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20. 10. 13. 02:17
■조선시대 초상화의 제작 7단계
1단계 : 기름종이에 유탄으로 윤곽을 그린다.
2단계 : 윤곽을 따라 먹선을 그린다. 얼굴을 자세히 묘사한다.
3단계 : 배채 기법으로 종이 뒤에 채색한다. ‘완성된’ 초본은 엄격한 품평을 거친다.
4단계 : 초본 위에 비단을 올려 먹으로 따라 그린다.
5단계 : 먹선으로 초상화 윤곽을 완성한다.
6단계 : 배채법으로 비단에 채색한다. 얼굴색이 명징하게 드러나게 한다.
7단계 : 비단 앞면에 채색을 보완해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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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몽주(鄭夢周)
[생졸년] 정몽주(鄭夢周) 1337(충숙왕 복위 6)~1392(공양왕 4)
정몽주(鄭夢周)는 고려후기 문하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제조관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로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이고,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1337년(충숙왕 복위 6)에 태어나 1392년(공양왕 4)에 사망했다. 고려말 친원파가 득세하던 상황에서 신진사류로서 친명정책을 주장했고, 명와 왜에 직접 사절로 가는 등 담대한 외교가로서 활약했다. 성균관의 사성으로서 신진 사류를 양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기울어가는 고려 국운을 바로잡고자 국가기강 정비와 민생 안정에 노력했다. 이성계의 위세와 명망이 날로 높아지고 그를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이들을 제거하려다가 역으로 이방원(李芳遠)의 문객 조영규 『趙英珪,미상~1395(태조 4) 』 등의 습격을 받아 격살(擊殺) 당했다.
↑개성 숭양서원(開城崇陽書院)에 모셔져 있는 포은 정몽주선생 초상화이다.
↑포은 정몽주선생 초상화
개성 숭양서원에 소장되어 있던 정몽주의 초상을 궁중화가 이한철『李漢喆,1812년(순조 12)~1893년(고종 30)』이 베껴 그린 것이다. 크기는 가로 35cm, 세로 61.5cm이다.
오른쪽 상단에는 1880년(고종 17) 하순에 영식(英植)이 썼다는 제사 (題辭)가 있어, 당시 구한말 개화파 정치인 홍영식『洪英植,1855년(철종 6)~1884년(고종 21)』이 쓴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포은 정몽주선생 옛 묘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포은 정몽주선생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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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
[생졸년] 1545년(명종 즉위년)~1598년(선조 31)
↑충무공 이순신 장군 표준 영정 장우성(張遇聖,1912~2005) 작 / 아산 현충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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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의 충무공 이순신 상 - 동아대학교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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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상(李鳳祥)
[생졸년] 1676년(숙종 2)~1728년(영조 4) 초상화 - 작자미상 / 일본 교토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선후기 형조참판, 충청도병마절도사, 훈련금위대장 등을 역임한 무신 순절자로 본관은 덕수
(德水). 자는 의숙(儀叔). 이순신(李舜臣)의 5대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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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1501~1570) - 이유태(李惟台,1916~1999) 작 /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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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미상의 퇴계 이황 초상- 1934년 발간된 일본 교육정신과 이퇴계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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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李堣,1469~1517) - 작자미상 / 한국구학진흥원(진성이씨 송당종택 기탁) /이퇴계의 숙부임.
송재(松齋) 이우(李堣, 1469∼1517)는 퇴계 이황의 삼촌이며, 1498년(연산군4) 생원으로서 문과에 급제
하여 여러 관직을 지냈으며, 중종반정에 공을 세워, 정국공신(靖國功臣) 4등에 책봉된 후 청해군(靑海君)
에 봉해졌다.
이 초상화는 공신도상(功臣圖像)으로써 안동시 종가내(宗家內)에 봉안되어있던 것이다.
바닥에 깔린 채전과 족좌대(足座臺)를 묘사하는 방식이 이전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던 새로운 요소이
며, 신체의 윤곽선이 부드럽고 옷 주름선이 각지게 처리된 것이 특징이다.
특히 단령의 짙푸른 색은 후대에 가채(加彩)한 것으로 보인다.
