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묘지명(墓誌銘)

증 숙부인 능성 구씨 묘지명

야촌(1) 2021. 7. 29. 23:43

■수군 첨 절제사(水軍僉節制使)

 

공(公)의 휘(初諱)는 용주(容柱). 자(字)는 경교(景交)이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학생 준서(浚瑞)이고 어머니는 유인(孺人) 진천 송씨(鎭川宋氏)이다.

 

조부는 이응종(李應鍾)이다. 공은 1816년(순조 16) 8月 21日에 태어나 1839년(헌종 5) 무과(武科)에 올라 행 법성포진(行 法聖浦鎭)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와 관지절충장군(官止折衝將軍)이 이르렀다. 기묘(己卯) 1879년 8월 16일 졸하니 향년 64歲이고 묘(墓)는 금치당곡(金峙棠谷)

 

배(配)는 증 숙부인(贈 淑夫人) 능성구씨(綾城具氏) 은배(殷培)의 따님이다. 1815년(순조 15) 5월 12일생으로, 1852년(철종 3) 7월 13일 양덕방(陽德坊: 서울 종로구 계동 가회동지역) 본댁에서 졸하니 향년 38이고, 같은 달 27일에 광주(廣州) 실촌면(實村面) 연미리(燕尾里) 친당(親堂) 선영하(先塋下) 자좌(子坐)에 안장했다.

 

 

●증 숙부인 능성구씨 묘지명(贈淑夫人綾城具氏墓誌銘) 역문(譯文)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 이태형(李泰炯) 찬(撰)



부인의 성은 구씨(具氏)요. 본관은 능성(綾城)이니 그 시조(始祖)는 고려(高麗) 벽상(壁上) 삼한삼중대광(三韓三重大匡) 검교 상장군(檢校上將軍) 휘 존유(存裕)요, 원조(遠祖)는 본조(本朝=朝鮮)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 좌리공신(佐理功臣) 능성부원군(綾城府院君) 시호(諡號)는 충렬(忠烈) 휘는 치관(致寬)이요,

 

고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 위원 군수(渭原郡守)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휘 석주(石柱)며 증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 경상좌도수군절도사(慶尙左道水軍節度使) 휘 서오(敍五)요, 조는 통훈대부(通訓大夫) 흥덕 현감(興德縣監) 휘 명덕(命德)이며 고는 절충장군(折衝將軍) 공 충 중군(公忠中軍) 휘 정석(鼎錫)이요, 비(妣)는 숙부인(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휘 은배(殷培)의 따님이니 문남상관(文南床關) 북병마절도사(北兵馬節度使) 청강(淸江) 제신(濟臣)의 후손이다.


부인이 1815년(순조 15) 5월 12일에 출생하여 태형(泰炯)에 시집오고. 갑진(甲辰,1844년)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정미(丁未,1847년)에 모부인(母夫人)이 졸하고 철종(哲宗) 임자(壬子,1852년) 7월 13일에 양덕방(陽德坊: 서울 종로구 계동 가회동 지역) 본댁에서 졸하고 같은 달 27일에 광주(廣州) 실촌면(實村面) 연미리(燕尾里) 친당(親堂) 선영하(先塋下)에 안장했다.

 

팔남매(八男妹)를 출생하나 그 다섯은 조사(早死: 일찍 죽음)하고 그 하나는 어리며 부인이 죽은 후 3년 만에 손자 재호(在頀)는 벼슬이 사과(司果)요, 여(女)는 죽산(竹山) 박재준(朴載駿)이니 충민공(忠愍公) 명용(命龍)의 후손이고 재호(在頀) 아들은 봉건(鳳鍵)이니 어리다.


태형(泰炯)의 성은 이(李)요, 자는 경구(景九)며 호는 운옹(雲翁)이니 경주인(慶州人)이다. 신라(新羅) 태사공(太師公)과 고려(高麗) 월성군(月城君)과 본조(本朝, 조선朝鮮) 병자(丙子) 절신(節臣) 증 병조참의(贈兵曹參議) 정려공(旌閭公)의 후손이고 학생(學生) 휘 준서(浚瑞)와 유인(孺人) 진천송씨(鎭川宋氏)의 아들이다.

