설화가 전한다.
서기 32년(신라 유리왕9) 최씨로 성(姓)을 하사받은 것으로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성주군화수회장 최열곤

삼국유사에는 소벌도리가 정(鄭)씨의 조상으로도 되어있으며 진주소(蘇)씨도 소벌도리를 시조로 하고 있다.

최씨의 실질적인 시조는 소벌도리공의 23대손으로 신라 말기의 대문장가이며 경세가인 최치원(崔致遠)이며, 최치원의 윗대에서 개성·삭녕·동주(철원)·전주(최군옥) 등의 본관으로 나뉘어지고 최치원을 1세조로 하는 경주최씨에서 최치원의 첫째아들 최승로(崔承老)의 후손에서 함양·청주·충주·영흥·용강·수원·부안·강릉·강화·화순·통천·양천·원주 등으로 나눠졌고, 지손에서 해주·진주·탐진·전주(최균) 등으로 분관되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한 이론(異論)도 물론 있다.

 

그러나 모든 최씨가 소벌도리공과 최치원을 잇는 신라인의 후예가 된다는 데에는 이론이 없는 것 같다.

그밖에 김씨에서 최씨로 성을 하사 받은 수성최씨와 중국의 귀화 성씨인 충주최씨가 있다.


최씨는 한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의 하나로, 역사에서 숱한 명신·학자·문인을 배출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거족으로 현재 전국 약 280여 성씨 중 인구 순으로 볼 때 김씨, 이씨, 박씨 다음으로 제4위에 해당한다.


영천 최씨(永川 崔氏)의 시조 최 한(崔 漢)은 고려중엽 행예부판 소감으로 후에 영의정에 증직된 최 식(崔 寔)의 4子중 둘째아들로 의종∼명종때에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三重大匡 神號衛 上將軍)을2) 지냈고 나라에 유공하여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책봉됨으로써 영천에 식읍을 받아 세거하였는데 후손들이 본관을 영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연산(燃山)은 영양(永陽), 영천(永川)의 고호이다. 시조공의 묘소는 경북 군위군 송현에 있다.


영의정(領議政) 최 식(崔 寔)의 4子가 모두 부원군으로 봉군되었는데 장자(長子) 연(衍)은 월성부원군(현재의 경주), 2자(二子) 한(漢)은 연산부원군(현재의 영천), 3자(三子) 호(湖)는 곡강부원군(현재의 흥해), 4자(四子) 익(瀷)은 호산부원군(현재의 순천)으로 각각 분파되었다.


영천 최씨는 고려시대의 대문벌로서 시조 한(漢)으로부터 10대안에 대를 이어 15∼6여명의 정승·판서 등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유명하다. 조선조에는 학자 문장가(文章家)와 학덕(學德)으로 추앙된 인물이 특히 많았다.


시조공 연산부원군 최 한(崔 漢)은 영천 이수삼산(二水三山)의 백리땅에 덕업을 쌓았으며 고려 중엽이후 그 자손이 충훈절의(忠勳節義)로 관직과 행적이 사기 실록 명인록(史記 實錄 名人錄)을 장식하고 있다.


2世 큰아들 최 완(崔 玩)은 문과에 장원하여 상찰사(上察使)를 지내고,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증직되었으며, 둘째아들 최 집(崔 王+集)은 좌정승(左政丞)을 지냈다. 3)


최 완의 아들인 3世 최상례(崔尙禮)가 절도사(節度使)를, 최 완의 손(孫) 4世 최승주(崔承澍)는 전호위 상호군, 5世 최윤기(崔允琪)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했으며, 최윤기의 장남인 6世 최 윤(崔 倫)이 사온령동정(司溫令同正)·차자(次子)인 최 소는 진사(進士)를 지냈다. 최 소의 아들 7世 최 영(崔 英)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 4)


시중 최 영의 아들 8世 최 흡(崔 洽)은 좌윤(左尹)에, 그의 아들 9世 최 일(崔 壹)은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에, 그 아들 10世 최흥효(崔興孝)는 예문관 직제학(直提學)에, 그 아들 11世 최계손(崔繼孫)은 사정(司正)에, 그 아들 12世 최 자(崔 滋)는 벽동부사(碧潼府使)에, 그 아들 13世 최희호(崔希浩)는 고령현감에, 그 아들 14世 최상(崔祥)은 이조참의에, 그 아들 15世 최언광(崔彦光)은 용궁현감에, 그 종제 최사철(崔師哲)은 장령(掌令)에 오르는 등, 시조 연산부원군 이후 15대동안 한대도 대소 벼슬이 끊임이 없었고, 직방계(直傍系)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6世 최 윤(崔 倫)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벼슬하여 가문을 빛냈다. 맏아들 7世 최안인(崔安仁)이 경상감사 및 안렴사를, 2子 최안제(崔安悌)가 흥해군수, 3子 최유진(崔有珍)이 판전의사사(判典醫寺事), 4子 최유중(崔有重)이 나주목사를 지냈다. 5)


최안인의 아들 8世 최용화(崔龍和)는 도총제, 손자인 9世 최하영(崔河泳)은 이조판서, 증손자 10世 최 긍(崔 兢)은 증조부에 이어 경상감사에, 그의 동생 최 응(崔 凝)은 시강원 좌우빈객 및 감사로 이어 진다. 10세 최 응의 아들 11世 최강숙은 통정대부 경상도사에, 14世 최철견(崔鐵堅)은 청주부사·전라도사를 지내고 임란의병장으로도 활약했다.


7世 흥해군수 최안제의 아들 8세 최계생(崔繼生)은 종부시 직장, 그의 아들 9世 최 모(崔 慕)는 고부군수에, 그 아들 10세 최사해(崔四海)는 절충장군 내금위장에 올랐으며 부자(父子)가 도의정행(道義正行)으로 교우하여 김탁영(金擢纓)·이보흠(李甫欽) 등의 사화에 연루되기도 했다.


경상감사 최안인의 족하인 8世 최원도(崔元道)는 대사간(大司諫), 그의 동생 최형도(崔亨道)는 판결사, 셋째동생 최정도(崔貞道)는 형조참위로 3형제가 벼슬을 했고, 최원도의 아들 9世 최자화(崔自華)·둘째아들 최 일(崔 壹)은 각각 승의랑·판군기시사에, 최정도의 아들 10世 최윤식(崔潤湜)은 장사랑 군자감정(將史郞 軍資監正)을 지내고 첨지중추부사에 증직되는 등 벼슬이 끊기질 않았다.

 

또한 시조공의 둘째아들인 최 집의 장남 3世 최상지(崔尙智)는 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4世 최익겸(崔益謙)이 진사를, 최익겸의 아들 5世 최극평(崔克平)이 종부시판사(宗簿寺判事)에, 최극평의 아들 6世 최동순(崔東洵)은 광흥창사에, 그 맏아들 7世 최광준(崔光俊)이 병조참판을 역임하고 승록대부 의정부 좌찬성에 증직되고, 2子 최무선은 영성부원군에, 최광준의 아들 8世 최중연(崔仲淵)은 예조판서에 오르고, 판서공의 아들 9世 최자원(崔自源)은 중추부사를 지내는 등 명문(名門)의 대를 이었다.