[작자미상, 16세기 축(軸), 견본채색(絹本彩色), 170.0×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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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신 장군(鄭忠信將軍) 진영 - 국가민속문화재36-1호
[생졸년] 1576년(선조 9)~1636년(인조 14)
조선 중기의 무신인 정충신(鄭忠信, 1576∼1636) 장군의 초상화로, 다른 유물들과 함께 서산군 지곡면 정충신(鄭忠信) 장군의 사당에 보관하고 있다. 족자 형태의 초상화로, 머리에는 검은색의 사모를 쓰고 관복을 입고 중국식 의자에 앉아있는 장군의 전신(全身)을 그렸다. 가슴에 두른 흉배에는 구름과 모란이 그려 있으며, 초상화에는 ‘금남군시충무정공유상(錦南君諡忠武鄭公遺像)’이라고 써 있어, 시호가 내려진 1685년 8월 11일 이후에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인물개요]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고려 명장 정지(鄭地)의 9대 손으로, 아버지는 전라도 광주 좌수(지방의 자치 기구인 향청의 우두머리)였던금천군(錦川君) 정윤(鄭綸)이다. 불행이도 어머니가 영천이씨 이인조(李仁祚)의 딸로 노비였다. 따라서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라 그도 노비가 됐다.
허지만 그의 그런 운명을 바꾼 것은 전쟁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 나이로 광주목사이던 권율의 휘하에 병졸로 들어갔다. 체격이 왜소한 데다 나이도 어려 직접 전투에 참여 하기 보다는 적지 정찰과 서신을 전달하는 연락책 임무를 주로 수행했다. 그러나 민첩하고 영리해 권율의 신임이 높았다.
권율의 장계를 갖고 의주에 갔다가 운명을 바꾼 백사 이항복을 만난다. 백사는 그의 재주가 남다름을 아깝게 여겨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면서 학문을 가르켰다. 당시는 유능한 장수들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때였다. 이항복은 그에게 ‘충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임금에게 아뢰어 면천도 시켰다. 정충신은 이항복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학업에 매진해 병과(3등급 중 3등급)로 무과에 합격한다.
1602년 명나라를 다녀왔으며 1608년 조산보(함북 경흥) 만호에 임명됐다. 그러나 1618년 스승인 이항복이 인목대비 폐모론을 반대해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자 동행했다. 1619년 명나라의 요청으로 출병한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대패하자 다시 등용되고 1624년 일어난 이괄의 난을 앞장서 진압해 진무공신 1등에 책록되고 금남군(錦南君)에 봉해졌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부원수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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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희학(權喜學) - 작자미상/ 경북유형문화재 제281호
소장처 ⓒ안동권씨 화원군 종가
■ 권희학(權喜學)
생졸년 : 1672년(현종 13)~1742년(영조 18)
조선후기 분무공신 3등에 책록된 공신 및 무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문중(文仲), 호는 감고당(感顧堂). 안동부 향리(鄕吏) 권명형(權命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697년(숙종 23) 세자책봉주청사(世子冊封奏請使) 최석정(崔錫鼎)의 군관으로 청나라에 다녀와 교련관(敎鍊官)이 되고, 그 뒤 여러 고을의 첨사를 역임하였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금위영교련관으로 도순무사(都巡撫使) 오명항(吳命恒)을 따라 안성·죽산 등지에서 전공을 세워 난을 평정, 분무공신(奮武功臣) 3등에 책록 되고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올라 화원군(花原君)에 봉해졌다.
그 뒤 곤양군수(昆陽郡守)·운산군수(雲山郡守)·장연부사(長淵府使)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그 업적이 오래도록 칭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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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곡 최석정 초상화(明谷 崔錫鼎 肖像畵)
↑명곡 최석정 반신상
[생졸년] 1646년(인조 24)~1715년(숙종 41)
[문화재 지정] 보물 1936호
[소장처] 국립 청주박물관
[내용설명]
지천 최명길(遲川 崔鳴吉,1586~1647)의 손자로,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기도 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은 의자 교의(交椅)에 앉아 있는데, 관복인 녹색 단령을 입고 있으며, 관리가 쓰는 검은 모자인 높은 오사모(烏紗帽)를 착용하고 있다. 의자에는 표범 가죽을 깔았고, 발받침인 족좌대(足座臺) 위에 검은 가죽신발인 흑피혜(黑皮鞋)를 신은 두 발을 올렸다.
얼굴 묘사는 선으로 이목구비의 윤곽을 그린 뒤, 선묘에 붙여 미세한 색감을 가미하는 선염법(渲染法)으로 채색하였다. 선묘는 얼굴 전체의 입체감을 고려하여 최소화 하였으며, 서양 화법에서 유래된 음영법이 적용되었다.
초상화는 18세기 초반의 초상에서 볼 수 있듯이 서대가 아래쪽 학을 가리고 있으며, 관복은 굵기의 변화 없이 예리한 먹선으로 윤곽선을 그렸다.