 

순조(純祖) 병자생(丙子生,1816년)이요, 헌종(憲宗 6년) 경자(庚子,1840년)에 등과(登科)하여 이제 부호군(副護軍)이라. 부인이 나보다 먼저 지하에 가니 태형(泰炯)이 어찌 글이 없으리오.  슬프다, 부인이 모양이 묘하고 거동이 아름답고 기운은 온화하고 마음은 맑으며 유한정정(幽閒靜貞)하여 부덕(婦德)이 구비(俱備)하니 보기만 해도 길상(吉祥)이 있는 단정한 여사(女士)임을 알 수 있다.

 

제사를 받드는 데는 예(禮)를 다하여 정성과 공경이 얼굴에 나타나며 군자(君子)와 더불어 정분(情分)이 심히 주밀(周密)하나 웃으며 먼저 말한 적이 없었고 자녀 교육에 옳은 방법으로 하며 비복(婢僕)을 부리는데도 사랑으로 어루만지고 그 말이 간소하고 수다하지 않은 고로 친하면서도 간교하지 않고 그 덕이 후한 고로 친소(親疎) 원근(遠近)이 모두 착하다고 칭찬하며 가난하여도 막지를 싫어 않고 기색이 편안하며 옷은 남루한 것을 혐의치 않고 스스로 즐기니 이것은 억지로 지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이 품부(稟賦)한 천성이다.


이제 이 글을 지으려고 종이를 펴고 붓을 드니 나의 가슴이 답답하고 슬픈 회포가 자발(自發)하여 금할 수 없는지라. 그 대강이라도 쓰노니 내가 덕산군(德山郡: 예산군 덕산면) 금치묘리(金峙墓里)에서 출생 운명을 기구하게 타고나서 10세 ,을유년(乙酉年,1825년) 부친을 잃고 가운(家運)이 비색하니 그 어디 의지할꼬!?.

 

류 판윤(柳 判尹) 휘 화원(和源)의 부인이 나의 종고모(從姑母)가 된다. 종고모(從姑母)께서 친정이 궁지에 빠짐에 내가 외로이 됨을 불쌍히 여기사 정해년(丁亥年,1827년)에 복(服)을 벗으니 고모께서 나를 데리고 서울로 가심에 나를 입혀주고 먹여주고 친자 친손과 같이하더니 이듬해 무자년(戊子年,1828년)에 조모 상을 치른 뒤에 나의 어머니는 신주를 모시고 예산(禮山) 숙부(叔父)님 댁으로 가신 뒤 임진년(壬辰年,1832년) 4월에 부인을 맞으니 조만간에 식구를 전부 서울로 옮긴 후에 어머님 모시고 신부 신행을 하기로 하고 먼저 존고모(尊姑母)를 뵈옵게 하니 고모께서 용모가 단정하고 깨끗하고 성질이 조용하고 부드러움을 좋게 보셨고 부인도 정성을 다해서 대고모(大姑母)를 섬기니 대고모께서 사랑하시기를 당신 딸과 같이하고 며느리같이 여기시니 온 마을이 그 현숙(賢淑)함을 칭찬하더라.


이런저런 3년 세월이 지나 갑오년(甲午年,1834년) 5월에 어머님 병환 소식이 와서 급히 가느라고 내권(內眷, 안식구)을 데리고 가지 못하고 나 혼자 밤을 새워 내려가서 시탕(侍湯)한지 7일 만에 운명하시니 하늘이 어찌 이리도 무심한고.....