7世 최무선(崔茂宣, 1325∼1395)은 시조공의 둘째아들 최 집의 5대손이자 광흥창사(廣興倉使)6) 최동순(崔東洵)의 둘째아들로 왜구(倭寇)침범 격퇴용 화약 병기개발을 절감하고 원(元)나라의 염초장(焰硝匠) 화약기술자 이 원(李 元)을 집에 불러 제조법을 배웠으나 아들이 폭사 당하는 등 천신만고의 실험 끝에 화포제작에 성공하고 조정에 건의하여 1377년(우왕3) 화통도감을 설치케 하고 그 책임자가 되어 화포·화전·화통 등의 화기(火器)를 만드는 한편 화포발사에도 전복되지 않는 전함건조에도 힘썼다.

당시 개발된 화포는 대장군포, 2장군포, 3장군초, 육화포, 석포, 화포, 신포, 화통, 화전, 철령전, 화주(지금의 로켓포의 원조) 등이다. 최무선의 선견지명으로 화약 화포 함선제작을 준비한 3년뒤인 1380년(우왕6년)에 왜구가 금강 하구 진포(鎭浦 : 지금의 군산)에 대거 침입했을 때 부원수(副元帥)로서 라세(羅世) 대원수와 함께 전함100척을 이끌고 손수 제작한 화포전함으로 왜구의 선박 500여척을 전멸시켰다.

최무선 우의정추모비

세계 해전사상 최초의 함포전으로 서양보다 200년을 앞선다. 이 전공으로 순성익찬공신(純誠翊贊功臣)과 영성군(永城君)에 책봉되고, 광정대부 검교문하부사 삼중대광(匡靖大夫檢校門下府使三重大匡)을 제수하였다.7)


그 후 관음포해전 등 여러 차례 왜구를 소탕 섬멸하여 태평성대가 되자 조정은 화통도감을 폐지했다. 그러나 최무선 장군은 화약과 화포 전함 제조법을 저술하여 자손에게 전했다. 이 저술은 아들 최해산(崔海山)에 의해 발전되고 임진왜란때 이순신 장군에게 이어진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조선조 개국정국에 동참을 거절했지만 최무선장군의 인물됨을 존경하여 정헌대부 검교참찬문하부사겸 판군기시사(正憲大夫 檢校參贊門下府使兼 判軍器寺事)를 제수했고 조선조 태종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 右議政)과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에 추봉하였다. 공의 묘는 개성 5적동 문부남변 승제문밖 옥련사 근처에 있다. 후예들은 영성군파로 황간 영동지방에 세거한다.


조선의 무신 8世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은 7世 최무선의 아들로 모부인을 통해 아버지의 유명(遺命)을 받들어 최무선의 저서인 <화약수련법><화포법>등을 통해 그 비법을 전수받고 1400년(태종 즉위년) 군기시(軍器寺)에 등용되어 주부(主簿) 겸 훈련부정에 올랐다.

 

1408년 군기소감, 1425년 군기감사를 거쳐 1431년(세종13) 우군절제사에 오르고 1433년(세종15) 파저강 야인정벌(婆猪江 野人征伐)시 최윤덕·이순몽과 함께 적4백기를 돌파한 전공을 세웠다.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세종18)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를 지냈다.8)


그는 여러 관직에 재임중 화차(火車)·완구포(碗口砲)·다발화포(多發火砲 : 지금의 발칸포)·신포(信砲) 등 신화기(新火器)를 창제하여 화약과 화기의 발전에 공헌했다. 태종1년에 화기 보유량이 화약 4근 4냥, 화기 200여 병(柄)이던 것을 그가 관장한 뒤 세종 1년에는 화약 6,900여 근, 화기 1만 3500여 병, 화포발사군 1만여 명이라는 놀라운 숫자로 발전시켰다.


최해산의 아들인 9世 최공손(崔功孫)은 남원 병마절제사를9), 손자인 10世 최 숙(崔 淑)은 내자주부겸 별좌 부호군에, 둘째 손자 최 식(崔 湜)은 중추부사를 지냈다. 그는 증조부 최무선의 공을 기리는 상소를 하여 각궁(角弓)을 하사 받았다. 12世 최세번(崔世蕃)은 참봉을, 14世 최응신(崔應信)은 선교랑좌승지에, 15世 최상흥(崔尙興)은 의금부도사에, 16세 최형진(崔衡鎭)은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로 이어진다.


8世 최용화(崔龍和, 1354∼1422)는 시조공의 둘째아들인 최 집의 6대손이자 감사(監司) 최안인(崔安仁)의 둘째아들로서 비범한 용모와 함께 무예에도 출중하였다. 포은 정몽주와 함께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왔으며 강화부사·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첨절사(僉節使)로 재임시 강화교동에 왜적격퇴용 군자창(軍資廠) 설치를 상소하여 탁월한 전략임을 인정받아 왜적을 막는데 공(功)을 세웠고, 도총부도총제(都摠俯都摠制) 겸 경기도수군도절제사(京畿道水軍都節制使)를 역임하였다. 후손들은 총제공파로 영천·영일·경산시 자인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10)


8世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는 경상도 안렴사 최안인의 조카이자, 정헌대부 판전의시사(正憲大夫 判典醫寺事)를 지낸 최유진(崔有珍)의 아들이며 고려때 목은(牧隱) 문하에서 수학한 학자로 사간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언로(言路)의 중책을 맏고 있었으나11) 공민왕이 정사(政事)를 신돈(辛旽)에게 맡겨 온갖 악정(惡政)이 자행됨을 보고 여러번 직간하였으나 불청함으로 신변의 위험을 느껴 낙향하여 고향인 영천 땅 나현(蘿峴)의 모부인 묘하에 내려와 은거하며 지냈다.


은거 3년여후인 1368년에 과거(科擧) 동년생(同年生)으로 절친한 광주 이씨(廣州 李氏) 시조 둔촌(遁村) 이 집(李 集)이 요승(妖僧) 신 돈의 전횡과 행패를 비판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됨으로써 연로하신 부친(李 唐)을 업고 고향인 개성에서 영천 땅에 우거(寓居)하는 천곡(泉谷)을 찾아 피신해오니, 멸문(滅門)의 화(禍)를 무릅쓰고 낮에는 집뒤 대숲에 숨기고 밤에는 다락방에서 만 3년의 피신생활을 시켰는바, 비밀탄로를 막고자 부인은 벙어리가 되고 여종은 자진하였다.

 

그 이듬해에는 둔촌이 친상(親喪)을 당하자 천곡은 자신의 수의(壽衣)를 내어다가 예(禮)에 어긋남이 없이 빈염을 하고 야밤 비밀리에 선영아래 자기 묘자리에다 장사지냈다. 영천의 나현에 있는 광주 이씨 시조공 묘(廣州 李氏 始祖公 墓)가 바로 그 묘이다. 신 돈이 주살된 후 둔촌 이 집을 개성으로 보내면서 지은 천곡의 눈물겨운 칠운시 이단금지교(利斷金之交)가 전한다.


“때를 아파하는 마음 옷깃에 눈물 가득한데, 떠도는 신세이나 간절한 효심 묘자리까지 이르네, 한산 길 아득히 구름과 안개에 가리고 나현의 둘러친 묘터엔 초목만 무성하여라. 하늘이 이미 두 마리 말의 갈기를 앞뒤로 정하였으니, 어느 누가 그대와 나의 우정을 알리요. 원컨대 대대로 오래도록 이와 같기를 바라노니, 모름지기 교분의 정일랑 쇠도 끊을 수 있게 튼튼하세나.”


둔촌은 그 후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讀書)로 세월을 보냈고, 천곡도 조선조에서 대사간(大司諫)으로 세번이나 불렀으나 고려유신임을 핑계로 끝내 나아가지 않았고 시서(詩書)로 여생을 보내다가 끝내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천곡과 둔촌과의 그 고결한 신의와 우정을 기리는 최사간과 이둔촌이라는 야사가 전해지고 있다. 둔촌의 후손들이 산밑에 보은당(報恩堂)을 지어 세세연연 묘사때는 자손들이 천곡선생의 은혜를 추모하고 있다.