단령「團領: 옷깃을 둥글게 만든 포(袍)」의 옷주름은 직선과 곡선을 적절히 혼용하여 다소 단순화하여 파악하는 경향이 짙어서 초상 전체가 다소 강직한 인상을 주었는데. 옷주름 사이를 따라 다소 짙고 어둡게 담채한 점도 18세기 초반 경에 나타나는 특징이라고 합니다.
이 초상화는 17세기 공신도상에서 보이는 경직된 신체 표현에서 탈피하여 18세기 초 자유롭고 정교한 작품으로 변모하는 중요한 시기의 드문 작품으로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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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상(李麟祥,1710~1760)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조선 4대 명문가 출신 증조부가 서얼이어서 신분이 하락했다.1736년
진사시에 급제 1739년부터 관직생활 외직을 돌았다. 1754년 경기도
음죽현(경기도 이천) 근처에 정자를 짓고 살다가 구 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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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가[朴齊家,1750년(영조 26)~1805년(순조 5)]
↑박제가[朴齊家) 서자 실학자로 "북학의"(1778 정조 2년 완성) 저자 조선이 가남한것은 무역이
부진한 탓이라 여겼고 보수적인 쇄국정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진보적인 실학자다. 정조가 승
하한 뒤인 1801년 노론 벽파의 미움을 받아 유배형에 처해졌고 4년뒤인 56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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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이언진[李彦瑱, 1740년(영조 16)~1776(영조 42) / 향년 36세] 미야세 류몬 작
18세기 동사여담에 수록. 중인 신분으로 2000수가 넘는 시를 썼지만 36세로 요절하였다.
연암 박지원은 "우상전"에서 문장으로 나라를 빛낸 사람이라고 그의 문학적 재능을 높게
평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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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으로 유명했던 영의정 이산해 초상화.
죽창한화의 저자 이덕형은 이산해의 숙부 토정 이지함이 선조의 묘를 명당으로 이
전하면서 한산 이씨 가문이 크게 위세를 떨쳤다고 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이산해(李山海)
[생졸년] 1539년(중종 34)~1609년(광해군 1)
이산해(李山海)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여수(汝受), 호는 아계(鵝溪)·종남수옹(終南睡翁).
이장윤(李長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치(李穉)이다. 아버지는 내자시정(內資寺正) 이지
번(李之蕃)이며, 어머니는 남수(南脩)의 딸이다.
조선시대 홍문관 정자, 사헌부 집의,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539년(중종 34)에 태어나
1609년(광해군 1)에 사망했다. 1563년(명종 18) 사가독서를 했고 문장에 능했다. 1588년(선
조 21) 우의정이 되고, 1590년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에 책록되었다.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릴 때 북인의 영수로 활약했다. 1590년 정철이 세자책봉 문제를 일으
키자 탄핵하여 유배보냈고, 서인의 영수급 대신들까지 파직·귀양보냄으로써 동인의 집권을 확
고히했다. 북인이 다시 분당할 때 강경파인 대북파 영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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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서원 미천사에 소장된 미수 허목 영정
↑미수(眉瘦) 허목(許穆)
[생졸년] 1595년(선조 28)~1682년(숙종 8)
보물 제1509호
지정일 : 2007. 07. 27
소재지 : 강원도 춘천시 석사동 산27-1
소유자 : 국립중앙박물관
관리자 : 국립춘천박물관
크기 : 72.1×56.8cm(그림), 28.6×65.8cm(발문)
허목(許穆)의 초상화는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충남 부여의 도강영당(道江影堂)에 소장되어 있는데, 도강영당의 초상은 2010. 10. 26 수원화성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세 작품은 전신과 반신의 차이는 있으나 얼굴과 의관의 모습이 모두 똑같다. 이 중 보물 제1509호로 지정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허목 초상(許穆肖像)은 오사모(烏紗帽)에 담홍색의 시복(時服ㆍ관원들이 공무 시 입던 옷)을 입고 서대(犀帶ㆍ무소뿔 장식이 있는 띠)를 착용한 좌안7분면(左顔七分面)의 복부까지 오는 반신상이다.
안면의 경우 일단 갈색선으로 윤곽을 잡고, 눈ㆍ양쪽 뺨ㆍ턱 등에는 옅은 음영의 줄기를 드리워 수척한 노인의 모습을 선연하게 표현하였다. 보다 절묘한 것은 7분면으로 인한 양어깨 높이의 차이가 오히려 자연스러운 점이며, 눈을 덮을 듯한 흰 눈썹, 맑은 점청 처리, 날리는 듯한 흰 수염 등이 허목(許穆)의 인품을 잘 반영하고 있다. 담홍포(淡紅袍)의 주름은 선염(渲染) 효과없이 포착했는데, 깡마른 몸체를 간결한 필선으로 암시하고 있다.