 

통곡하다가도 부인 정경(情境)을 생각하면 그 슬픔이 날보다 더할지라. 어머님 생존 시에 며느리 예(禮)를 드리지 못한 것도 나의 죄요, 편치 않을 때, 미음 한 그릇 끓여드리지 못한 것도 나의 허물이며 별세 후 제사에 참여치 못한 것도 나의 죄니 어머님이 아들도 있고 며느리도 있으나 슬하에 모시는 기쁨도 못 보시고 몇 해를 근심 속에 사시다가 이제 한을 품고 가시니 소자의 불효한 큰 죄라!.

 

이러한 죄와 허물을 지고 부인을 대하니 내 면목이 부끄럽도다. 내측(內側)에 이르되 며느리가 시부모를 섬기기를 부모 섬기는 것과 같이하라 하니 마땅히 부모 섬기는 마음으로 시부모를 봉양하고 부모에 효도하는 정성으로 시부모에 효도할 것이니 사람마다 시부모가 있건만 나 혼자 없는 댁이니 비록 봉양코자 하나 어디에 봉양하며 비록 효도하고자 하나 어디에 효도하리......

 

줄줄 흐르는 눈물이 하루에도 두세 번이라. 내가 목석(木石)이 아닐진대 어찌 간장(肝腸)이 끊어지고 간담(肝膽)이 터지지 않으랴. 그 뒤 19년 만에 부인이 또 세상을 뜨니 참혹한 일이로다. 천도(天道)가 분명하니 나 같은 죄인에 이 정도의 재앙이 없으리오. 4대를 봉사하는 처지에 안주인이 없고 삼개(三箇) 어린아이를 기를 방책이 없으니 괴로움을 주고 고독을 끼침이 어찌 이같이 지독할까.

 

내가 받는 이 재앙이 불행이 아니라 이치에 당연함이라. 누구를 원망하고 누구를 허물하랴. 세상에 있을 때는 고부간에 얼굴을 몰랐으나 지하에 가서 알 수 있을까. 만약 지하에서도 모른다면 한 방에 앉았더라도 누가 시어머니며 누가 며느린지 모를 터이니 이러한 슬픈 일은 내가 자작한 일이라.

 

그러한 일을 말로나 글로나 심중(心中)을 털어놓아 쓰고자 하나 아는 것이 천박(淺薄)하여 돌에 쓴 말이 읽을 만한가. 벗이 없고 나도 살날이 많지 않으니 부인 묘소 옆에 한 자리를 비웠다가 내가 빨리 가서 부인과 손을 잡고 어머님 앞에 봬서 생전에 못 한 죄를 만분의 일이나 풀고자 하는 바이다. 명활(銘曰)


부인은 몸이 아름답고 정성스러움에 따라 집이 잘 되고 못 되는 것 달렸도다. 이러므로 주역(周易)에 수레에 살 노릇을 하는 형상이라 했고 시전(詩傳)에 계명(鷄鳴)의 현(賢)을 있는 것이니 어진 자는 반듯이 후복(後福)이 있고 덕(德)이 있는 자는 반듯이 경사가 남는다고 하니 인(仁)과 덕(德)이 이글에 있어서 삶과 죽음에 증거가 되니 이치는 어찌 믿을 수 없는고.....

 

천대(泉臺)와 토양(土壤)이 어두우니 선구고(先舅姑)의 아름다운 성음을 이을까. 황천(皇天)이 도우시니 뒷자손이 번영하리. 글을 지어 광석(壙石)에 새기니 슬프다, 이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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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原文)

 

贈淑夫人綾城具氏墓誌銘(증숙부인능성구씨묘지명)


水軍僉節制使(수군첨절제사)

李泰炯(이태형) 撰(찬)