최윤기의 손자인 7世 최 영(崔 英)은 시중(侍中)을 지냈고, 최 영의 아들 8世 최 흡(崔 洽)은 성주 이씨(星州 李氏) 시조인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외손(外孫)이라 처음으로 성주에 천거(遷居)하였다. 관직은 삼사좌윤(三司左尹)벼슬을 지냈다. 12)


9世 최 일(崔 壹)은 천곡(泉谷) 최원도(崔元道)의 둘째아들로서 재종숙(再從叔)인 최 흡에게 출계되었으며 영덕군사(盈德郡事 : 영덕군수)·군기시사(軍器寺事) 등을 역임하였다. 영인 김해 송씨가 성주에서 몰하자 태종께서 소식을 듣고 어릴 때 보살펴준 은혜로 왕명을 내려 예장케 했다.


10世 월곡(月谷) 최흥효(崔興孝)는 군기시사(軍器寺事) 최 일(崔 壹)의 아들로 고려 말 1372년에 태어나 조선 초기에 활약한 문신이자 서예가였다. 1411년(태종11) 문과에 급제하였고 승문원교리·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우헌납·홍문관 직제학 등을 지냈다.13)


조선초기 서예가 중에서 뛰어난 인물로 예서와 조맹부체의 초서(草書)를 잘 썼다. 조 신(曺 伸)의 <소문쇄록>에 ‘최흥효의 초서와 안평대군의 행서가 일세에 성행되었다’라고 하였고, <중종실록>에서는 우리나라의 조맹부 체로 안평대군과 함께 최흥효·박 경(朴 耕)을 대표로 들고 있다.

 

또한 <세종실록>에도 태종이 죽자 선왕의 명복을 위하여 유계문(柳季聞)·안 지(安 止)·최흥효에게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쓰게 하였다. 성호 이 익은 최흥효의 필체는 촉(蜀)체로 소동파(蘇東坡)의 필체를 이름이라고 했다. 몰 후에도 외국사신이나 중국에 보내는 예물로 월곡선생의 병풍을 선호하였다 한다. 선생의 필적은 강릉 최참판 치운(致雲)선생의 신도비문이 현존하고 있으며 해동명필록(海東名筆錄)에 등재되어 있다.


11世 최계성(崔繼性)은 직제학(直提學) 최흥효(崔興孝)의 맏아들로 부사에, 최계성의 맏아들 최자섭(崔自涉)은 영월현감을 지냈는데 순흥부사 빙부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금성대군을 도와 단종복위(端宗復位)에 가담하여 옹서가 동시에 순절하고 매년 한식절에는 영월 단종전 충신각에서 사육신과 같이 향사 지낸다.

 

최자섭의 동생 최자허는 절충장군 동관진 병마절제사에 올랐다. 후손은 고령 연봉파·영동 황간파로 하여 그곳에 취락하고 있다. 11世 최계성의 동생 최계손(崔繼孫)은 최흥효(崔興孝)의 둘째아들로 사정(司正)을 지냈으며14) 조은 최치운(釣隱崔致雲)선생의 매서이다. 사정 최계손은 사정공파로 파조가 되고 법산파는 여기에 속한다.


사정(司正) 최계손의 아들 12世 최 자(崔 滋)는 벽동부사(碧潼府使)를 지내고, 그 아들(최계손의 손자) 13世 최희호(崔希浩)는 한훤당 김굉필의 아서가 되는데 통훈대부 고령현감(高靈縣監)을 지냈다. 후에 낙향 5대만에 다시 서울로 이거하였는데 4대동안 서울 호현방과 고양원당에서 살았다. 그 후 17世 촤항경때 다시 성주로 낙향하게 된다. 15)


최계손의 증손자 14世 최 상(崔 祥)은 고령현감 최희호의 아들로 현량과에 장원급제하여 이조참의에 나아갔는데 조정암 사화에 연루되어 단성현감(丹城縣監)에 좌천되기도 했다. 최 상의 아들 15世 최언광(崔彦光)은 용궁현감(龍宮縣監)을 지냈고. 그 아들 16世 최 복은 무산부사(茂山府使)에, 그 아들 17世 최윤문은 한성판관과 용궁현감을, 4촌 동생이며 창신교위 최 징의 아들 17世 최주문(崔柱門)은 용양위 부사직을 지내는 등, 7世 문하시중(門下侍中) 최 영(崔 英)으로부터 17世까지 직계로 11대동안 한대도 벼슬이 끊어짐이 없이 이어져온 잠영세족(簪纓世族)으로 유명하다.


13世 고령현감의 최희호의 증손자이자 15世 장령(掌令) 최사철(崔師哲)의 장남인 16世 최 정(崔 淨)은 진사에 오르고 서도에 능하였다. 선원(璿源) 연창군(延昌君)의 여서가 되었고 누대로 선원 권세가와 연혼관계임에도 과환(科宦)에는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학문연찬에만 궁리하고 효성이 지극하여 서울에서 성주까지 매년 성묘하여 오던 중 1575년에 성주에서 객몰하였다.


최 정의 아들 17대 죽헌 최항경(崔恒慶)은 동몽으로 3년시묘를 마치고 모부인과 한강선생의 권유를 법산에 낙향할 것을 결심하고 이거 하였는데, 고령현감 최희호의 서울 천거후 4대만에 또다시 성주로 낙향, 최 정(崔 淨)의 동생 최 준(崔 濬)은 태종 능참봉을, 그 아들 최태경(崔泰慶)은 경상도사를 지내고 장질(長姪) 죽헌을 따라 선영 가까운 창천(倉泉)에 낙향정착 하였다.

 

최희호(崔希浩)의 넷째 아들 최 우(崔 祐)는 전력부위(展力副尉)를 지내고 후손들은 부위공파(副尉公派)라 하여 성주군 운산(雲山)에서 취락하였고 그 후에 합천·거창 등으로도 옮겨갔다.16)


14世 난포(蘭圃) 최철견(崔鐵堅)은 학행이 뛰어나 경주부윤의 천거로 청주목사와 전라도사를 지냈으며 임란당시 손자인 최인수(崔仁壽), 증손인 최준립(崔竣立)과 함께 향리 경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으며, 영천의 권응수와 합류하여 영천·경주 등지에서 왜적과 싸웠고 특히 아화산성(阿火山城)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다.

 

경북 경산시 용성면(龍城面) 곡란리(谷蘭里)에 있는 ‘난포고택(蘭圃古宅)’은 조선시대의 고가로 1546년(명종1)에 지었으며 경북유형문화재 제80호로 지정되었다. 최철견의 아들 15世 최 심(崔 深)은 청주교수이고 손자 16世 최인수는 첨지중추부사로 임란선무공신으로 호조참판 겸 부도총관에 추증되었고 증손자 17世 최준립은 참봉으로 무과등제하여 임란과 정유재란시 증조부 최철견과 부(父) 최인수와 함께 의병활동의 공훈으로 부자(父子)가 함께 포도대장 겸 동지중추부사에 승차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최인수의 동생 최시수(최신수)는 군자감정을 지내고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그 아들 17世 최영립(崔嶸立)은 무과로 통정부사를, 18世 최흥한(興漢)은 훈련판관을 19世 최윤흥(崔允興)은 용양위 사과를 지냈다.