화폭 상부의 제발문(題跋文)에 따르면 정조 18년(1794년) 정조(正祖)가 허목(許穆)의 인물됨에 크게 감동하여 은거당(恩居堂ㆍ1678년 숙종이 허목에게 하사한 집)에서 선생의 82세 진(眞)을 모셔다가 당대 제일의 초상화가 이명기(李命基)에게 그리게 한 이모본(移摸本)이다. 영정의 오른쪽에는 채제공(蔡濟恭)이 당시에 쓴 표제가 붙어 있다.
이 초상은 허목(許穆) 생시에 그려진 상은 아니라 1794년의 이모본(移摸本)이긴 하지만 현재 원본이 전해오지 않는 실정에서 17세기 대표적인 사대부 초상화의 형식을 보여줌과 아울러, 노학자의 문기어린 풍모를 잘 전달해낸 당대 최고의 어진화사(御眞畵師) 이명기의 솜씨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하겠다. 규격(세로×가로) : 72.1×56.8cm(그림), 28.6×65.8cm(발문).
1794년에 임금께서 문정공 眉叟 許穆을 오래도록 흠모하시어 초상화를 구해 보고자 하여 臣 蔡濟恭에게
명령을 내렸다. 신은 사림과 의논하여 이에 가을 7월 26일에 경기도 연천 隱居堂에서 선생의 82세 초상화
를 받들어 서울로 가지고 와 당시 뛰어난 화가인 李命基에게 모사하여 올리게 하였다.
임금께서 그것을 보시고는 비단을 준비하여 명기에게 이모하여 帖을 만들어 궁궐에 두게 하시고 들여온 그
림은 그 후손에게 돌려보내라고 하셨지만, 사림의 건의로 順興書院에 안치하게 되었다. -중략- 이 글을 기
록함은 후대에 삼가 이 초상화를 배알하는 자로 하여금 이 상의 사실을 알리고자 함이다. 1794년 9월 15일
75세에 삼가 씀.
蔡濟恭 跋文
十八年甲寅 上曠感眉叟許文正欲得
七分小眞以覽乃命臣濟恭臣與士林議內
於秋七月辛亥自涎上隱居堂奉先生八十二歲
眞 入京師使當世善畵者李命基模以進
上覽之別備綃 命命基移模作貼置諸大內
所眞本還下其後孫 於是士林合辭言曰嶺南
郡魯鄕也 況順興之白雲洞奉孔聖曁四聖十
哲七十子寶幀我朝 周愼齋李梧里先生
影本俱在焉今是眞也 非是之歸將安之乎
議遂合奉誥于順興書院以安之 嗚呼今天下
陸沈吾道東東而盡在於南今先生之眞又南
矣此天之意也 壹人力所然哉 况梧里卽先生
之師友知已 易曰同聲相應同氣相求聖人
不我欺也不亦奇哉 標題卽濟恭所書直書
先生姓諱者以仰備覽而然也 記之使
後之祗謁者知其事爲
標題
是年菊秋望日後學原任領議政蔡濟恭七十五敬題
1794년 9월 15일 후학 영의정 채제공은 75세에 삼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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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란 장군(李之蘭將軍)
[생졸년] 1331년(충혜왕 2)~1402년(태종 2)
본관은 청해(靑海). 초성은 퉁(佟), 초명은 쿠룬투란티무르[古論豆蘭帖木兒]. 자는 식형(式馨). 남송
악비(岳飛)의 6대손으로, 아버지는 여진의 금패천호(金牌千戶) 아라부카[阿羅不花]이며, 이화영(李
和英)의 아버지이다.
이성계와는 결의형제를 맺었고, 출신지는 북청(北靑)이다. 첫째 부인은 함안군부인(咸安郡夫人) 혜
안택주(惠安宅主) 윤씨(尹氏)이며, 둘째 부인은 태조비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의 조카딸인
상산군부인(象山郡夫人) 곡산강씨(谷山康氏)이다. 아버지의 벼슬을 이어받아 천호가 되었으며,
1371년(공민왕 20) 부하를 이끌고 고려에 귀화해 북청에서 거주하며, 이씨 성과 청해를 본관으로 하
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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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로(李重老) /작자미상 / 보물 1174-2호 /소장처 : 경기도박물관
[생졸년] 1577년(선조 10)~1624년(인조 2)
조선시대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된 공신.무신으로 본관은 청해(靑海). 자는 진지(鎭之), 호는
송계거사(松溪居士). 개국공신 이지란(李之蘭)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이인
기(李麟奇)이고, 어머니는 전주이씨로 감찰 이경(李敬)의 딸이다.