夫人姓具貫綾城其始祖高麗壁上三韓三重大匡檢校上將軍諱存裕其遠祖本 朝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佐理功臣綾城府院君諡忠烈諱致寬其高祖嘉善大夫渭原郡守贈兵曹參判諱石柱其曾祖嘉善大夫慶尙左道水軍節度使諱敍五祖通訓大夫興德縣監諱命德考折衝將軍公忠中軍諱鼎錫?淑夫人全義李氏諱殷培女文南床關北兵馬節度使淸江濟臣後夫人以 純祖乙亥五月十二日生壬辰歸于泰炯甲辰遭考喪丁未母夫人卒哲宗壬子七月十三日卒于陽德坊第是月二十日于廣州實村面本庭先塋側生八男女其五?其一乳孩夫人歿後三年男在頀今司果女竹山朴載駿忠愍公命龍後在頀男鳳鍵幼泰炯李姓字景九號雲翁慶州人新羅太師公高麗月城君本 朝丙子節臣贈兵曹參議旌閭公之孫學生諱浚瑞孺人鎭川宋氏之子也 純祖丙子生 憲宗庚子登科今副護軍夫人先我歸泰炯其可以無誌嗚呼夫人姿而儀氣溫而心淑幽閒靜貞婦德俱備望之可知吉祥端正女士人也奉祭祀以禮誠敬著於容與君子情甚摯未嘗啓齒而先言敦子女義方使婢僕恩撫其言簡故親不敢褻其德厚故疏遠稱其賢貧不厭糟糠而處之晏如衣不嫌縞而聊以樂只此非勉寔是天賦今玆作誌臨紙操筆於余蟠鬱之痛懷由中而發自不能禁略言其嗚呼痛矣余生於德山郡金峙墓里而賦命太畸十歲乙酉失所門運零替其能疇依柳判尹諱和源之夫人卽吾從祖姑也姑也念本堂之衰微且憐我之孤子丁亥服卽爲率往於京城衣我食我視之若子若孫翌年戊子遭祖母喪後先奉家廟往依于禮山叔父家壬辰四月聘夫人早晩間必欲擧家移洛後行于歸之禮先見我大姑大姑一見容端而潔稟靜而柔事大姑如事姑盡其誠大姑愛之如己女如子婦宗黨里咸稱其賢淑如是過者於焉三年之久矣鳴呼甲午五月先患報忽至倉猝未及與偕我獨罔夜下來侍湯七日遽當巨創鳴呼痛矣天胡忍斯攀?之中遙度夫人之情境其所罔涯倍於我矣先姑生時未獻上堂之拜余之咎也病焉而未展粥飮之誠余之咎也喪焉而未遂永終之訣余之咎也殯焉而未奉祭奠之禮余之咎也先亦有子有婦而未嘗見膝下幷侍之歡幾年於今乃飮恨而逝此余小子不孝之一大罪也負此罪咎忍對夫人我面目夫人以此結于心嘗曰則不云乎婦事舅姑如事父母當以養父母之心養其舅姑孝父母之誠孝於舅姑而人皆有舅姑我獨無雖欲養誰爲養雖欲孝誰爲孝泫然泣下者日再三矣余非木石安得不斷而肝也玆後十九年夫人亦奄然厭世嗚呼痛矣天胡忍斯天道孔昭以余負辜安得無此天殃也哉四世香火主饋無人三箇孩兒養育沒策貽苦遺毒胡至此極余受此殃非不幸也理固宜矣孰怨孰尤也在世之日雖未相面泉壤之下有識之理耶若無是理則姑婦雖處一室烏能知誰姑誰婦也嗟我積之懷宜亦一洩於言辭文字之間使後世之人知夫人之爲夫人而顧乃才拙識短誌於壙石者蕪率無可觀余亦餘年無多今於壙傍虛一座以爲壽藏之所而惟願速歸與夫人邂逅携手承我先之顔曰姑曰婦少生前鬱之憾庶爲幽冥無負之萬一也否鳴呼悲夫鳴呼痛矣某年某月某日于某郡某里某坐之原銘曰 婦人者身誠然而家之興替繫焉是以易著輿輻之象詩稱鳴之賢仁者必有後德者必餘慶仁與德也文在玆足徵生與死也理胡然難諶泉壤冥漠庶乎嗣先舅姑之徽音皇天眷佑可以期後子孫之蕃衍誌而銘之壙石鳴呼悲夫斯人

慶州李氏鼎珉錄(泰炯 編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