12世 군위 훈도장 최 호(崔 浩)의 손자 14世 최기남(崔起南)은 임란때 의병장 활동으로 공신록1등에 책정되어 이조참판에 올랐다. 최기남의 종제이며 13世 최응사(崔應泗)의 셋째 아들인 최벽남(崔擘南)역시 임란때 재종 최기남과 함께 의병장활동으로 유공하여 병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올랐다. 족하 최 율도 숙부 최벽남과 함께 임란에 참전하여 이조참판에 올라 한 집안에 의병3참판(義兵三參判)이 났다.


13世 유정(柳亭) 최응사(崔應泗, 1520∼1612)는 최벽남의 친부로서 이조참판에 승자(陞資)되었고 특히 문장과 시문에 능했다. <유정일집(柳亭逸集)><유정기(柳亭記)><대전이선생사적(大田李先生事蹟)>등의 시문집을 남겼다.

 

 

↑최문병 의병장 안장(보물 제747호)

 

14世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 1557∼1599)은 경산시 자인면에 살면서 학문에 힘쓰다가 1592년(선조25) 임진 왜란이 일어나자 천장산(天丈山)에서 수천 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대장(大將)이 되어 적의 침입을 격퇴했고 다시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과 합세하여 두곡·선암·가지현 등에서 적을 무찔렀다.

 

이어 권응수와 합세하여 영천(永川)에서 적을 화공(火攻)으로 섬멸하여 감목관(監牧官)을 역임했으며 후에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추증되었다.17) 경산 자인의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 되었다.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에는 보물 제747호인 ‘최문병 의병장 안장’이 소장되어 있다.

 

이 안장은 보존상태가 양호한 희귀한 마구로서 등자·배띠·고들개 등 부속구들을 모두 갖추었다. 17世 죽헌(竹軒) 최항경(崔恒慶, 1560∼1638)선생은 경기도 고양시에서 선원 연창군(璿源 延昌君)의 서랑으로 진사를 지낸 최 정(崔 淨)의 아들로 태어났다. 5歲에 입학하여 6歲에 글 읽을 줄 알고 붓글씨를 잘 썼다.

 

부친 최정은 “세상에서는 나를 글씨 잘 쓴다고 하나 이 아이가 나보다 잘 쓴다”고 감탄했다고 전한다. 9歲에 외가(왕실 연창군댁)에 놀러갔다가 그 집 규모나 장식이 사치함에 심기가 불편하여 유가의 자제가 오래 머물 곳이 못 된다며 귀가할 것을 청하니 외조부 연창군이 그 이유를 듣고 이 아이가 군자의 기상이 있으니 후일 최문을 창대케 하리라 하며 경서 일질을 선물하였다 한다.


죽헌공은 16歲때인 1575년에, 부친인 진사공(進士公)이 성묘차 서울에서 성주에 남하(南下)하였다가 성주에서 득병 객졸(客卒)하니 사우지분(師友之分)인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도움을 받고 16세 동몽으로 3년 시묘를 마친 후 모부인(母夫人)은 아들에게 “벼슬을 원치 않는다면 서울로 돌아 갈 것이 아니라 도학이 높은 거유 한강선생을 사사함이 어떠냐”는 모부인의 권유로 낙향을 결심하고 선영에서 가까운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에 낙향하였다.

 

이는 8최흡의 성주 천거 이후 두 번째의 성주천거로 법산에 집성촌을 이루어 430년 동안 정착하는 시발이 되었다. 후일 법산은 소위 법산 최씨 마을로도 일컬어지게 된다.


1575년 법산 최씨 입향조(法山 崔氏 入鄕祖)인 죽헌선생(竹軒先生)은 한강(寒岡) 정 구(鄭 逑)의 문하에서 수학(修學) 종유(從遊)했으며, 1605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벼슬길에 뜻을 끊고 오암정사(鰲巖精舍)를 지어 경사(經史)와 예설(禮說)을 궁구하며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여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다.

 

스스로를 경계하는 잠언을 지어 수행하며 제자들을 훈육한 자경잠(自警箴)이 유명하다.
“하늘은 세상을 고르게 베풀었나니, 넉넉하지도 인색하지도 않도다. 요임금과 순임금은 어떤 사람인가, 노력하면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네. 저 산에 나무를 돌아보라, 소와 양을 방목함을 경계함이로다. 세상일 잠시라도 게을리 하면, 띠 풀이 길을 덮어버릴까 두렵다네. 마음을 잘 가다듬어, 방심하지 말어야 한다.

 

마음은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가, 양심을 가까이하고 허물은 채찍질해야 한다네. 이치에 쫓아 욕심을 다스리고, 의로운 방법으로 남을 공경하고 정직해야 한다. 성의정심 격물치지로, 한결같이 하면 귀한 것을 깨닫게 되네. 안자의 사물과 증자의 삼성이, 오직 내가 힘쓸 목표로다. 내가 먼저 한삼태기의 흙을 옮겨 길을 여는 수고 없이, 마침내 배가 항해하는 기쁨을 얻겠는가. 바다 밖에 바다 없고, 산위에 산이 없도다.”


천곡서원장(川谷書院長)을 여러 번 역임하고 사임코자 하였으나 한강 사문은 그대가 교수를 사퇴하면 오도가 쇠퇴한다며 만류했다. 한강(寒岡)은 사림(士林)에 큰 의논(議論)이 있으면 반드시 수하장(水下丈) 죽헌(竹軒)과 의논하라고 하였다. 죽헌공은 언론이 정대하고 풍의가 순후하여 대소범백사가 모법이 아닌 것이 없었다. 사문이 예서를 저술할때 죽헌공에게 교감을 청함에 두 아들과 더불어 진력하였다.


죽헌공은 제례에 관한 가솔 훈독의 법도가 존엄하고, 천곡서원 이웃동내에 불효자를 설득하여 개과천선시킨 일화며, 선생51세때 박이립(朴而立)이 한강(寒岡)을 무고하자 변무소에 앞장서고 또 박이립의 집을 사림들이 무너뜨리려 할 때 죽헌공께서 당마루 개와장 한장만 내려도 폐가와 같다하여 설득하였는데 사문도 기뻐하고 박이립도 감복하였다.

 

또한 가야산 남산암 법수암에서 유할 때 월담 유혜정(月潭 兪慧靜) 주지스님의 공맹의 도에 관한 질문에 답하는 대화에서 성덕군자의 높은 학문과 대인(大人)의 외경지위엄(畏敬之威嚴)에 감복하여 스님일당이 환속하여 유림이 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죽헌공 71세때에 도동서원에 갔을때 일행인 이석담(李石潭), 이동호(李東湖), 배등암(裵藤庵), 장지분헌(張知分軒), 김고산(金孤山)과 더불어 선사(先師)에 관한 이야기 중 정사의소(丁巳擬疏)에 관한 김고산의 질문에 답하는 죽헌공의 소신에 찬 정연한 논리에 배등암은 선사의 본뜻을 이제야 깊이 얻었다 하고, 동호와 석담도 공경과 의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고 선생의 탁론에 공감하였다.


1620년 한강선생이 卒하자 두 아들과 함께 친히 염빈(殮殯)하여 친상(親喪)을 당한 것 같이 하였고 1,000명의 많은 유림들이 한강선생을 회연서원(檜淵書院)에 봉향하기로 의논할 때 죽헌공을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였고 배등암의 협조로 서원건립에 진력하였다.