1605년(선조 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과 훈련도감낭청을 지내고, 1621년(광해군 13)
에 이천부사(伊川府使)가 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때 훈련대장 이흥립(李興立), 장단부
사 이서(李曙) 등과 함께 장졸을 모아 참여하였으므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錄
勳)되었고 청흥군(靑興君)에 봉하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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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元曉大師) 표준 진영
[생졸년] 617년(진평왕 39)~686년(신문왕 6)
신라의 고승. 속성은 설(薛). 아명은 서당(誓幢)·신당(新幢) 이름은 사례(思禮). 원효라는 이름은
출가한 뒤 지은 이름으로, 첫새벽(始旦)을 뜻한다. 그는 압량(경산 자인)에서 출생하여 15~16세
출가하였다. 아버지 담내가 신라 16관등 중 11위인 나마여서 신분이 6두품이었다.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 내말 설담날(관직은 신라 16관등 중 11위인 나마였다)의 아들이며, 설총
의 아버지이다.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지 90년 만에 태어난 그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
상가이자 사회지도자였다(신라의 불교). 그는 해박하고 심오한 불교 학해(學解)로 방대한 분량의
불교 관계 저술을 남겼다. 시호는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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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사(義湘大師)
[생졸년] 625년(진평왕 47)~702년(성덕왕 1)
의상(義湘,신라 진골 김씨)은 삼국시대 화엄종(華嚴宗)의 개조이자 화엄십찰의 건립자인 승려이다. 625년(진평왕 47)에 태어나 702년(성덕왕 1)에 사망했다. 19세 때 경주 황복사로 출가했다. 661년(문무왕 1) 당에 유학하여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에게서 8년간 화엄을 공부했다.
신라로 돌아온 해에 낙산사(洛山寺)의 관음굴에서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드렸는데, 이때의 발원문인 『백화도량발원문』은 그의 관음신앙을 알게 해주는 261자의 간결한 명문이다. 부석사를 비롯한 화엄십찰을 전국에 세웠고 화엄경을 강론하며 3000명의 제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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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경서(金景瑞)
[생졸년] 1564년(명종 19)~1624년(인조 2).
김경서(金景瑞)는 조선 중기 전라도병마절도사, 정주목사,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역임한 무신이다. 1561년(명종 19년) 평안남도 용강에서 아버지 현감 김인용(金仁龍)과 어머니 나주 정씨의 아들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초명은 김응서(金應瑞)였으나 1613년 박응서(朴應犀)란 이가 반란죄(反乱罪)로 처단되자 김경서(金景瑞)로 개명했다. 본관은 김해(金海).자는 성보(聖甫), 시호는 양의(襄毅)이다.
임진왜란 당시 평양의 대동강에서 일본군과 맞서 교전하였다. 정유재란 때에는 일본의 간첩 가케하시 시치다유의 농간에 속아 이순신을 공격하였다.
1619년에는 부원수로 도원수 강홍립과 함께 명나라를 지원하기 위해 출병하였으나, 광해군의 밀명으로 투항하였다. 이후 후금의 사정을 조선에 보고하려다가 청나라에 적발되어 살해 되었다. 그리고 그의 휘하에 있던 장수 중 김진(金搢) 등만 살아서 조선에 도착하였다.
훗날 우의정에 추증되고, 고향에 그의 충성을 표창하기 위하여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이팔용 평양민속공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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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가신(洪可臣)
[생졸년] 1541년(중종 36) ~ 1615년(광해군 7)
조선 중기때, 한성부우윤, 지의금부사, 형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흥도(興道), 호는 만전당(晩全堂)·간옹(艮翁). 아버지는 홍온(洪昷)이며, 어머니는 군수 신윤필(申允弼)의 딸이다. 민순(閔純)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 1571년(선조 4) 강릉참봉(康陵參奉)이 되었을 때 뛰어난 재주를 인정받아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에 특진되고 이어 형조좌랑·지평을 거쳐 1584년 안산군수를 지냈다.
1588년 수원부사로 있을 때 구황(救荒)의 공이 있어 표창을 받았으나 평소에 정여립(鄭汝立)과 가까이 지낸 이유로 1589년 정여립의 모반 사건 때 파직 당하였다.
