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 3

헤이그특사 이상설, 연변에서 근대 교육 시행 반일운동의 발단.

코리안 스피릿 ㅣ 중국 속 우리역사기행 19] 헤이그특사 이상설, 연변에서 근대 교육 시행 반일운동의 발단. 승인 2014.11.25. 09:09:07 l 글/사진=정유철 기자 | hsp3h@ikoreanspirit.com 대성중학교정의 이상설선생기념관 정식명칭은 ‘이상설선생역사전람관’이다. 교정에 세워진 ‘보재 이상설선생역사전람관 준공기’를 통해 이 전람관의 연혁을 살폈다. “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을 1906년 8월에 용정 땅에 최초로 개숙 하시고 초대 숙장이 되신 보재 이상설선생을 길이 기리려고 민족적 성원과 창학정신을 계승한 용정중학교의 협력을 얻어 오늘여기에 본 역사전람관을 세우고 항일투쟁과 민족교육에서 쌓으신 선생의 업적을 선양하는 바이다. 2000년 8월 15일 세월이 흘러 준공비가 낡고 훼..

을사오적 후손들은 어떻게 살고있나?

●을사오적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할 당시, 한국측 대신 가운데 조약에 찬성하여 서명한 다섯 대신으로, 박제순(외부대신), 이지용(내부대신), 이근택(군부대신), 이완용(학부대신), 권중현(농상부대신)이다. ▲을사조약 체결의 재현모습 ▲을사조약 체결 기념사진 ■2010년 8월 기사_http://www.nocutnews.co.kr/show.asp?idx=1550811 이완용은 사망 직전 지금의 재산으로 환산할 경우 600억원에 이르는 엄청난 재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경술국치가 일어난 1910년 당시 이완용의 재산은 지금의 가치로 200억 원에 이르는 100만원을 갖고 있었는데, 1907년 고종 강제퇴위와 정미7조약의 대가로 10만원(20억원), 한일병합 조약 체결의 대가로 ..

이상설(李相卨)의 생애와 활동사항

이상설(李相卨)의 생애와 활동사항 이범세(李範世)·여규형(呂圭亨)·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 등과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또 헐버트(Hulbert,H.B.)와도 친교를 맺어 영어·프랑스어 등을 익혔으며, 특히 수학·물리·화학·경제학·국제법 등을 공부하였다. 1894년(고종 31) 문과에 급제해 이이(李珥)를 조술(祖述: 스승의 도를 이어받아 서술하는 일)할 학자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그 뒤 비서감비서랑(祕書監祕書郎)에 임명되었다. 1896년 성균관교수 겸 관장·한성사범학교교관·탁지부재무관 등을 역임하고 궁내부특진관에 승진하였다. 1904년 6월 박승봉(朴勝鳳)과 연명으로 일본인의 전국 황무지개척권 요구의 침략성과 부당성을 폭로하는 「일인요구전국황무지개척권불가소 日人要求全國荒蕪地開拓權不可疏」를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