 

그 후 죽헌공은 스승인 한강선생의 추모사업에 진력하여 <오선생예설(五先生禮說)>을 백매원(百梅園)에서 교정하고, 문집을 간행하는 한편 신도비(神道碑) 건립 등 유업에 성의를 극진히 하였으며, 죽헌공(竹軒公)은 후일 강문향오현(岡門鄕五賢)의 한사람으로 칭송되었으며, 백매원(百梅園)의 제제다사(濟濟多士) 가운데 죽헌공의 학행덕망을 높이 평가하여 한강선생과 동문들은 죽헌을 ‘수하장(水下丈)’이라 불렀으며 도덕군자라 하였다. 18)


임진왜란 때 김학봉(金鶴峯)선생의 초유격문(招諭檄文)에 감격하여 늙은 모부인(母夫人)을 위하여 싸움터에는 나아가지 못하였으나 죽헌공은 다음과 같은 감읍시를 지었다.
“나라의 어렵고 위태로움이 천 갈래 근심인데, 나라에 충성하고 어버이에 효도하는 길은 같건만, 황량한 이 골짜기에 그 누가 초유(招諭)하는 격문을 전하였나. 허리춤에 헛되이 우는 칼빛만 차갑구나”


또한 죽헌공은 70歲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에게 명(命)하여 고령 창의진(高靈 倡義陣)에 나가게 하였다. 임금이 청나라 왕에게 부끄러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는 분루의 원한시를 남겼다.
“가을은 깊어 흰 수염의 늙은이 책과 칼도 슬프구나, 고약하고 더러운 오랑캐들 임금님은 분하노니…”


문집은 전란에 소실되고 잔질을 수습하여 4권2책이 전한다. 공조판서 겸 도총관 성산 이원조가 서문을 섰다. 죽헌공이 1638년 5월 19일 79세에 卒한후 1678년에 통훈대부(通訓大夫)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19)

 

1735년에 사림공의(士林公議)에서 수하3현으로 추앙하던 죽헌선생 3부자(三父子)를 오암서원(鰲巖書院)에 봉향(奉享)하였다. 중국의 소씨3부자(蘇氏3父子)를 버금가는 죽헌삼부자(竹軒三父子)의 방정한 군자의 품행과 높은 학덕을 온 세상에 기리고자 세덕사(世德祠)를 건립하여 세세 년년 제향을 올리고 있다.


배위(配位)는 풍산류씨로 서애(西厓) 류성용의 재종매(再從妹)가 된다. 실하에 두 아들 은과 린을 두었다. 필력도 빼어나서 자손을 위한 서법서로 난정서(蘭亭序)와 한강선생과의 서간첩이 있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나정에, 신도비 묘갈은 여주 성호(星湖) 이 익(李 瀷)이 썼다.

↑오암서원 효덕사 및 광영루대문

죽헌공(竹軒公)의 두 아들들도 학문과 덕행이 당세(當世)에 고명(高明)하였다.

죽헌공(竹軒公)의 맏아들 18세 관봉 최 은은 아우인 최인과 함께 일찍이 부친을 따라 한강선생께 수업하였고 형과 아우가 함께 사마시에 연벽등상(聯璧登庠) 합격하였으나 벼슬엔 뜻이 없고 오직 경전을 연구하고 학문에만 열중하였다.

 

병자호란에 부친 죽헌의 명(命)을 쫓아 동생 최 인과 둘째아들 최진화와 함께 고령 창의소로 나아가 문경까지 진출하였으나 남한산성의 함락소식을 듣고 감분작시(感憤作詩)하였으며 이때부터 별호(別號)를 뢰광자라 하였다.


덕량이 중후하고 사리가 투철하여 사림간의 의론을 선도하였으며 예학이론에 밝아 한강예서 저술에 교감을 하였고 천곡·회연서원에서 교수로 후학양성에 진력하였다.

 

특히 시인으로서 명성을 드높였다. 통정대부 장예원판결사(通政大夫 掌隷院判決事)에 증직되었으며 저서로 <관봉문집>이 있다.20) 관봉공은 유림공의로 오암서원에 봉향되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묘갈명에서 “법산은 우뚝하고 가수는 탕탕하니 수하삼현 그 이름 산수를 벗 삼아 높고도 오랠지다”라고 적고 있다.(法山嵯嵯 加水湯湯 水下三賢之名 配山水以高山). 관봉공은 실하에 진형(震衡), 진화(震華), 진태(震泰), 진중(震中) 4형제가 다 출중하여 후일 파조가 되었다.


죽헌공의 둘째아들인 매와(梅窩) 최 인은 8歲에 백매원에 수학하고 한강선생 몰후(歿後) 여헌(旅軒) 장현광 선생께 종학(從學)하였고 대학자의 자질을 인정받았으나 단명하였다. <물자설(勿字說)>의 저술을 비롯하여 <춘정편략(春正編略)><상제례서(喪祭禮書)>분류성편(分類成篇)><가례절집해(家禮節集解)><대학인의(大學引義)><독서회록(讀書彙錄)>등 명 저술이 많다.

 

1635년에 퇴계(退溪) 이황의 변무소(辨誣疏)를 썼고 병자호란때 형제가 의군(義軍)으로 출정하였으나 강화(講和) 소식을 듣고 통곡하고 돌아와 별호를 치광자(癡狂子)라 하였다. 오암서원에 배향되었고 <매와집(梅窩集)>이 있다. 필재(筆才)가 뛰어나 성주군청 뒷편에 위치한 성산관 현판글씨를 써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문집서문과 행장은 응와 이원조가 썼다.


한편 17世 최우직(崔友稷)은 최여곤(崔汝崑)의 아들로 1600년에 태어나 조선 인조7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을 지내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자인현감(慈仁縣監)을 지냈다.21)


관곡(寬谷) 최서림(崔瑞林)은 학문과 행의(行儀)가 훌륭하여 학행(學行)으로 참봉(參奉)에 기용되었으며, 규암(規庵) 최수태(崔秀泰)는 최 식(崔 湜)의 후손으로 효우(孝友)에 돈독(敦篤)하고 학문(學問)이 정미(精微)하여 문장행의(文章行義)로써 세인(世人)의 추앙(追仰)을 받았다.


형산(馨山) 최동희(崔東熙, 1886∼1957)는 근세의 유학자로 시문에도 능하였다. <형산유고(馨山遺稿)>등의 문집이 있다. 형산(馨山)은 시(詩)·부(賦)·경의변론(經義辨論) 등 저술을 많이 남겼으나 6.25때 모두 불타버리고 극히 일부만 수록되었다고 한다.

 

시(詩)의 “회옥중성아(懷獄中晟兒)”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감옥에 있는 아들을 생각하며 읊은 것이고, “유내금강정양사(留內金剛正陽寺)”, “한중서회(閒中書懷)”에는 화조월석(花朝月夕)의 자연을 노래하고 있다.

 

잡저의 <의등(疑謄)>은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을 둘러싼 호락논쟁(湖洛論爭)에 대하여 자기의 소신을 밝힌 글이다. 영천 최씨(永川 崔氏)는 전국 약 6천가구 2만인 정도의 종인이 전국 각지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대표적인 집성촌으로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법산)와 경산시 용성면 곡란리·외촌리 등이다.


경북 성주군으로의 이거한 후의 현조(賢祖)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시조공 최한(崔漢)의 16대손인 죽헌공(竹軒公) 최항경(崔恒慶, 1560∼1638)이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여 조선 선조때(1578년)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 법산(法山)으로 이거(移居)한 이후 430여년 이상 이곳을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영천 최씨중 법산(法山)은 시조공의 10대손인 월곡(月谷) 최흥효(崔興孝)의 차자(次子)인 사정공(司正公) 최계손(崔繼孫)의 손자로 통정대부 고령현감(通政大夫 高靈縣監)을 지낸 최희호(崔希浩)의 후(后)로써, 영천 최씨의 여러 분파가운데 사정공파(司正公派)에 해당한다. 최희호는 죽헌공 최항경의 고조(高祖)가 된다.