1593년 파주목사가 되고, 이듬해 홍주목사로 부임해 1596년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민병을 규합해 무장 박명현(朴名賢)·임득의(林得義) 등과 함께 난을 평정하였다.
강화부사·형조참판·강원도관찰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내고, 1604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청난공신(淸亂功臣) 1등에 책록, 이듬해 영원군(寧原君)에 봉해졌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온양의 정퇴서원(靜退書院)에 봉안되어 있다. 저서로는 『만전집(晚全集)』과 『만전당만록』이 있다. 시호는 문장(文壯)이다.
↑홍가신 영정
↑홍가신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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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흥(南以興)
[생졸년]1576년(선조 9)~627년(인조 5)
남이흥(南以興, 1576년(선조 9)~1627년(인조 5)은 조선 중기의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사호(士豪), 호는 성은(城隱).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남응룡(南應龍)이고, 아버지는 목사 남유(南瑜), 어머니는 형조판서 유훈(柳壎)의 딸이다.
무과(武科)에 급제해 선전관, 부총관, 포도대장, 충청도병마절도사, 경상도병마절도사, 구성 부사(龜城府使), 안주목사(安州牧使) 등을 역임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탄핵을 받았으나 장만(張晩)의 변호로 무사했고 1624년 이괄(李适)의 난 당시 도원수 장만의 휘하 장수로 반란을 평정했다.
이 공로로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고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 이후 평안도병마절도사로 영변부사(寧邊府使)를 역임했다.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당시 안주(安州)에서 청군에 대항해 맞섰으나 무기가 떨어지고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성(城)에 불을 지르고 김언수(金彦壽), 함응수(咸應秀, 장돈(章惇, 양진국(楊晉國)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사후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고 의춘부원군(부원군(宜春府院君)에 추봉되었으며, 안주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남이흥 장군 영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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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명항(吳命恒)
[생졸년] 1673년(현종 14)~1728년(영조 4).
조선후기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우찬성(右贊成), 우의정(右議政)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사상(士常), 호는 모암(慕菴)·영모당(永慕堂). 영의정 오윤겸(吳允謙)의 현손이며, 오달천(吳達天)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오도융(吳道隆)이고, 아버지는 오수량(吳遂良)이며, 어머니는 영의정 여성제(呂聖濟)의 딸이다.
1705년(숙종 31)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1709년 교리(校理)를 거쳐 설서(說書)·사서(司書)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부수찬(副修撰), 1713년에 겸필선(兼弼善), 1715년 부응교(副應敎)·이조좌랑을 지냈다.
1716년 승지에 이어 경상도와 강원도·평안도의 관찰사 등을 거쳐 사직(司直)으로 있다가 1724년(영조 즉위년)에 소론이 실각하자 사직하였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등용될 때 지중추부사로 기용되어 이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나자 판의금부사로 4도도순무사를 겸하여, 난을 토평하여 분무공신(奮武功臣) 1등이 되고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에 봉해졌다.
이어 우찬성에 승진되었으나, 자신이 이인좌와 같은 소론이라는 것을 자책하고 상소하여 사퇴를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고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효자정문이 세워졌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우의정 오명항선생 영정
↑우의정 오명항선생 반신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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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선생 본인이 그린 자화상(自畵像).
[생졸년] 1713년(숙종 39)~ 1791년(정조 15)
시·서·화 삼절로 불렸고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했다.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忝齋)·산향재(山響齋)·박암(樸菴)·의산자(宜山子)·견암(蠒菴)·노죽(露竹)·표암(豹菴)·표옹(豹翁)·해산정(海山亭)·무한경루(無限景樓)·홍엽상서(紅葉尙書). 아버지는 판중추부사를 지낸 현(鋧)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 익만(翊晩)의 딸이다.
아버지의 교육과 자형 임정(任珽)의 영향을 받았으며, 처남 유경종(柳慶種) 및 허필(許佖)·이수봉(李壽鳳)·이익(李瀷)·심사정(沈師正)·강희언(姜熙彦) 등과 사귀었다.
