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오사화의 발생동기 재지사림(在地士林)의 주도로 성리학적 정치질서를 확립하려 했던 사림파의 사조(師祖) 점필재 김종직(佔畢齋 金宗直)이. 세조의 즉위를 비판하여 지은〈조의제문(曺繼文〉이 그가 죽은 6년 뒤인 1498년(연산군 4) 제자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으면서 사초(史草)에 수록한〈조의제문 弔義帝文〉의 내용이 문제가 되어, 무오사화를 불러일으킨 단초가 되었다. 이 일로 김종직이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고 생전에 지은 많은 저술도 불살라졌다. 항우가 초(楚)나라 회왕(懷王:義帝)을 죽인 것을 빗대어,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것을 비난하였다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종래의 집권세력인 유자광(柳子光)· 정문형(鄭文炯)· 이극돈(李克墩) 등 훈구파가 성종 때부터 주로 사간원·사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