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주이씨/경주이씨 명인록

이학영(李鶴榮)

야촌(1) 2021. 5. 11. 01:54

■ 이학영(李鶴榮)

 

□초명 : 이학주(李鶴周)

□자(字) : 윤명(允鳴)

□생졸년 : 1824(순조 24)~미상

□시대 : 조선 후기

□본관 : 경주(慶州)/국당공 후 문정공파

□활동분야 : 관리

 

[과거]

음관 : 무보(武譜)

 

1824년(순조 24)~미상. 조선 말기 관리. 자는 윤명(允鳴)이고, 본명은 이학주(李鶴周)이다.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거주지는 한양이다. 감역(監役) 이숙(李潚)의 후손으로, 고조는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이달(李鐽)이고, 증조부는 이부만(李溥萬)이며, 조부는 훈련원정(訓鍊院正) 이격(李格)이다.

 

양부는 이현대(李顯大)이고, 양모는 권철(權喆)의 딸이다.

생부 판서(判書) 이현직(李顯稷)과 생모 진사 정홍사(鄭鴻師)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인은 두 명을 두었는데, 첫째 부인은 진사(進士) 유화(柳禾)의 딸이고, 재취 부인은 판서(判書) 이교헌(李敎獻)의 딸이다.


1844년(헌종 10) 증광시 무과에 급제하였고, 선전관(宣傳官)으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좌변포도대장(左邊捕盜大將)에 임명되었다. 1872년(고종 9)에는 임금이 개성부(開城府)에서 실시된 정시(庭試)에 참관하였다가 되돌아오는 길에 비바람을 만나게 되었는데, 수행했던 관리들이 제대로 대비를 하지 못하여 낭패를 당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학영(李鶴榮)은 당시 금군별장(禁軍別將)으로 임금의 행차를 수행하였는데, 그 또한 이 일에 관련되어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임금은 이를 문제삼지 않았으나, 대신(大臣)들의 상소가 끊이지 않아, 결국 간삭(刊削: 관직이나 공신의 지위를 빼앗음)의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곧 사면되었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縉紳武譜
□縉紳八世譜