6세부터 글을 짓고 8세 때 숙종 국상에 어울리는 구장(鳩杖)에 대한 시를 짓는 등 재주가 뛰어났으나, 형 세윤(世胤)이 귀양살이하는 것을 보면서 과거에 응시할 생각을 버렸다. 32세 때 처가인 안산(安山)으로 옮긴 뒤 약 30년간을 지내면서 문인으로서 시·서·화를 고루 갖추고 그 깊이를 더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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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 초상화(肖像畵)
[생졸년] 1754년(영조 30)~1825년(순조 25)
조선후기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및 문인으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낙서(洛瑞), 호는 척재(惕齋)·강산(薑山)·소완정(素玩亭)·석모산인(席帽山人). 아버지는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을 증직 받은 이원(李遠)이며, 어머니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된 평산신씨(平山申氏)로 부사 신사관(申思觀)의 딸이다. 계비(繼妣)는 역시 정경부인이 된 진주이씨(晉州李氏)로 이한복(李漢復)의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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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이교(金履喬)
[생졸년] 1764년(영조 40)~1832년(순조 32) 작자미상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조선후기 공조판서, 예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공세(公世), 호는 죽리(竹里). 할아버지는 대사간 김시찬(金時粲)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김방행(金方行)이며, 어머니는 심황(沈鐄)의 딸이다. 동생이 김이재(金履載)다.
정약용과 문과 동기로 1810년(순조 10) 10월 통신사(通信使) 정사(正使)로 임명되어 1811년(辛未年) 2월 대마도로 간 조선의 마지막 통신사였다.
↑김이교(金履喬)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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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유구(徐有榘)
[생졸년] 1764년(영조 40)~1845년(헌종 11)
조선후기 이조판서, 우참찬, 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판서 서종옥(徐宗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대제학 서명응(徐命膺)이고, 아버지는 이조판서 서호수(徐浩修)이다. 어머니는 김덕균(金德均)의 딸이다. 당숙(堂叔) 서철수(徐澈修)에게 입양되었다.
저술로는『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경솔지(鶊蟀志)』·『옹치지(饔치志)』·『누판고(鏤板考)』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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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의 작품들
조선 말기의 풍속화가『1758(영조 34)~?)』본관은 고령이며 첨사(僉使) 신한평(申漢枰)의 아들로 자는 입부(笠夫), 호는 혜원(蕙園)이다.
김홍도와 함께 조선 시대 풍속화에 관해 쌍벽을 이루었다. 그는 직업 화가로 기녀나 무속과 관련한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미인도(美人圖)>, <탄금(彈琴)> 등이 있다.
● 미인도(美人圖)
1.신윤복 작 -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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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윤복 작 간송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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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송수거사사(松水居士寫) 미인도 - 온양 민속박물관 소장
송수거사가 누구인지는 미상 / 단 이인문(李寅文, 1745년~미상)으로 추정함.
무술(戊戌)년이면 1778년(정조 2) 가을에 송수거사(松水居士)가 그린것으로 여겨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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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작자미상의 미인도 - 도쿄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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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작자미상의 미인도 - 동아대학교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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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 작품의 운낭자 상(雲娘子像)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채용신 선생은 탈렌트 채시라씨의 고조부이기도하다.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선생의 운낭자(雲娘子) 상(像)은 종이에 채색된 작품으로 크기는 120.5 x 62㎝로 1914년에 그려진 작품이다.
이토록 자애로운 모성(母性)을 드러낸 옛 초상화는 드물다.
그림의 우측 상단에 주인공의 이름이 보인다. ‘운낭자(雲娘子)’ 27세. 초상이라고 쓰여있다.
운낭자는 평안도 가산(嘉山) 관청에 소속된 기생(妓生)으로 본명은 최연홍(崔蓮紅,11785~1846)이었다. 나이 27세인,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자 그녀는 살해된 가산군수(嘉山郡首)의 장례를 치르고, 군수의 아우를 보살폈다.
그 덕분에 기생의 신분을 벗고, 논밭까지 하사받는 특혜를 누렸다.
초상화를 그린때와 화가의 이름은 작품의 왼쪽 중간쯤에 ‘갑인늑월석지사(泐月石芝寫)’라고 쓰여있다. 즉 갑인년(甲寅年)은 1914년이고, 늑월(泐月)은 윤달의 옛말인데, 그해 윤달인 5월에 그렸다는 얘기다.
석지(石芝)는 당대 무관 출신의 초상화가로 늘리 알려진 채용신(蔡龍臣)의 아호(雅號)이다.
여인의 초상화로서 이처럼 우뚝한 존재감을 드러낸 작품은 별로 없다.
머리 기름을 발라 두상(頭上)에 딱 붙인 머리칼은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다. 가르마 아래에서 눈섭까지 관상에서 일컫는 ‘천정(天庭) 치레’ 도 말쑥하다. 눈매는 부드럽고 입술선은 또렸하다. 두 뺨에 보일듯 말듯 드리운 홍조가 수줍게 보인다.