죽헌공(竹軒公)의 장자인 한성좌윤 관봉공 최 은은 법산최씨 종파로서 좌윤공파로 계승발전하게 된다. 관봉공은 4子를 두었는데 모두 파조로 분파된다. 죽헌공(竹軒公)의 손자인 장남인 최진형(崔震衡)공은 가선대부 한성부좌윤(嘉善大夫 漢城府左尹)에 증직되어22) 그 후손들은 좌윤공파(左尹公派)로 분파된다.

 

차자 최진화(崔震華)공은 월주공파(月洲公派)로, 삼자 최진태(崔震泰)공은 아들 최 위(崔 瑋)의 관직에 따라 방어사공파(防禦使公派)로, 4子 최진중(崔震中)공은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분파되었다.


죽헌공 최항경의 차자(次子)인 매와공(梅窩公) 최 인의 후손들은 이후 매와공파(梅窩公派)로 분파되었다. 이렇게 하여 법산에서 430여년동안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19세 월주(月洲) 최진화(崔震華, 1611∼1686)는 죽헌공의 손자로 일찍이 여헌 장현광 문하에서 수학,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고 독서와 시문(詩文)으로 자적(自適)하였다. 26歲때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관봉공·매와공을 따라 고령 창의소에 나아가 의병에 가담하였으나 이미 남한산성이 함락됨에 분루를 삼키고 돌아왔다.

 

노후(老後)에 성주군 용암면 이어실(伊於谷)에서 후학양성을 위한 강의소를 열어 정성을 다하였다. 유적비가 성주군 수륜면 법산 동편 산록에 있다. 이후 월주공파(月洲公派)의 파조가 된다.


20세世 귀락당(歸樂堂) 최 위(崔 瑋, 1651∼1726)는 죽헌선생의 증손(曾孫)으로 가선대부 호조참판(嘉善大夫 戶曹參判)에 증직된 최진태(崔震泰)의 아들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춘천도호부사 겸 강원도병마방어사(江原道兵馬防禦使)23)로 명성을 떨쳤는데 후에 방어사공파(防御史公派)로 분파되었다. 문무겸비하고 효우돈행(孝友敦行)하여 선삼대(先三代) 6위의 증직첩(贈職牒)을 어전에서 받은 효자였다.


한편 관봉공의 막내아들 19世 최진중(崔震中)은 가선대부 호조참판(贈嘉善大夫 戶曹參判)으로 증직된후 참판공파(參判公派)로 분파되고, 죽헌공의 증손이자 최진중(崔震中)의 아들인 20世 만오당(晩悟堂) 최 호(崔 琥, 1661∼1721)는 숙종때 통정대부 도호부사(通政大夫 都護府使) 등을 역임하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그의 아들인 21世 최후태(崔後泰, 1689∼1759)는 무과에 올라 조선 영조 때 하동도호부사(河東都護府使) 겸 진주진병마절도사(晋州鎭兵馬節度使)를 거치는 동안 공덕비가 세워졌다.24) 최후태의 4촌이며 통덕랑 최 로의 아들 최후필(后弼)은 효능참봉을 지냈다.


부사공(府使公) 최후태의 맏아들인 22世 최 시는 통덕랑에25), 부사공 최후태의 손자 23世 최도중(崔道重)은 진사에 올랐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조모의 안질이 백약이 무효라 실명지경에 이르러 후원에 단을 쌓고 목욕재계하여 야반에 하늘에 백배기도하기 100일만에 광명개안 되었고 또 부친 통덕랑 최 시의 장례시에 방해를 하는 묘하주민들을 하늘에서 돌비가 쏟아져 내려 악당들이 물러가게 되어 무사히 장례를 치루었다.

 

그의 효성을 찬양하여 하늘이 내린 돌비라 하여 석우진사(石雨進士)로 <성주읍지>에 상술되어 있다.
최후태의 증손자 24世 몽와(蒙窩) 최주하(崔柱河)는 석우진사의 아들로 문장행의(文章行義)가 수승하고 공의처리(公議處理)가 분명하여 문목공 한강선생의 사창유허창학계(社倉遺墟倡學契)의 정조와 성주읍지(星州邑誌) 중수편찬에 참여한 대학자였다.


부사공 최후태의 둘째아들 22世 최 암(1712∼1782)은 무과에 합격하여 통정대부 여산도호부사(礪山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26) 공은 효성이 지극하여 칠순이 넘은 도호부사가 색동옷으로 95세의 모부인의 100세 송수를 축원하는 춤을 추어 기쁘게 하고 조석으로 음식의 맛을 미리보고 모부인의 기호에 맞도록 봉양하였다.

 

도호부사 최 암의 아들 23世 최범성(崔範星)은 정시무과에 합격 통정대부 겸 삼수도호부사(三水都護府使)를 역임했고, 생원 최후현(崔后賢)의 손이며 23世 최범중(崔範重)은 무과로 통정대부 경주영장을 지내고 6대가 내리 가문을 빛냈다.


부사공 최후태의 아우 통덕랑(通德郞) 21世 겸와(謙窩) 최후식(崔后寔)은 효성이 지극했고 학문과 필법(筆法)으로 이름을 얻었으며, 최후식의 두 아들 22世 통덕랑 최 극은 호를 남은와(南隱窩)라하고 회연서원에서 후학양성을 위한 창계를 하였고 오암서원 창건때는 도검거를 맡아 유공 하였다.


16世 최 정(崔 淨)의 아우인 최 준(崔 濬)은 참봉을 지냈고 아들인 경상도사(慶尙都事) 최태경(崔泰慶) 두 부자(父子)는, 먼저 낙향하여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법산)에 복거한 장손 죽헌공(竹軒公) 최항경(崔恒慶)을 따라, 선영(先塋)에서 가까운 성주군 가천면 창천 (倉泉)에 이거(移居)하여 세거하고 있으며 참봉공파(參奉公派)로 불리워진다.27)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27世 최규동(崔奎東)선생은 16世 최 준(崔 濬)의 7세손이다
27世 최규동(崔奎東)은 수학의 대가로서 최 대수(崔 代數)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민족교육기관인 중동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학양성으로 애국운동을 하였고 광복후 미군정하에서는 교육자문회의 교육행정분과 위원장으로 이 나라 교육제도의 기틀을 짜는데 유공했다.

 

대한교육연합회회장(현 교총)과 초대 서울대학교총장을 역임하였다. 묘와 신도비는 성주 창천에 있다. 그의 아들 28世 최성장(崔性章)은 의학박사로 소도육군병원장으로 활약하였고, 둘째아들 최성악(崔性岳)은 대통령 비서관을 지내고 후에 중동학교를 경영하였다.


21世 한거(寒居) 최후대(崔后大, 1669∼1745)는 죽헌선생의 현손이자 좌윤공 최진형(崔震衡)의 아들로서 진사에 오르고 기품행의(氣品行義)가 정연하고 문장이 탁월하였으며 대사에 임해서는 의와 리로서 처결하니 선비와 장자(長者)의 풍도가 넘쳤다고 칭송하였다.

