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조선사(朝鮮史)

중국 사신을 깨우친 ‘이진택’

야촌(1) 2022. 12. 15. 22:46

작성일 : 2019. 2. 24

 

■ 중국 사신을 깨우친 이진택

 

↑덕봉정사[德峯精舍/경주시 정자3길 11-6(마동 538)]는 이진택이 만년에 유식하던 장소로 원래는 경주 관광호

    텔 뒤 송림가에 있었으나 1905년 그의 묘소 옆 연못가로 옮겼다. 경주시 마동소재 경북문화재자료 제313호

 

이진택[李鎭宅, 1738(영조 14)∼1805(순조 5)]선생은 어렸을 때부터 학문을 하며 막힘이 없었는데, 8세 때 닭싸움을 보고 “상앙의 법률로 논죄할 것 같으면, 이 닭은 당장 삶아 먹을 것을(若論商法 此.當烹食)…”이라는 글을 지어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1780년(정조 4)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를 거쳐 성균전적·예조정랑·사헌부감찰·병조좌랑·사헌부지평·장령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는데, 노비혁파를 주장한 상소를 올려 공노비 혁파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후 영남 남인의 입장에서 사도세자의 신원문제를 주장하다 고초를 겪기도 하였는데, 이후 다시 복직해 개성 경력(經歷)으로 있을 때 중국의 사신을 깨우친 일이 전한다. 

 

청의 사신이 건륭제의 부고를 전하러 오는데, 그가 이를 맞아 향연을 베풀지 않자 사신이 책망하였는데, 그가 경전을 인용하여 “천자가 죽으면 온 나라가 가무 음곡을 하지 않는 법인데, 어찌 연회를 할수 있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부끄러워 하였다. 또한 굶주린 백성들을 잘 구휼하니 이임 시 개성 백성들이 선혜비를 세웠다.

 

정조 사후 정치적인 이유로 남인 계열이 몰락할 당시 삼수(三水=함경남도 북서쪽에 있는 郡이름)로 귀양갔다가 2년 뒤에 풀려나자 고향에 내려와 덕봉정사를 짓고 은거하여 생을 마쳤다.  후손 이규일(李圭一)이 선생의 유고를 모아  1902년(光武 6)에 6권 3책 목판본으로 문집을 편집 간행하였다. 필자 또한 소장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