고개를 한쪽으로 약간 틀어 시체(時體)말로 ‘얼짱각도’ 를 취했는데, 선전성보다 정숙미가 두드러지는 것은 시선에 아무런 도발이 없기 때문이다. 화가는 앞서 살다간 의로운 여인의 의미지를 나름대로 상상해 보앗을테다. 그의 붓질은 염색(艶色)이 아닌 모성(母性)을 따라갔다.
운낭자(雲娘子)가 안은 아들도 보는이의 눈길을 빼았는다. 발가벗은 몸통이 뜻밖에도 포실하다. 손에 노리개를 들고 이빨이 보이도록 활짝 웃는 모습이 당대의 우량아로 선방되는데 손색없다. 쌍가락지를 낀 운낭자의 손등도 도톰하긴 마찬가지다.
옥색 치마위로 골이 훤히 드러난 가슴은 지나치게 탐스럽다. 아이의 발육을 보건대, 젖이 잘 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놓이지 말아야 할 곳은 따로 있다. 당코 저고리의 동정과 치마 끝에 살포시 내민 버선 발을 보라! 눈부시도록 새하얗다. 사뭇 신령스러운 기운이다.
글 손철주(평론가.칼럼니스트/1954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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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기(義妓) 계월향『 桂月香, 미상~1592(선조 25)』
또 다른 이름으로 계선(桂仙)이라고도 칭함.
평양기생 논개와 더불어 2대 의기임.
계월향(桂月香)은 평양 출생으로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조선침략 두달만인 6월 11일 서울을 함락 시킨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의 군대가 평양을 함락시킨다. 포로된 계월향(桂月香)은 소서행장의 친족이며 부장이었던 고니시(소서비)의 진중에 있게된다.
그리고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관장수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자 적장(敵將)을 속여 김응서로 하여금 적장의 머리를 베게 한 뒤 탈출하려다 왜적에게 발각되자, 자신
자신은 김응서의 칼을 받아 순국하고 김응서만 탈출하게 했다는 평양의 의기(義妓)이다.
계월향은 이미 평양성의 무관이었던 김응서(金應瑞)의 애첩이었다. 그는 김응서와 적의 동태를 내통하여 김응서를 오빠라고 성안으로 끌어들인 후 잠자는 적장 고니시의 목을 베어 탈출하려다, 왜적에게 발각되자, 자신은 김응서의 칼을 받아 순국[자결]하고 김응서만 탈출하게 했다는 평양의 의기(義妓)이다.
1919년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나이 20세이던 평양의 채금홍(蔡錦紅, 1900~1930)이라는 기생은 계월향의 사당인 의열사(義烈祠)를 참배하고 아래의 시를 지었다가 왜국 순경에 잡혀 10일간 구류되었다고 한다.
“嗟歎前朝桂月香(차탄전조계월향) 슬프도다. 조선의 계월향이여,
芳魂何處獨悽傷(방혼하처독처상) 꽃다운 혼 어느 곳에서 홀로 슬퍼하는가.
練光亭上朱欄朽(연광정상주란후) 연광정 위 붉은 난간은 썩어지고,
義烈祠前蔓草長(의열사전만초장) 의열사 앞에는 덩굴만 무성하네.“
계월향은 1962년 ‘평양기생 계월향)’ 1977년 ‘임진왜란과 계월향’이란 제목으로 영화화 되었고, 1986년에 KBS ‘이화에 월백하고’라는 프로에서 탈렌트 강수연이 주연한 단편 드라마가 있었다. 2016년에는 천개의 비밀, 어메이징 스토리에서 ‘임진왜란의 숨겨진 의기’ 계월향으로 소개 되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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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초상화
1.조반(1341~1401)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조선개국2등공신
2.조반부인 작자미상 국립중앙박물관
계림 이씨(경주이씨)
3.하연(1376~1453) 작자미상 덴리대학
조선 세종 때 영의정
4.하연부인 작자미상 덴리대학
성주이씨 다정가 고려말 문인 이조년의 5대 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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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식(鄭軾) 부부상 - 작자미상 / 나주 설재서원 소장
[생졸년] 1407년(태종 7)~1467년(세조 13)
조선전기 전라도군적사, 의금부제조, 동지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빙보(憑甫). 정가신(鄭可臣)의 6세손이며, 정문진(鄭文振)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사수(鄭思修)이고, 아버지는 정자신(鄭自新)이며, 어머니는 최사위(崔士威)의 딸이다. 이극근(李克勤)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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