 

공은 유림의 공의를 받들어 죽헌선조의 작천정사 구기(舊基)에다 운암서원(雲巖書院)을 창건하여 향사하는데 공헌하였다. <한거문집(寒居文集)>을 남겼다. 진사 한거공(進士 寒居公) 최후대는 아들만 6형제를 두었는데 2자 최 륜(崔 崙)은 숙부 최후융(崔后隆)에 출계하고 다섯째 최 업(1704∼1741)은 영조때 무과에 급제하고 통정대부 거제 도호부사(巨濟 都護府使)에, 막내 최 유와 손자 9명중 5명이 모두 통덕랑이고 4명은 학자로 대성한 빛나는 가문을 형성하였다. 묘갈명은 야성 송이석(宋履錫), 묘지명은 순암 안정복(安鼎福)이 썼다.


출계한 최 윤의 아들 23世 부훤재(負暄齋) 최익중(崔益重, 1717∼1788)은 한거공 최후대의 손(孫)으로 성균관 생원을 지냈고 문장과 덕행이 세상에 널리 칭송되었으며 실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학문의 실용성을 중시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고, 순암 안정복(安鼎福)선생은 선생의 글은 정의 독윤(正義 篤倫)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절로 옷깃을 여미게 한다고 평하고 있다. <부훤재집(負暄齋集)>9권5책이 있다.


부훤재공은 죽헌, 관봉, 월주, 한거의 네분 선조의 유문을 편차하였고 1730년에 건립된 운암서원이 영조17년(1741년)에 철폐된 후 정조5년(1781년) 다시 유림의 공의로 죽헌 3부자를 향사지내는 오암서원(鰲巖書院)으로 재창건함에 공헌하였다. 부훤재의 아들 최붕해(崔鵬海, 1755∼1790)는 최응중(崔應重)의 아들로 부훤재 최익중(崔益重)에게 출계되었으며 갑과 제3랑에 합격, 조선 정조10년에 성균관 직강에 올랐다. 28)


23世 삼일옹(三一翁) 최연중(崔演重, 1750∼1818)은 생원 최 서(崔 瑞)의 아들로 진사를 지냈고, 1799년 농서(農書)를 저술하여 조정에 올려 농정개혁에 이바지했고 경서1질을 하사 받았다. 유고(遺稿) 문집이 있다.


24世 최주덕(崔柱悳, 1770∼1843)은 삼수도호부사 최범성(崔範星)의 아들로 무과에 등제하여 통정대부 곽산군수(郭山郡守)에, 24世 최용학(龍鶴)은 자인군수에 올랐다.


24世 화서제(華西齊) 최주하(崔柱夏, 1782∼1862)는 최항중(崔恒重)의 아들로 진사를 지냈으며 이른바 3대진사집으로 후손들이 경남 거창군 함양군 서상면 일대에 거주한다.


26世 해암(海庵) 최영록(崔永錄, 1793∼1871)은 퇴계, 한강의 영남학단의 후경으로 대표되는 대학자로서 칭송 받았으며 학덕과 문장이 탁월하여 성주의 회연서원과 청천서원에서 후학을 가르쳤으며 <해암집(海庵集)>등의 문집을 남겼다. 부(父)는 통덕랑(通德郞) 최성한(崔聲翰)이며 경북 고령에서 거주하였다.

 

1814년에 대흉(大凶)이 들어 종족(宗族)과 인척을 비롯하여 촌민(村民)에 이르기까지 고루 구휼(救恤)하였다. 조모(祖母)의 복(服)을 마친 뒤에 해안(海晏)으로 이사하여 해암(海菴)이란 현판(懸板)을 걸고 좌도우서(左圖右書)로 낙(樂)을 삼았다. 자손(子孫)들에게 훈계(訓戒)하여 거빈설(居貧說)을 지었다.


25世 오강(梧岡) 최영한(1810∼1860)은 최주헌의 아들로 진사에 올랐으며 문집이 있다. 25世 최운한(崔雲翰, 1814∼1880)은 중추부사 최주방의 아들로 연일현감을 지냈으며 선정으로 송덕비가 있다. 그의 동생 최규한(崔奎翰, 1820∼1877)과 최승한(崔昇翰, 1825∼1879)은 형제모두 용양위부호군을 지냈다.29)


부호군 최규한의 아들인 26世 최영오(崔永午)와 연일현감 최운한의 아들인 최영두(崔永斗)는 모두 선략장군 부사과(宣略將軍 副司果)를 지냈으며, 부호군 최승한의 아들인 26세 긍죽(肯竹) 최영만(崔永萬)은 통훈대부 중추원의관에 올랐다. 30)


그외 27世 최은동(崔殷東, 1866∼1935)은 통정대부 최영원의 아들로 절충장군(折衝將軍) 상주좌영장(尙州左營將) 겸 토포사(討捕使)를 지냈으며, 부호군 최영학의 아들인 여와(餘窩) 최우동(崔禹東)이 궁내부주사와 승훈랑을, 그 아들 28世 최성욱(崔性郁)은 현세 마지막 선비로 옥산·도산서원장을 지냈다.

 

29世 최봉곤은 법산조범의 문집을 남겼다. 최상욱의 아들인 28世 최성창(崔性昌)이 선략장군 부사과에, 진사 최기중의 증손인 26世 최영효(崔永孝)가 사과(司果)에 이르렀다. 31)


한거공의 손자 23世 통덕랑 최석중(崔錫重)이후 24世 최주팔(崔柱八), 25世 최용한(崔龍翰), 26世 최영기(崔永紀), 27世 최진동(崔鎭東), 28世 죽암(竹庵) 최성욱(崔性旭), 29世 죽하(竹下) 최정곤(崔晶坤)은 관봉공 최진형(崔震衡)으로 이어지는 좌윤공파(左尹公派) 주손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 몰염하여 수문호(守門戶)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으로 문중을 다스리며 향당의 선비로서의 전통가치숭상의 소임을 감당하여 왔다.


법산 최씨는 효행문중으로도 유명하다. 문중 족보행적에는 효행기록이 많이 눈에 띈다. 도덕군자의 기본덕목으로 가가효자의 실천기록이 대를 잇고 있지만 여산 도호부사를 역임한 22世 최 암은 95歲의 노모를 위하여 색동옷을 입고 100수 기원의 춤을 추고 조석으로 음식을 미리 맛을 보고 기호에 맞도록 공양하였다.

 

또한 23世 진사 최도중(崔道重)은 실명위기의 조모를 위하여 100일 기도로 광명을 되찾게 되고 선고 장례시 하늘에서 돌비가 내려 석우진사(石雨進士)로 추앙 받고 있으며, 시아버지 26世 최영우(崔永祐)의 불치병을 권씨(權氏)며느리가 허벅지 피육을 잘라서 구료하여 쾌차케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효행비가 오암서원 입구에 건립되고 효부각을 지어 찬양하고 있다.

 

법산 마을 100여호 중 효부상을 받은 현존자가 8명이나 건재하고 있음은 일찍이 죽헌선생의 지극한 충효사상에 연유한 가훈실천의 효과라고 평가되고 있다. 성주군에서는 법산마을을 “효마을 법산”이라고 명명하였다.

 

성주출신 중 영천최씨를 빛낸 현재 인물로 초대 서울대학교총장을 역임한 최규동선생과 서울시교육감과 경기대학 교수을 지내고 현재 한국교육삼락회 총연합회장으로 활약하고 있는 최열곤 박사와 영진전문대학 최달곤 학장, 최경수 조달청장, 최갑동 장군 등이 현직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29世 최창곤은 오암서원 사우각과 권효부기념각을 건립하는 등 문중을 빛내고 있다.

◇엮은이 : 이 재 필
◇교 정 : 영천최씨 법산대종회장 최열곤

1) 경주최씨는 신라의 석학 최치원을 시조로 한다. 

↑영천최씨 죽헌공파 종택

고려 때의 최승로와 최 항, 동학(東學)의 창시자였던 최제우, 동학의 제2대 교주가 된 최시형, 한말의 거유로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단식으로 일생을 마친 최익현 등이 알려져 있다./

 

전주최씨는 인조반정 때 1등 공신으로 대제학·영의정을 역임한 최명길과 그의 아들로 당시 소론(少論)의 영수로서 당론의 소용돌이 속에서 6차례나 영의정을 역임하였던 최석정 등이 알려져 있다./

 

동주최씨는 철원 최씨라고도 한다. 고려 말기의 강직 청렴한 명장이자 명재상이었던 최영장군과 국학(國學)의 대가 최남선 등이 유명하다./

 

해주최씨는 동방 유학의 비조(鼻祖)로 오늘날까지 ‘해동공자(海東孔子)’로 추앙 받고 있는 최 충(崔 沖)의 아버지 최 온(崔 溫)을 시조로 한다./

 

삭녕최씨는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영의정을 두 차례나 역임한 최 항이 유명하다./

 

강릉최씨는 세종 때의 명신이었으며 특히 형옥(刑獄)에 밝아 왕명을 받고 <무원록(無寃錄)>을 주석한 최치운이 알려져

있다./화순최씨는 당대의 저명한 성리학자로 대사헌에 추증된 최영경이 유명하다./

 

강화최씨는 ‘관서부자(關西夫子)’의 칭호를 받았던 최용소 등이 알려져 있다./

개성최씨는 왕건을 도와 고려건국에 공을 세운 최 응이 유명하다./

우봉최씨는 무신정권을 잡았던 최충헌과 최 우 등이 알려져있다./

 

통천최씨는 조선시대 티무르를 복속시킴으로써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으며 대마도를 정벌하고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과, 송도삼절의 한사람인 최 립 등이 유명했다.


2) 삼중대광은 총리급, 상장군은 군단장급

3) 상찰사는 나라에 위급한일이 발생했을때 군사관계 등의 임무를 맡고 지방에 파견되는 당상관 이상의 벼슬로 추정 /

   판도판서는 중앙행정관서의 하나인 판도사의 우두머리/ 좌정승은 좌의정과 같은 말이다.


4) 절도사(병마절도사=병사)는 종2품직으로 현대의 중장급 정도 / 사온령동정은 궁궐에서 쓰는 주류를 관할하던 관청인

    사온령(=사온서)의 실무 담당관으로 추정

5) 판전의시사는 궁궐에서 쓰는 의약품 및 치료 등을 맡은 관청인 전의시(=태의감=사의서)의 우두머리 벼슬.


6) 광흥창사는 벼슬아치들의 녹봉으로 줄 곡식을 맡아보던 관청인 광흥창의 정5품직 벼슬로 현대의 서기관급 이상

7) 광정대부(=금자광록대부)는 문관벼슬의 종2품직으로 장·차관급

8) 군기시는 병기제작과 보급을 맡은 관청으로, 주부는 종6품직 사무관급, 군기소감은 종5품 서기관급, 군기감사는 종3

    품∼정4품 이사관급 / 좌군동지총제는 삼군의 한 벼슬로 2품이상의 벼슬 / 우참찬과 동지중추원사는 2품직 장관급이

    다.


9) 병마절제사는 사단장(소장)급 정도

10) 부사는 3품직으로 이사관∼관리관급 / 병마사는 동북면과 서북면에 둔 3품의 무관직 / 첨절사는 군사전략상 주요 고

     을에 둔 종3품직 무관직으로 해당고을의 목사나 부사가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11) 정헌대부는 문·무관의 정2품 첫째품계인 장관급 / 대사간은 3품직으로 사간원의 우두머리 벼슬

12) 시중은 정승의 다른 말 / 좌윤은 고려때 삼사의 종3품 벼슬의 하나이며 조선때는 한성부의 종2품직의 하나임

13) 승문원은 외교관계 문서를 맡은 관청으로 교리는 종5품직으로 현대의 외교통상부 서기관급 정도 / 판관은 종5품직

     이다. 판관은 종5품직으로 군수급 / 우헌납은 5품직으로 우사간으로도 불렀다. / 홍문관제학은 종2품직으로 차관급.


14) 사정은 조선때 오위의 정7품직으로 현대의 위관급 장교

15) 통훈대부는 문관벼슬의 정3품직으로 관리관급

16) 부위는 조선때 외빈부(=부마부)의 정3품 벼슬 또는 무관들에게 주던 정7품이하 품계 / 장령은 사헌부의 4품직으로

     현대의 검찰청 또는 감사원의 부이사관급 정도.



17) 감목관은 나라에서 운영하는 목장을 관리하는 종6품 무관외직으로 대체로 부사나 첨사가 겸임하였다. / 한성부우윤

     은 종2품으로 현대의 서울시부시장급 정도.

18) 水下란 오암정사가 회연보다 대가천 하류에 있기 때문이다.

19) 제용감정은 왕에게 진상하는 각종 천이나 인삼 및 왕이 벼슬아치들에게 내리는 의복이나 물감 등을 맡아보던 관청

     인 제용감의 우두머리 벼슬.



20) 장예원은 노비문서와 노비문제에 소송을 맡아보던 관청이며 장예원판결사는 정3품직으로 현대의 지법원장급 정도

21) 좌랑은 육조의 정6품직 벼슬로 현대의 각부처 사무관급

22) 가선대부는 문.무관의 종2품 둘째품계로 차관∼차관보급 / 한성부좌윤은 현대의 서울부시장급

23) 병마방어사는 종2품 무관직으로 보통 그 고장의 큰 고을원이 겸임하였는데 현대의 중장급.

24) 도호부사는 종3품직으로 이사관급 / 병마절도사는 종2품직으로 군단장급 정도.



25) 통덕랑은 문관의 정5품 첫째품계로 현대의 서기관급 이상

26) 통정대부는 문관 정3품 당상관으로 관리관급 이상

27) 도사는 관찰사를 보좌하던 각 도의 5품직으로 현대의 부군수급 정도

28) 성균관 직강은 정5품직으로 서기관급 / 오암서원은 고종2년 1865년 대원군 서원철페령으로 훼철된 후 1985년 120

     년만에 종손 최정곤등 종인들의 노력으로 복원되었다.



29) 부호군은 오위도총부의 종4품직으로 품계로는 현대의 영관급 장교 또는 경무관급이지만 사실상 준장급 정도

30) 선략장군은 무관직 종4품 둘째품계로 현대의 영관급 장교품계이지만 사실상 준장급 정도에 해당/부사과는 오위의

     종6품직으로 현대의 중대장 또는 대대장급 장교.



31) 절충장군은 품계로는 무관벼슬의 정3품 당상관이지만 사실상은 대장급에 해당/영장(=진영장)은 각 병영 및 수영에

     소속된 정3품직으로 보통 해당 고을의 부사나 목사가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토포사는 소위 ‘도적’을 잡은 일을 맡은

     벼슬로 처음에는 해당 고을원이 겸하였으나 뒷날에는 진영장이 겸임하도록 하여 진영장 겸 토포사라 하였다./

 

    종사랑은 문관 7품직이며 궁내부는 왕실에 관계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이고, /승훈랑은 문관 정6품직으로 사무관급이다/

    사과는 오위의 정6품직으로 오늘날의 영관급 장교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